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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채원 Apr 25. 2023

6. 고시생, 아이돌 연습생, 통대생 1/2

개복치들, 철갑 멘탈로 진화하다

개강의 들뜬 마음은 딱 1주일 갔다. 교수님들은 자기소개와 수업소개가 끝나자마자 바로 통역을 시키셨다. 연설문이었다. '네?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이라니요, 안보라니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혀가 꼬였다. 개강 첫 주에는 내내 처참한 현주소를 확인했을 뿐이었다. 그 주의 우리가 할 줄 아는 언어 일본어, 한국어, 합해서 0개 국어였다.


금요일에는 동기들끼리 회기동 치킨 맛집에 가서 옛날통닭을 시켜 먹었다. 개강 첫날의 그 생기와 패기는 어디 가고 다들 너무나 지쳐 있었다. ‘우리 이제 팔자 좋게 닭 뜯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인가 봐’하고 말하던 동기 언니의 말이 지금도 생각난다. 나는 진짜 넋이 나가 있었던 건지 닭다리도 닭가슴살도 아니고 살도 없는 닭모가지를 멍하니 뜯고 있었다고 한다(근 20년이 다 되는데 지금도 놀림 받고 있다). 첫 주에는 단합도 하겠다고 같이 모여서 밥도 먹고 했는데, 단합이고 뭐고 당장 밥 먹을 시간도 아껴야 할 판이었다.


통대 시간표는 살벌했다. 대학원이라는 데가 이런 데였나? 학부 때보다 학교에 있는 시간이 길었고 고등학교보다 빡빡했다. 기본적으로 월화수목금 모두 수업이 있었다. 수업은 2시간씩 매일 2-3개, 총 10과목 정도였지만 학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도가 높았다. 통역, 번역, 언어, 시사, 주제특강, 모의회의... 모든 수업에는 숙제와 발표, 실기가 있었다. 매 수업마다 나가서 통역을 해야 했는데, 한 반에 8명뿐이라 순서는 기가 막히게 빨리 돌아왔다. 소수정예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한 주에 발표 2개 이상은 기본이었다. 통역 수업은 발표자가 아니어도 쉴 새가 없었다. 좌장도 되고 연사도 되고 통역사도 되고 청중으로 피드백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수업은 전학과가 같이 듣는 공통 수업 말고는 모두 일본어로 진행됐다.


몇 달이 지나자 문제는 수업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수업은 그나마 바쁜 하루 중 숨통이 트이는 시간이었다. 문제는 수업이 없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였다. 가깝게는 분반 시험(동시통역과 번역반을 나누는 시험: 지금은 없어졌다), 졸업 시험을 통과하냐 마냐가 걸려 있었고, 조금 덜 가깝게는 통역사로 살아 남을 수 있느냐 마느냐가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무조건 실력을 키워야 했다.   


놀 때가 아니었다. 공부를 100미터 질주처럼 해야 했다. 스터디도 해야 했고 개인 공부도 해야 했다. 스터디 때는 둘셋씩 짝을 지어 서로 텍스트를 읽어주고 통역을 하고 피드백을 주고받았다. 수업이든 스터디든 배운 것을 내 것으로 소화하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했기에 남은 시간은 개인 공부로 열을 올렸다. 주말에도 쉴 수가 없었다. 별 보고 학교 갔다가 별 보고 집에 온다는 선배들을 말을 들으면서 과장이라 생각했는데, 그걸 직접 겪고 있었다. 하루 종일 얼빠진 사람처럼 중얼대고 다녔다.


학교 생활에서 가장 오랜 시간 익숙해지지 않았던 것은 내 통역을 듣는 일이었다. 통역 수업에서는 주제를 정하고 모두의 앞에서 통역을 하는 것은 물론, 내 통역을 녹음한 테이프를 듣고 자가평가를 해오는 숙제가 있었다. 녹음된 내 목소리를 듣는 것만도 고역인데 '스스로 치부를 낱낱이 고하라'는 끔찍한 미션이었다. 2학년 1학기까지도 너무나 내 목소리가 듣기 싫었다. 하지만 해야 했다. 녹음을 하는 숙제는 백번이고 이백번이고 연습했다. 동기들, 친구들, 가족들에게 들려주고 '이거 어때?' '이게 나아, 이게 나아?' 물어보며 질척였다.


번역 수업은 번역한 텍스트가 있어야 진행이 되니 당연히 매주 번역을 해서 제출해야 했다. 모든 수업에서 분야별 조사 발표는 늘 필수였다. 통역 현장에서는 워낙 많은 분야를 접할 테니 미리 기본적으로 알아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넓고 깊게’ 통대가 분야 지식을 대하는 태도였다. 특정 주제에 대해 주제 지식과 본인의 생각을 엮어서 1분 말하기, 3분 말하기, 5분 말하기 같은 훈련도 했다.      


통번역을 막론하고 수업 시간에는 서로의 아웃풋을 평가하는 크리틱이라는 것을 했다. 통대생들이 모여서 '통대 시절'을 떠올릴 때 적어도 1-2순위로 떠올리는 말이 이 '크리틱'이다. 통대생에게 이 '크리틱'이란 말을 툭 던져주면 아마 자동으로 반응이 나올 것이다. '아 너무 싫었어, 지긋지긋했지, 난 상처받았어, 할 말 없었어, 나중에는 그냥 나오더라, 아냐 난 쥐어짰어, 그래도 도움 되지 않았니'... 각자의 기억은 다르지만 크리틱은 통대생에게 새겨진 문신 같은 기억이다.


동기들도 처음에는 다들 ‘뭐 말해야 돼?’, ‘나 할 말 없는데?’, ‘나도 모르는데 누가 누구를’하며 쭈뼛쭈뼛했지만 시간이 흘러 모두가 프로 비평가로 변해 있었다. 남 앞에서 의견 말하기, 정리해서 말하기, 발표하기, 통역하기, 그리고 까.이.기.에 익숙해져서인지 통대 출신자들은 어디에 내놓아도 잘 살아남는다는 이야기를 한다. 유리 멘탈, 두부 멘탈 개복치들도 훈련을 하다 보면 어느새 철갑 멘탈로 진화한다. 영화 타짜에서 김혜수의 “나 이대 나온 여자야” 대사가 유행할 때 통대생과 통대 졸업생 사이에서는 “나 통대 나온 여자야”가 밈으로 돌기도 했다.      


일상이 정신 없다 보니 통대생들은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했다.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고 과제할 시간도 부족한데, 밥 다운 밥까지 먹으면 잠을 더 많이 포기해야 했다. 통대 내내 평균 수면 시간은 4시간 정도였던 것 같다. 그 이하로 자면 다음 날 집중력 저하로 발통역으로 이어졌다.


눈을 뜨고 있는 모든 시간은 공부에 올인해야 했다. 자연스럽게 밥 먹는 시간을 줄이게 되었다. 아침에는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가판대에서 파는 치즈스틱빵을 사서 질겅였다. 해가 떠 있을 때는 통대 건물을 나가지 않았고 김밥으로 때웠다. 외대 김밥 맛집 풍년김밥과 김가네 멸추김밥을 번갈아가며 먹었다. 집에 가는 길에는 학교 앞 포장마차에서 빨간 어묵을 두세 개 먹었다. 그때 먹은 김밥을 한 줄로 세우면 잠실대교 길이 정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1년을 넘게 보내니 살이 훅 빠져 있었다.


그 와중에도 동기들은 여고생처럼 여러 순간에서 웃음을 찾아냈다. 통대는 단식원이고 우리는 2년 동안 김밥 다이어트를 하러 온 거라며 유머로 승화시켰다. 물릴 법도 한데 김밥은 어느새 내 소울푸드가 되었다. 지금도 힘들고 피곤할 때는 어머니의 된장국이 아니라 김밥부터 떠오른다. 당시 김밥 먹는 그 시간이 수업과 스터디와 과제의 부하를 잠시 잊을 수 있는 힐링 타임이 되어주었던 기억 덕분인가 보다.      


통대생의 삶은 고시생의 삶과 비슷했다. KPOP 시스템이 널리 확산된 지금 아이돌 연습생들이 트레이닝받는 모습에 왠지 모를 익숙함 또는 동병상련 내지 향수를 느끼는 걸 보면 통대생의 삶은 아이돌 연습생의 삶과 결이 비슷한가 보다. 입시부터가 워낙 고행길이고 합격의 기약이 없기 때문에 일단 여기까지 온 사람들은 간절함도 크고 의지도 확고한 사람들이었다. 통대 생활은 수험 생활 보다 더 녹록지 않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스파르타 교관이자 마음의 의지처가 되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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