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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호레 Apr 22. 2023

암에 걸려 기뻤다


나의 숙원사업이었다. 담배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우고 내 사위는 담배를 안 피웠으면 좋겠다는 아빠에게 건강검진 시켜드리는 일은.

작년부터 진지하게 프로젝트 착수에 들어갔지만, 매번 실패였다. 한 번은 예약까지 잡았다가 일이 바쁘단 이유로 직접 취소하는 정성까지 보여준 아빠였다.

아픈 이를 붙잡고 치과 가기 싫은 5살짜리 어린아이처럼 투정부리다 아빠는 끈질긴 검진 요정으로부터 도망치는 데 성공하는 듯했다.

본가에 간 어느 날 달력을 들고 내가 아빠 앞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검진되는 날 동그라미 쳐. 이제 변경도 절대 안 돼. 일이 있어도 시간 빼서 받아야 해 “


제법 근엄하게 아빠에게 선언하듯 얘기했다. 아빠는 올게 왔다는 표정으로 짧은 한숨과 함께 3월이 적힌 달력을 바라보셨다.

나 한번, 달력 한 번, 교차된 시선이 달력에 멈췄다. 한참 후 돌려준 달력에는 3.24일에 희미한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이날 꼭 받아야 해. 알겠지?”

아빠는 고개를 끄덕였다.



3월 24일이 왔다. 검진은 3시간남짓 걸렸다. 아빠는 수면마취 상태에서도 “끌났다” 라며 나에게 카톡을 남기셨다.

맞춤법 틀린 다급한 카톡을 보니 혼자 기다리는 딸이 꽤나 걱정되신 모양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까 보낸 문자 내용은 기억은 안 난다며 위내시경엔 용종 하나 없는 게 말도 안 된다고 기분 좋은 투정을 부리기 바빴다. 아빠의 건강은 타고났다며 집에 돌아가 저녁을 뭐 먹을까 행복한 고민을 하는 부녀였다.




그 기쁨도 잠시, 검진 결과는 꽤 빨리, 꽤 많은 코멘트와 함께 나왔다.



‘즉시 전문의의 진료가 필요한 사항입니다 ‘

‘향후 지정된 기간에 확인하셔야 할 내용입니다 ‘



그렇게 빼곡히 뭔가가 적힌 종합소견은 처음 봤다. 노년기를 바라보는 중장년 가장의 종합소견소라 여기기에도 뭔가 과하게 많았다. 이어서 문자가 왔다.



[ooo님, 4/12 10:10 흉부외과, 10:40 심장내과 진료 예약완료됐습니다. 병원동 1층 원무과에서 접수 후 진료 보시면 됩니다.]



바로 아빠에게 카톡을 보냈지만 바쁘다는 회신을 받았을 뿐이다.

아빠가 놓칠 게 많을 것 같아 검진소견서는 울산 집으로, 전화는 아빠, 문자는 나에게 보내기로 예약한 탓에 아빠의 추가검진 예약은 삽시간에 가족들에게 퍼졌다.

병원은 온 가족에게 성실히 아빠의 검진 결과를 알렸지만, 그걸 몰랐던 우리 가족은 서로 배려 깊은 비밀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빠의 건강상태를 비밀처럼 간직해 오다 조심스레 두드려보면 ‘너 들었구나?, 너 알고 있었어?’ 되묻고는 알고 있었단 말을 듣고서야 서로에게 걱정을 쏟아내기 바빴다.



속상했다. 깊숙이는 원망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내가 작년부터 검사를 받았으면 폐 안의 종괴가 적어도 4.5cm 까지는 커지지 않았을 텐데.

아니, 그전에 하루에 한 갑 피던 반으로 줄였었으면. 그전에.. 더더 전에..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일은 이미 벌어졌고 아빠의 폐에 종양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새해 첫날 40개의 로또 번호 중 1개 당첨으로 산뜻하게 출발한 나의 2023년. 자잘한 내기에도 끊임없이 져서 회사에서는 나한테는 사다리 타기, 가위바위보 등 운이 따르는 게임들은 금지하기 이르렀다. 올해 얼마나 잘되려고 이렇게 자꾸 지냐며 합리화했었는데, 그런 자잘한 불운들이 큰 행운으로 다가오려고 그랬나 보다.


 추가 검진 결과 아빠의 종양은 폐암이 맞지만, 초기라 수술 한 번 하면 깨끗하게 제거가 된다는 것.

폐암은 증상이 없어서 전이가 되고 발견되는 경우가 흔한데 1년이라도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는 것.


 

아빠의 암이 기뻤다. 정확히는 초기에 발견돼서, 검진으로 알아내서 정말, 너무너무너무 기뻤다. 그리고 감사해졌다. 휴대폰 저장된 아빠의 이름을 누르면 바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문득 떠오르는 어린 날들이 있다. 흙을 잔뜩 묻힌 작업복을 입고 멀리서 다가오는 아빠 모습에 친구와 함께 오던 길을 되돌아갔던 교복 입은 과거의 나.

옅은 술 냄새와 함께 하루의 고단함이 느껴지는 무거운 손으로 잠든 나의 머리를 조심히 쓰다듬던 아빠의 손.

훗날 죄책감이 되어 짙게 새겨진 기억이다. 그때부터였을까. 이상하게 혼자 밥 먹는 중년 아저씨들에게 유난히 시선이 머무는 이유가. 연민이 잔뜩 묻은 어른으로 자란 이유가.



목적 없이 오늘도 아빠에게 전화를 건다. 일을 마쳤어? 밥은 먹었어? 묻는 나의 말에 답이 따라온다.


‘응 아빠는 먹었지. 우리 딸은?’



수십 년 전 내 걸음을 따라 뒤를 지켜주던 아빠의 발걸음을 이제 내가 따라간다. 넓지 않은 보폭으로 한걸음, 한걸음 꾹꾹 눌러 담아 소중히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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