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문어가 되다
이런 말이 있다. 첫사랑, 첫눈, 첫 키스... 모든 처음은 설렌다고. 통역에서는 이렇게 바꿔야 할 것 같다. 모든 처음은 아.찔.하.다.
앞서 소개한 대학 시절 첫 공식석상에서 순차통역 현장에서는 땀을 한 바가지 흘렸었다. 첫 MC와 첫 동시통역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 통대 재학 시절이었다. 동시통역 보다 MC를 먼저 데뷔하게 됐는데 통대 2학년 때 아르바이트로 갔던 세종문화회관 오페라 공연 리셉션 자리에서였다. 무대 조명팀 통역으로 리허설과 세팅에 열흘인가를 일했고 이제 정식으로 공연 개막 날이 다가왔다.
당일 오픈 리셉션 1시간 전이었나? 담당자님이 말씀하셨다.
"어? 그러고 보니 진행을 해주실 일본어 MC가 안 계시네? 혹시 가능하세요?"
일본어 사회도 보고 통역도 하고 북 치고 장구치고 다 하라는 것이었다. ‘아 제사상에 올릴 청주가 없네, 요 앞 슈퍼 가서 하나 사와라’ 같은 아빠 심부름 같은 가벼운 질문이었다.
“네”
날아오는 공을 가볍게 받아쳤다. 해본 적이 없으니 겁도 없었다. 하긴 내가 거절하면 대안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정작 행사 중에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다가(축사 스피치 중에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이 나온 것만 기억에 또렷하다) 다 끝나고 밖으로 나가니 다리가 풀렸다. 둔한 건지 긴장을 해도 당시에는 멀쩡하다가 나중에 반응이 오는 편이다. 술도 안 마신 맨 정신에 광화문 일대를 갈지자로 휘젓고 다녔다.
그로부터 6개월 후. 생애 처음 직업으로 동시통역에 데뷔한 날은 12월. 2학년 마지막 달, 졸업 시험을 끝낸 열흘 뒤였다.
내가 통대생이었던 시절에는 빠르면 2학년쯤 실전에서도 동시통역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동기 중에는 2학년에 올라오면서 이미 동시통역 첫 무대를 마친 언니들도 있었다.
나는 순차통역이나 위스퍼링 통역은 대학 때부터 간간히 해왔지만 동시통역은 2학년에 올라가서도 좀처럼 기회가 닿지 않았다. 그때까지 내가 해 본 동시통역은 수업이 전부였다.
통대에서는 2학년이 되면 실전과 똑같은 환경에서 동시통역을 훈련하는 모의회의라는 수업이 있다. 8개 언어 부스가 빌트인으로 되어 있는 애경홀이라는 큰 홀에서 주제 특강을 하러 와주신 외부 연사님의 강연을 통역하는 것이다. 청중은 1학년과 무려 각과 교수님들이었다. 매주 2인 1조로 통역을 했다. 당시 우리 반은 총 6명이었기 때문에 3주에 한 번 기회가 돌아왔다.
애경홀의 부스는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통창으로 되어 있어서 청중들의 옆모습과 정수리가 보이는 구조였다. 교수님의 모습은 한눈에 띄었다. 교수님이 갸우뚱하는 것 같으면 “어떡해 지금 내 통역 이상했나 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첫 모의회의 때도 긴장 탓에 끝나고 나서 위가 꼬였다. 도저히 걸을 수가 없어서 빈 교실에 의자를 붙여놓고 한동안 누워 있었다. 동기 언니가 추워 보인다며 다 읽은 신문지를 덮어주고 갔다. 잠시 눈을 붙였다 뜨니 밖은 깜깜했다. 신문지가 이렇게 따뜻한지 그때 처음 알았다.
이렇게 학교에서 훈련만 해도 긴장이 되었는데 실전에 나간다니... 만감이 교차됐다. 원래 피하고 싶은 날은 더 빨리 다가오는 게 인생 아닌가. 어느새 그날은 곧 오고야 말았다.
나의 첫 동시통역 국제회의명은 '한일대만여성민우회 국제회의'였다. 첫 동시통역부터 릴레이였다. 한국어 일본어 2개 언어만 있어도 분명 정신없을 것이 뻔한데 중국어 통역사 선생님들과 릴레이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각오를 하고 갔어도 상상력의 부족으로 학교에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상황들밖에 없었다. 솔직히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내 실력(발통역)도 포함해서 말이다.
싸이월드에 기념으로 남긴 그날의 사진 속 나는 너무나 상기되어 있었다. 얼굴이 달아올라 새빨간 것이 삶은 문어 같았다. 차이나 칼라 비슷하게 목까지 버튼을 잠그는 정장을 입고 갔는데 그 겨울에도 더워서 버튼을 모두 풀어헤치고 있었다. 분명 몸 어딘가에서 만둣집 증기 같은 뜨거운 김이 나왔을 것 같다. 그날의 소회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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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김 불면 무너질 것 같은 부스에... 일본분, 한국분, 대만분 입에 모터 달고 말해서 정신없고....
헤드폰 채널 맞추는 거야 당연하지만 일본어 말할 땐 일본어로, 한국어 말할 땐 한국어로 마이크 채널도 바꿔야 해서 완전 바빴다. 하루 하고도 완전 녹초가 되었는데 (정확히 말하면 반나절) 며칠씩 하면 어떻게 될라나... 그래도 정말 좋은 경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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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는 학교에서 연습할 때와 현장의 상황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었다. 학교에서의 훈련은 가상의 국제회의 하에서 이루어지기에 지극히 잘 정비(?)된, 이상적인 상황이었던 것이다.
아주 사소한 것부터 말하면 한 문장에 한국어와 일본어를 섞어 말하는 연사가 있었다. '된장국은 오이시이데스' 이런 식으로 모든 문장을 섞어 말하는 식이었다. ‘된장국은 맛있습니다’ ‘미소시루와 오이시이데스’ 이렇게 한국어 한 번 일본어 한 번 다 통역해줘야 해서 두 배로 말을 해야 했다. 이해하기 쉽게 된장국 예시를 든 것뿐이지, 전문 분야 이야기를 저렇게 한 거라 너무 비효율적이었다. 중간에는 나가서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다.
현장에서는 사람들이 마이크를 입에 너무 가까이 대거나 작게 말해서 무슨 말인지 들리지 않는 일이 의외로 정말 많았다. 그나마 마이크라도 쓰면 다행,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고 생목으로 질문하는 청중이 있었다. 사회자가 통역을 위해 마이크를 쓰라고 하면 본인은 목소리가 커서 괜찮다고 하는 것 같았다(추정). 부스에는 음이 차단되어 약간 물 속에 있는 느낌으로 외부 소리가 들린다. 입술을 읽어보려고 했다. 금붕어가 뻐끔뻐끔 이었다.
제일 강렬했던 것은 비문이 아닌 사람을 찾기가 힘들었다는 점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인데, 학교에서 너무나 곱게 자란 탓에 몰랐다. 사람은 원래 머릿속에 떠오르는 개념을 언어로 이어 붙이며 말한다. 때문에 글로 쓴 걸 읽지 않는 한 두서없을 수밖에 없다.
라떼는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지만 내가 학교 다닐 때는 유튜브가 없었다. 그래서 학교에서 연습할 때는 교수님들이나 동기들이 연사의 역할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고 완성된 문장을 일정 속도로 낭독해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다른 변수들의 부하가 매우 낮기 때문에 학교에서의 고민은 표현이나 뉘앙스를 어떻게 통역하면 좋을까에 보다 초점이 맞춰졌다. 너무 정제된 글말만 연습했던 터라 실전에서 피를 흘리고 나서야 온실 속에서 곱게 자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전에서는 표현이나 뉘앙스보다 신경 써야 하는 다른 요소들이 많다는 것... 개인적으로 첫 실전 동시통역을 통해 이 점을 실감할 수 있었다. 동시통역에 대한 환상 내지는 허세도 버릴 수 있었던 좋은 약이 된 것도 같다. 삶은 문어가 될 것을 대비해서 한동안 화장을 짙게 하고 통역에 가기도 했다.
통역 필드에서 근 20년을 일하면서 그동안 여러 통역의 경험을 쌓아 왔지만 아직도 매번 처음 경험하는 일들이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 3일 후면 통역 인생의 새로운 획을 그을 첫 경험을 하고 오게 된다. 과연 얼마나 땀 칠을 하고 올 것인지 기대된다. - 훗날 그 경험을 추가해서 써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