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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채원 Apr 21. 2023

5. 통대 입시의 벽을 넘다 1/2


진로를 결정했다고 이후가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4학년 2학기에 시험 삼아 본 통대 입시는 처참했다. 통대는 통번역대학원의 줄임말이다. 당시 열 몇 명을 선발하는 시험에 400-500명 정도가 지원했던 듯 한데, 성적순으로 세웠다면 뒤에서부터 찾는 게 빨랐을 것 같다. 집에는 ‘진짜 입시는 내년에 볼 거니까 올해는 느낌만 보려고~’ 이런 한가한 소리를 했다. 자만이 극에 달해 있었다. 


당시 나는 아직 일본에 거주하고 있었다. 시험이 있는 주말만 딱 한국에 다녀올 생각으로 금요일에 서울 도착, 토요일에 시험을 보고, 일요일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선글라스까지 착 끼고 공항에 도착했던 그 날을 돌이켜보면 수험을 빙자한 '연예인 코스프레'가 딱 맞는 말이었다.    

  

2000년대 초 통대 입시 구성은 총 3차로 진행되었다. 1차는 영어 시험과 전공어 서술, 2차는 한국어, 전공어 번역, 한국어/전공어 에세이(논술), 3차는 구술 시험이었다. 


1차 전공어 서술부터 큰 벽이었다. 약 2-3분 되는 지문을 듣고 기억해서 질문에 답하는 방식이었다. 일본어 지문에는 한국어, 한국어 지문에는 일본어로 답해야 했다. 객관식도 단답형도 아니고 긴 서술식으로 쓴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지문에서 언급한 금리 상승의 배경 세 가지와 그 이유를 쓰시오’ 같이, 들은 내용을 이해하고 메모(나중에 알고 보니 노트테이킹이었다) 또는 기억하지 못하면 절대로 쓸 수 없는 내용이었다. 어쩐지 지문이 나오기 시작하자 나 빼고 주변 모두가 종이에 뭔가를 열심히 끄적이더라 했다. 첫 문제부터 낙방을 예감했다. 시험에 대한 이해도가 없었던 나는 근거 없는 내 생각을 한 줄씩 겨우 쓰고 낙엽 굴러가듯 쓸쓸히 퇴장했다. 


합격 공지는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시험 답안지로 나눠준 A3 종이 위가 너무나 휑했었으니까. 고사장을 빠져나올 때의 패배감이 아직도 기억 난다. 예상 보다 고난도라는 것도 충격이었고 준비 없이 자만했던 스스로가 한심했다. 10월 말의 날씨에도 얼굴이 후끈했다. 


낙방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떨어질 줄 알았지만 정말 시원하게 떨어졌다. 한국어는 원어민이요, 일본어도 걸음마와 동시에 배웠기에 나는 내가 양쪽 언어를 잘 하는 줄 착각했다. 일본사람이냐는 오해를 받는 일도 흔했다. 큰 키에 구릿빛 피부 때문인지 일본에서는 닛케이브라질인(브라질에서 온 일본 교포)이냐는 질문을 식상할 정도로 받았다. 


말과 글은 자신 있었다. 하지만 통역이 되는 수준까지 언어를 구사한다는 건 다른 세계였다. 심지어 시험에는 언어만 필요한 게 아니었다. 시사 지식이나 이해 분석력, 문제해결능력도 필수였다. '느낌만 본다'고 큰소리 쳤지만 그래도 마음 한 켠에 아예 기대가 없던 것은 아니었나 보다. 우연과 기적과 요행이 자아내는 한 편의 드라마의 주인공을 잠시나마 꿈꿨었다. 한심했다. 각성의 시간은 그렇게 찾아왔다. 수업이 끝나면 컴퓨터실에 가서 정보를 수집했다. 


이듬해 겨울 방학, 다시 서울로 갔다. 이번에는 종로로 달려갔다. 공시생에게 노량진, 고시생에게 신림동이 있다면 일본어 통대 입시생의 메카는 종로였다. 원장님과 두 마디 상담을 했다. “이제 공부 시작이니?” “네” “여기 스파르타식이니까 일단 준비반 가렴” “네” 상담은 대략 이게 끝이었다. 내 딴엔 들을 말은 다 들었으니 더 할 말도 없었다(극 T라고 한다). 바로 등록.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시생으로서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뜨거운 열기로 꽉 찬 학원을 나왔다. 하얀 입김이 나왔다. 2월의 서울은 아직 바람이 많이 차가웠다.      


이후로도 한국과 일본을 왔다 갔다 해야 하긴 했지만 공부의 끈은 놓지 않았고, 일본 생활을 모두 정리한 여름부터는 내 모든 시계를 통대 입시에 맞춰 움직였다. 월화수목금 새벽 5시 반에 기상해 새벽 1시에 취침하는 생활이었다. 종로에서 8시에 영어 수업을 들으려면 6시에 집을 나서야 했다. 당시 집에서 학원까지는 버스와 지하철로 편도 1시간 40분 거리. 러시아워에 휩쓸리는 날에는 2시간. 왕복 3시간 반-4시간은 집중하기에 딱 좋은 시간이었다. 


아침에는 매일 가판대에서 신문 2종류를 사서 읽었고, 좋은 기사를 스크랩해서 번역했다. 기획 기사는 에세이 내용을 구성하는 데 활용했다. 기승전결을 간략하게 정리해서 나만의 에세이를 만들었다. 통번역에 쓸만한 표현이나 관용구를 닥치는대로 수집했다. 세기의 콜렉터 같았다. 그렇다고 단어나 구절만 외우는 것은 아니었다. 기획 기사, 오피니언, 사설, 연설문 같은 텍스트를 통째로 외웠다. 매일 A4 한 페이지에서 한 페이지 반을 암기하고 내 말로 바꿔 말하는 패러프레이징을 했다. 이 공부법은 통대에 들어가서도 계속 유지를 했는데 훗날 통역사로 일하면서 정말 도움이 되었다. 계속 중얼거리고 다녀서 길거리에서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만 감수한다면 강력 추천하는 방법이다. 


8시 영어 수업과 10시 통대 입시 수업을 듣고 나면 12시. 이때부터는 학원 빈 교실에 들어가 자습을 했다. 노트테이킹과 메모리 연습을 위해 스터디도 사이 사이 끼워넣었다. 여름이 지나 입시생이 미어터지면서 자습할 공간이 없어지자 학원에서는 계단 층계참에 책상을 놔주었다. 밤 9시-10시쯤 학원이 문을 닫을 때까지 학원에 있다가 집으로 가는 1호선을 탔다. 


종로의 저녁 시간은 매일이 축제였다. 당시 젊은이들의 3대 약속 장소하면 강남역 뉴욕제과 앞, 신촌 현대백화점 앞, 그리고 종각역 파파이스였다. 학원은 바로 파파이스 뒷 골목에 있었다. 노을이 질 무렵부터 들려오는 흥겨운 거리 음악은 나의 댄스 DNA를 뒤흔들었지만 월화수목금 스스로가 대견할만큼 잘 참아냈다. 하반신은 댄스 스텝을 밟으면서 상반신은 통역 연습을 하면서… 합격하면 꼭 종각역에서 신나게 놀아야지. 다른 핫플레이스도 많지만 왠지 꼭 종각역이어야만 할 것 같았다.      


공부가 너무 안 될 때는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종점을 오가며 공부했다. 버스 안에서는 신기하게 집중이 잘 됐다. 광역버스나 지하철도 도전해봤는데 그보다는 일반 시내버스 뒷자리가 제일 집중이 잘 됐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쌓아가니 두 계절이 훌쩍 지나 시험 당일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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