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초년생 시절, ‘나에게도 곧 따뜻한 봄이 올거야’는 바람들로 하루 하루를 보내다 보니 어느새 달력은 이듬해 3월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행히 주위 분들의 많은 도움으로 나도 대부분의 선배들의 뒤를 따라 조금씩 프리 생활에 정착을 해가던 어느 날이었다. 후배에게 전화가 한 통 왔다.
“혹시 다음 주 수요일에 시간 있어? 통역이 들어왔는데, 한 명이 더 필요하대.”
이럴 때는 없는 시간이라도 만들어 내야 하지 않겠느냐 말이다. 그런데 의뢰한 쪽에서 날짜만 알려주고 나머지 사항들을 빙빙 돌려 모호하게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조찬 모임이라고 했다가 순차인데 두 명이 필요하다 했다가 조찬회 후에도 계속 다른 회의가 있다고 했다가. 주제, 시간 같은 꼭 필요한 정보도 들을 수 없었다. 이야기는 점점 미궁에 빠져 중간에 전달해 주느라 애꿎은 후배 전화통에 불이 났다. 심지어 요일까지 바뀌는 바람에 후배는 일만 넘겨주고 정작 같이 하지 못하게 되어 미안함과 아쉬움만 커져갔다.
결국 후배 자리를 대신할 사람을 찾기 시작했는데 통역이 몰릴 시기인지라 의외로 잘 안 찾아졌고 게다가 시간도 장소도 알 수 없는 상황이라 더욱 난감했지만 다행히 친한 선배가 흔쾌히 수락해준 덕에 마음을 놓을 수가 있었다. 한참 시간이 흘러서야 알게 된 이 통역의 정체.
KAL기 폭파범 김현희와 북한에 납치된 다구치 야에코 가족과의 상봉 기자회견 동시통역이었던 것이었다. 다구치 야에코는 김현희의 일본어 선생님이었다고 한다. 그제서야 주최측 설명이 알쏭달쏭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보안 때문에 그렇게도 철저히 숨기려고 했었던 것이다.
‘모레 아침, 부산 해운대, 대기’
문제는 그 이상의 정보가 없었다는 것. 장소가 어딘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무슨 007 첩보 작전도 아니고. 프리랜서 초년병 입장에서는 ‘원래 다들 이렇게 하는 건가?’ 벙벙할 뿐이었다.
어차피 그 날은 올 거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공부뿐이었다. 무작정 자료 수집에 나서기 시작했다. 남은 시간은 하루 반 정도. 그 안에 모든 자료를 찾아서 공부하고, 견적서를 만들어서 보내고, 숙박과 교통을 예약하고 이동하고, 그 사이 사이 평소에 하고 있었던 입시 학원 수업과 일본어 수업을 나가야만 했다. 아 갑자기 머릿속에서 영화 다이하드에 나왔던 시한 폭탄에 달린 시계가 등장하는가 싶더니 빠르게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숨 막히는 시간과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빨리 움직여야 한다. 움직이자.
선배와 나는 우선 교통과 숙박을 나누어 예약하기로 하고 최대한 자료를 서로 찾아보기로 했다. 담당자가 보내 준 인터넷 사이트는 물론 검색 엔진을 초고속으로 돌려서 필요하다 싶은 자료는 몽땅 뽑아냈다. 그러나 북한으로 납치된 일본인에 관해 많은 정보를 얻기엔 무리가 있는 상황.
마약 탐지견, 아니아니 사이버수색대가 되어 눈에 불을 켜고 인터넷을 찾았다. 단편적 정보를 긁어 모아 연대별로 정리했다. 그리고 한 줄기 빛을 찾았다. 바로 김현희가 쓴 ‘이은혜, 그리고 다구치 야에코’라는 책을 발견한 것이다. 다만 이 책은 출판된 지 15년이 흘러 이미 절판된 상태. 있는 곳은 딱 한 곳 국회도서관뿐이었다. 다음날 여의도에 갈 일이 있다는 것은 신이 내려 주신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지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다음날, 국회도서관에 가서야 알게 된다. 대출이 아무나 되지 않는다는 것을. 게다가 열람하는데도 특별한 절차가 필요했다.
아, 맞다! 국회도서관에 근무하는 동기언니가 있었지? 휴, 다행이다. 그러나 0.1초 후 알았다. 얼마 전 그 언니에게 출산 문자를 받았고, 때문에 지금은 국회도서관이 아니라 산후조리원에 있으리라는 것을. 다시 저 밑에서부터 깊은 한숨이 올라왔다.
아... 나는 왜 지금까지 국회도서관 열람증 하나 만들어 두지 않은 걸까. 별게 다 한탄스러웠다. 그래봤자 무엇하리. 기차 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1시간 45분. 그나마 30분 이동 시간을 빼면? 내게 남은 건 1시간 15분이었다.
시간이 없었다. 정말 손가락과 눈꺼풀을 제외한 모든 감각을 한데 집중해서 초인적인 힘으로 열람증을 발급받고 도서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걸린 시간은 약 30분. 문제는 다음 단계였다. 도서관에 열람 신청만 하면 바로 책을 볼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최소 30분은 기다려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또한 누구를 탓하리오, 발만 동동 구르면서 전광판에 내 번호표가 뜨기를 쳐다 보기 약 백 스무 번, 뒷 목이 뻣뻣해질 쯤이 되자 드디어 내 번호가 점멸했다.
앞으로 남은 시간 서울역까지 갈 시간을 계산하면 내게 남은 시간은 이제 15분이었다. 그래 침착하게, 하지만 빨리 우리에게 필요한 내용을 찾자.
하지만 행여 중요한 단서를 놓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머리말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몽땅 복사를 해버리고 말았다. 회사에서 번역하기 위해 기술 잡지를 매주 복사하며 그렇게 구시렁댔는데... 그때 쌓은 복사 실력이 이리도 유용하게 쓰일 줄 몰랐다. 세상엔 참 버릴 경험이 없다.
허겁지겁 도착한 서울역. 선배를 만나 KTX로 몸을 날렸다. 이동하는 짬을 이용해 우선은 서로 공부해온 것을 공유하고 같이 책을 앞 뒤로 나누어서 읽었다. 부산 해운대의 한 호텔에 도착하니 이미 저녁. 호텔 방의 무드등은 어두침침했다. 조용한 카페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여기가 어딘가. 낭만의 거리, 젊음이 넘치는 해변 해운대가 아니던가. 겨우 찾은 카페는 하필 커플들 전용 카페였다. 테이블마다 드리워진 커튼에 책보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일렁이는 촛불 조명 때문에 결국 우리는 한 시간 반 만에 접고 다시 호텔로 돌아오게 되었다. 선배와 ‘슈퍼 가서 랜턴이라도 살까’ 하면서 웃었다. 우리는 침대에 누워 KTX에서 교차로 읽은 책 내용을 토대로 납치자들의 삶과 가족들의 마음의 고통에 대해 대화하며 내용을 정리해갔다. 그리고 어느새 둘 다 곯아 떨어졌다.
‘9시, 벡스코, 대기’
이튿날 아침, 둘의 휴대전화로 동시에 문자가 왔다. 이쯤 되면 첩보 영화의 주인공 같은 착각도 즐길 수 있을 정도가 아닐까 싶었다. 취재진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행사장 입구를 뚫고 보안업체 직원들의 가드를 받으며 입장했다.
행사 시작 시간까지는 3시간이나 남은 상황. 부스 안에서 긴긴 대기가 시작됐다. 대기 중에 우리가 해야할 일은 당연히 공부였다. 그리고 커피도 실컷 마셨다. 너무 많이 마셨던지 화장실을 다녀오다가 부스로 돌아가려는데, 우리 부스 뒤 기계 설치해 둔 곳에서 누군가가 부스럭 부스럭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장비 뒤에 무슨 선을 꼽고 있었다.
오! 이게 선배들이 말하던 몰래 녹음?!
직접 가서 안된다고 할까? 어쩌지? 쭈뼛대고 있는데 뒤에서 다가오신 장비팀 기사님이 찡긋 웃으시더니 걱정 말고 들어가라고 했다. 1초만에 그 기자님을 돌려보내시고는 앞에 의자를 떡 하니 두고 앉아서 지켰다. 하지만 잠시 후 기사님이 자리를 비운 사이, 끼익 부스문이 열리며 쑥 하고 건장한 남자 팔뚝이 들어오는 것 아닌가.
“녹음 좀 합시다”
이번엔 다른 기자님. 맡겨놓은 지갑이라도 찾으러 온 사람처럼 너무나 당당해서 선배도 나도 웃음이 빵 터졌다. 이러시면 안 된다며 웃으며 문을 닫았다. 지루한 대기시간 중 작은 활력이 되었다. 덕분에 집중력도 올라간 느낌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 시간이 오고야 말았다. 기자회견이 시작된 것이다. 김현희와 다구치 야에코 가족들의 입장에 맞춰 찰칵 찰칵 찰칵 쉴 새 없이 터지는 플래시 소리. 영화 연출처럼 한순간 아득해졌다가 팟 현실로 돌아오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기자님들만 300명 이상, 한 마디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강한 다짐이 부스 벽을 뚫고 들어오는 듯 했다. 묘한 긴장감이 회의장 안을 채웠다. 나 역시 집중하고 한 마디 한 마디 놓치지 않으려고 온 몸의 신경을 모두 곤두세웠다.
그러나 몇 마디 했을까... 이제 시작이다 싶은 순간 기자회견을 마치겠다는 장내 방송이 장내에 울려 퍼지는 게 아닌가. 시계를 보니 아직 12시 25분. 선배와 교대로 하긴 했지만 내 부분은 10분만에 끝나고만 것이다. 그 난리를 치고 갔는데, 정작 통역한 것은 단 10분이라니? 10분이라니!!
기분이 묘했다. 인하우스 때와 너무 다른데? 언제 시작하고 언제 끝날지 모르니 1일 통역 최대 요율에 출장비까지 다 받았는데 10분이라니. 통역시간 대비 최고 요율을 받았다고 콧노래라도 불러야 하는 건가 싶지만 괜히 아쉽기도 했다. 우리는 ‘준비도 통역에 포함이니까’, ‘우린 이미 일주일부터 통역 모드였잖아?’하면서 아쉬움을 달랬다. KTX를 저녁 늦은 시간으로 예약했기에 기차 시간까지도 한참이 남아 있었다. 부산까지 왔으니 회는 한 접시 먹어야 하지 않겠나며 자갈치 시장으로 향했다.
우리가 통역한 내용이 어떻게 나왔을까? 당시에는 모바일로 실시간 체크를 할 수 있을 인터넷 인프라는 없었기에 서울로 올라와 인터넷을 찾아봤다. 기자회견이니 우리가 통역한 내용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우리의 통역이 그대로 기사화되어 있었다. 뉴스가 나온 시간을 보니 그야말로 실시간이었다. 오 이렇게 내 통역이 쓰이는 거구나. 새내기 통역사에겐 그저 신기하고 짜릿한 순간이었다. 씨익 미소가 나왔다. 2009년 그날 썼던 일기의 뒷장으로 이 챕터를 마무리해볼까 한다. 과연 지금 나는 그때의 다짐을 실천하고 있을까를 반문해보면서 말이다.
“요즘 주위에서 프리랜서를 준비하는 동기들 후배들이 가끔 물어온다. ‘어떠냐고, 일이 많으냐, 먹고 살만 하냐’고 말이다. 글쎄다. 아직은 시장이 어떻다고 평가 내릴 만큼 경험이 많은 것도 아니고, 일이 많아서 눈코뜰새 없이 바쁜 일상을 보내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조금 진부한 표현이기는 한데... 매일 매일 ‘피가 끓는다’는 것. 표현할 수 없는 큰 만족감과 성취감이 있다는 것. 큰 꿈을 안고 통대에 왔지만 졸업하고 회사를 다니면서 어느새 하루 하루 편안함과 익숙함에 물들어 나도 모르게 도태되고 안일해졌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다시 나는 그 날의 나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더 많이 부딪히고 더 많이 좌절하고 그리고 더 많이 경험해 나갈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선배님들, 선생님들이 그러셨든 나 역시 후배들에게 조금이나마 영감을 줄 수 있는 통역사가 되어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