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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호레 Jun 19. 2024

아이스라떼 주세요

그때의 나


여름이 왔다. 거실 밖 좁은 창문 사이로 스며들어 오는 따뜻한 바람이 싱긋하다. 이 계절도 찰나일 테지. 아까운 햇빛을 견디지 못하고 민둥한 발톱을 드러낸 허연 발을 이끌고 동네 카페를 향했다. 배가 불러오면서 몸을 숙이는 게 어려워져 발톱 매니큐어를 칠하는 일은 나의 해야 할일 리스트에서 계속해서 밀리고 밀려졌다. 출산을 하고 아기가 자라는 당분간 누군가 내 발을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아이스 라떼 한잔 주세요.



달달한 음료가 주는 죄책감과 아메리카노가 주는 가벼움 사이 적절한 타협점으로 라떼를 자주 찾곤 했다. 라떼의 씁쓸하지만 고소한 든든함이 좋았다. 처음부터 라떼가 좋았던 건 아니다. 4년 간 5-6군데 카페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나름의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는데, 처음 라떼 맛을 알게 된 건 20살 첫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때였다. 프랜차이즈가 아닌 개인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개발을 핑계로 내 마음대로 음료를 만들어 먹곤 했다. 녹차파우더에 샷을 녹여 먹어보기도 하고, 헤이즐넛 시럽과 바닐라 파우더를 섞어 한 모금에 100 칼로리는 될 것 같은 괴기한 음료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여러 시행착오를 겪어 그럴듯한 메뉴들이 가끔 탄생하기도 했는데 딸기슈라떼, 녹차 프라푸치노, 블루레몬에이드 이름도 멋들어진 메뉴들을 제치고 돌고 돌아 다시 나는 라떼였다. 적당한 얼음에 우유를 넣고 리스트레도 2샷. 기분에 따라 카페시럽 3 펌프까지 넣어주면 끝. 이 한입 마시려고 출근했지.



며칠 전 미용실을 다녀왔을 때의 일이다. 인상 좋은 젊은 미용사 분이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대뜸 한마디를 건넸다.


-고객님을 보니 좋은 기운을 받을 것 같아요


28주를 넘어 한껏 볼록해진 내 배를 보며 한 말이었다. 누군가에겐 오늘 처음 보는 사람에게서라도 얻고 싶은 좋은 일임을, 이 아이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내가 좋은 기운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의 한마디에 우습게도 내가 살아온 길이 잘 못된 길이 아니었다는 생각까지 나아갔다. 말 한마디가 이렇게 무섭고 우습다지. 무언가를 생산해내고 있는 사람만이 1인분을 하고 있는 사람처럼 여겨진 최근이었다. 내게는 직장에서의 밥벌이가, 언제가 될지 모를 미래를 위한 영어공부가 그랬다. 그 생각에 따르면 난 사회에서 1인분을 하고 있지 못한 사람 같았다. 이렇게 주어진 시간들을 공중에 띄워도 되는 건가 자주 내게 질문을 던지고 그다음 날이면 똑같은 하루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 생각의 끝은 죄책감에 가까웠다. 가끔 내가 대책 없이 발을 동동 구르며 대로에 퍼질러 앉아 울부짖기나 할 사람처럼 여겨졌다. 그럴 때마다 그때 먹었던 알싸한 라떼가 떠올랐다. 손님들의 눈을 피해 하루종일 서있느라 아픈 다리를 털며 한 모금씩 먹었던 그때의 불편한 한입이 왜 떠올랐을까. 잘 모르겠다. 그날의 내가, 그 시절의 온도가 그리운 걸까. 앞치마를 둘러매고 머리를 질끈 하나로 묶어낸 어린 여자가 가끔, 아주 가끔 사무치게 생각난다.




문득 반복되어 스치는 순간들이 있다. 마음속에 품고 있다가 괜히 한 번 가고 싶은 욕구가 샘솟았다. 막상 그 장소에 가면 어떤 특별한 감정이 생기거나 하진 않았는데 그저 미련하게 바라보곤 했다. 그런 장소들은 대부분 특별하지도, 특이하지도 않은 곳이었다. 나에겐 고향 바다가, 때로는 나의 학교가, 때로는 그렇게 싫었던 해남 시골 어느 한 곳이 되기도 했다. 나는 가벼이 잊고 남겨진 것들을 진득이 그리워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남겨진 것들은 특별한 모습도, 일관된 형태도 띄지 않았다. 그냥, 그냥 지나온 시간들이 걸려 내가 되었을 뿐이었다.



그 시절을 품고 몇 해의 여름을 지나왔다. ‘마스크 없음’을 써붙여 놓은 약국, 편의점들의 텅빈 매대가 당연했던 때, 5부제에 맞춰 줄 서서 마스크를 샀던 때가 언제였냐는 듯 모두들 서랍 한구석에 처치 못한 형형색색의 마스크들을 두고 살아간다.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되고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여전히 나는 김동률의 노래를 듣고 여름이 되면 아이스 라떼를 마신다. 모든 게 변했지만, 모두가 변한 건 아니다. 내가 그랬듯. 우리의 사이가 말하듯. 오래된 친구를 만나면 그때의 나로 변하듯.



다시 여름이 왔다. 여전히 나는 얼음이 스치며 내는 차가운 소리를, 에스프레소 단층이 흩어져 우유 속으로 스며드는 모습을 좋아한다.

나는 꾸준히 여전한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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