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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채원 Apr 26. 2023

6. 고시생, 아이돌 연습생, 통대생 2/2

개복치들, 철갑 멘탈로 진화하다

긴 터널처럼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통대 생활에 큰 동기부여가 되었던 일들도 있었다. 교수님들의 통역 참관은 좋은 자극이 되었다. 당시 교수님들은 국제회의 현장에 학생들을 참관하게끔 불러주셨다. 한 번은 광화문에서 있었던 회의에 참관을 갔는데 주제가 무려 을사늑약이었다. 한국말로도 일본말로도 어려운 내용을 유려하게 통역하는 교수님들 목소리를 들으며 전율이 흘렀다. 민감한 사안이다 보니 한 학자의 발언에 객석에서 고성이 터지고 소란이 있었음에도 두 분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고성과 소란은 당시에 무서웠는데 나중에 프리랜서가 되어 현장에 나가보니 한일간 과거사 관련 회의에는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그때 본 교수님들의 의연한 모습을 떠올리며 나도 담담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교수님들 통역을 참관하면서 국제회의통역사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실체를 가진 무엇인가로 형상화되는 느낌을 받았다. 통역은 이렇게 해야 하는구나 하는 깨달음, 내가 이런 대단한 분들께 가르침을 받고 있구나 하는 감동도 있었다. 


통역이 끝나고 나서는 통역부스로 불러서 실제로 통역 장비를 보여주시고, 부스에 실제 앉혀서 기념사진도 찍어주셨던 것도 큰 힘이 되었다. 그 순간은 찰나였지만 이후 오래오래 동기부여가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나도 프리랜서가 된 이후 학생들이 국제회의에 참관을 오면 학생들을 부스 통역사석에 앉게 하고 사진을 찍어주게 되었다.  


교수님들이 18년-20년 선배시니 나도 이 길을 포기하지 않고 20년 하면 언젠가 이렇게 통역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기대감도 얻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것, 신문 읽기, 문장구역, 쉐도잉, 스터디, 용어 및 표현 정리...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이 언젠가 올 지 모를 그날을 대비하기 위한 의미 있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눈 팔지 않고 다음 한 학기를 달리기 위한 연료는 이렇게 채워졌다.      


통대 졸업 전 다양한 루트를 통해 실전 통역을 경험한 것도 도움이 되었다. 지금도 기억에 많이 남는 통역은 한여름 나가사키의 한 병원에서 보낸 열흘이다. 척추측만증이 심해서 일본 병원으로 재활 훈련을 가게 된 아이의 부모님을 통역했다. 온화한 얼굴로 의학용어를 랩처럼 쏟아내는 의사 선생님 회진 시간이 되면 너무너무 무서웠지만, 치료 프로그램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내 통역이 누군가에게는 절실한 소통의 끈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꾀부리지 말고 더 열심히, 더 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통대의 시계는 더디게 흘러가는 줄 알았는데, 모래시계처럼 한 톨 두 톨 모이니 어느새 훌쩍 2년이 지나 있었다. 20년 가까이 지나 돌이켜봐도 살면서 이때처럼 하루하루 충실하고 충만했던 시절이 있었을까 싶다. 부모님의 단골 멘트는 ‘안 자니’, ‘언제 자니’였지만 잠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괜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일러두자면 통대는 자발성과 자율성이 보장되는 곳이다. 스파르타식 시스템도 아니고 아무도 공부를 강요하지 않는다. 모든 건 스스로 할 나름이었다. 가방만 들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도 있었고 학교 원우회실과 독서실에서 쪽잠을 자며 공부하는 사람도 있었다. 각자의 간절함의 크기에 따라 움직였다. 


나는 비장하게 머리띠를 두르고 필승! 이런 학생은 아니었지만 자발적으로 하루 24시간을 공부와 자기 계발로 충실하게 꾸렸고, 이때의 기억과 경험이 좋은 인생 자양분이 되어 주었다. 오늘은 이 분야를 공부해야지, 내일은 과제를 위해 몇 시에 일어나야지, 이 부분이 부족하니 앞으로 한 달간 이렇게 해봐야지. 스스로 분석하고 판단하고 계획하고 실천하는 경험이 축적되니 스스로에 대한 믿음도 커져 갔다.


내 생활을 내가 주체적으로 꾸려가고 그것이 결과로 돌아오는 깨알 같은 성취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자존감도 높아졌다. 그때 단련해 둔 생활의 근육, 마음의 근육이 지금도 단단히 내 직업 인생을 지탱해 주고 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으세요?'


얼마 전 한 학부생이 질문을 했다. 곰곰이 생각해 봤다. 살아온 과정에 아쉬움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이걸 그때 알았더라면 하는 때도 있다. 하지만 돌아가고 싶을 정도의 과거는 없었다. 인생 1회 차를 너무 열심히 살았던 것인지, 다시 태어나도 이때만큼 할 자신이 없어서다. 하얗게 열정을 불태워서일까 미련도 후회도 없다. 


시대를 막론하고 사회는 젊은 세대에게 열정을 강요한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해야 해'부터 '젊은 사람이 이렇게 빠져서 되겠어', '너는 젊은 애가 이렇게 열정이 없니', '라떼는...' 저절로 귀가 닫힌다. 사람은 강요하지 않아도 정말 하고 싶은 일을 만나면 알아서 밥을 줄이고 잠을 줄인다. 간절함과 절박함이 사람의 본능을 잊게 만든다는 것을 나는 체험했다. 혹시 이 글을 읽으면서 오해는 없으셨으면 한다. 당장 바로 지금 열정을 찾아서 장착하라는 말은 아니다. 인생은 열정이 전부가 아니기도 하고 어쩌면 아직 그런 일을 만나지 못한 것뿐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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