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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호레 Jul 17. 2024

저력

끄적끄적


 20세기 역사상 가장 극악무도한 범죄자로 꼽히는 칼 팬즈럼과 같은 살인범에 대해 연민을 느낄 수 있을까. 이 불편한 감정은 스톡홀름증후군으로 정의되기도 하는데, 범인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가해자를 옹호 또는 동조하게 되는 비합리적인 현상을 말한다. 어린 시절 사람들에게 당한 참혹한 배신, 그로 인한 상실감이 인간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고 모든 사람들은 악마와 같기에 없어져야 마땅하며, 그 분노가 그를 악마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변호하는 것. 문득 한 때 넷플릭스 스트리밍 1위를 차지했던 종이의 집이 떠오른다. 인질이었던 조폐국 직원 모니카가 금고를 털고 본인을 죽이려 한 덴버와 사랑에 빠지지 않았던가. 앞 뒤 스토리를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개연성을 주기도 하지만, 시즌1 말미엔 모니카가 경찰을 향해 총을 쏘는 걸 보고 내 기준 저래도 되나 선 넘는 유연함을 보여줬다. 같은 환경에서도 모두 같은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삐뚤어질 가능성이 아주 높을 뿐. 불행한 어린 시절을 겪은 누군가는 오프라윈프리가 되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히틀러가 되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타고남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된다. 비범함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반짝거림에 반해 시간이 갈수록 회색빛을 띄는 나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어쩔 땐 내가 세상의 시스템 속에 무력하게 맞춰져 돌아가는 아무 영향력 없는 영혼 같았다. 어릴 적엔 하고 싶은 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도 많았던 것 같은데 나이가 들수록 타고남이라는 단어 뒤에 숨어버리는 일이 왜 이리 잦아졌을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삶에 대한 허무주의다. 이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가치와 의미와 희망에 대한 완전한 거부. 어느 순간부터 나 자신과 타협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나는 뛰어나진 않지만 소속돼 있는 것이다. 이 세상 속에. 이 시스템 속에. 심지어 가끔은 엄청난 감사함을 느끼기도 했다. 니체는 말했다. "모든 고통이 반드시 허무주의를 낳는 것은 아니다. 정신적 고통이든 신체적 고통이든 무엇이든 마찬가지다. 그런 고통은 항상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나는 한동안 고통 속에 있었다. 어쩌면 지금 이 모습이 내가 가장 바랐던 나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 지방 결혼식을 가기 위해 남편과 동탄 srt를 향하는 차 안이었다. 이직을 앞두고 여러 모임을 하던 그가 전날 회식에서 인상 깊었던 일이 있었는지 한참을 입을 움직였다. 같은 팀에 있는 사람 중 한 사람을 언급하며 어려운 환경에서 하나씩 하나씩 성취해 낸 그를 저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남편의 말을 들으며 문득 생각이 들었다. 저력이란 무엇일까.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들 뒤에서 조용히 나만의 무기를 키워가는 사람. 그런 사람을 저력을 가진 사람이라 말하는 걸까. 그렇다면 나도 저력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한 시간 30분 달려 광주 도착했다. 결혼식 전 시간이 남아 방문한 카페에서 두 아르바이트생의 대화가 카운터너머 들렸다.



-오전이라 너무 힘들지 않아요?


-그러게요. 어제 과제하느라 잠을 많이 못 잤어요



그녀들의 대화 속에서 10년 전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제빙기에서 얼음을 수십 번을 꺼내 15온즈 작은 컵에 답은 행동을 반복하던 때. 느리다고는 생각했지만 정도를 가고 있다는 이상한 확신이 들던 때. 그 확신 아래 21살 대학교 자퇴를 하고, 26살까지 이어진 아르바이트. 1년 간 계약직 후 겨우 모은 800만 원으로 서울에 집을 구해서 취업 준비를 하고, 모은 돈도 많지 않았던 사회초년생 시절 지금의 남편에게 먼저 프러포즈를 하기도 했다. 작은 일에 쉬이 머뭇거리던 나는,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일은 우선 저지르고 봤다. 그리고 후회하지 않았다. 난 화려하게 빛나는 사람은 아니지만, 은은하게 비추는 것들이 모여 세상을 따뜻하게 혹은 빛나게 하고 있음을 믿는다. 지금도 유난스럽지 않게 나아가고 있음을.



 언제가 될지 모를, 하지만 분명히 오게 될 내 인생 마지막의 순간. 나의 인생을 요약본으로 정리되어 심판받는 날 내 인생은 어떤 문장으로 정리될까.



‘당신은 남을 너무 의식하고 사느라 당신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군요.

주어진 일들은 착실하게 해냈지만 뛰어나진 못했어요.

하지만 틀린 길을 가진 않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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