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전이 준 선물
시험은 작년 그 시험이 맞나 싶을 만큼 쉽게 느껴졌다.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합격 공지를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2주 후에 있을 2차 시험을 준비했다. 매일을 시험 날처럼 준비했기에 오전에 치러진 한국어 능력시험, 번역과 논술은 어려움 없이 끝났다. 점심시간에는 혼자 교정 벤치에 앉아 면접관의 압박 질문에 답하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오후 세 시 반, 면접장으로 들어섰다. 통번역대학원이었다. 오전 시험은 다른 건물에서 치렀기에 통대 건물에 들어서는 순간 여러 감정이 밀려왔다. 감격스러웠달까, 여기까지 온 게 대견했달까. 뭐 그런 기분이었다. 한 발 한 발 걸어 들어갈 때마다 웅장한 BGM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면접관은 총 네 분. 시험 보기 오래전부터 면접관을 친한 동네 문방구 아저씨나 엄마 친구로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기에 떨리지 않았다. 일본어는 언제부터 했느냐, 일본 생활은 어땠느냐, 왜 통역사가 되고 싶으냐, 집이 먼데 학교에 오는 건 힘들지 않겠느냐. 전형적인 면접 질문들이 오고 가다가 드디어 구술시험의 시간이 되었다.
통대 구술시험은 악명이 높았다. 일명 메모리라고 불렸다. A4 한 페이지 정도 되는 텍스트를 읽거나 듣고 기억해서 다른 언어로 처음부터 끝까지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네 명의 면접관 교수님들 앞에서 시선을 교환하면서…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뇌의 90%는 쓸 것 같은데, 다른 언어로 통역해서 말해야 하고, 심지어 청중(?)이 면접관이라는 압박도 견뎌야 한다. 중간에 삐끗하면 다시 궤도를 찾을 때까지 1초 1초가 영겁의 시간이 된다. 이때 심리적 부담으로 무너지지 않는 게 이 시험의 관건이었다. 사실 통역사가 되고 나서는 더 많은 양을 기억하고 통역해야 한다. 4백 명, 4천 명, 4만 명 앞에서도 흔들려서는 안 된다. 메모리는 통역사의 기본 소양을 평가하기에 좋은 방법이 맞았다.
내 앞에는 뒤집힌 텍스트가 네 개. 면접관 교수님은 4번 텍스트를 읽어보라고 하셨다. 제한 시간 1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시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갔다.
“자 이제 그만. 메모리 해보세요”
혼돈의 카오스라는 농담이 딱 어울리는 순간이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어? 첫 문장이 뭐였더라?'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팟, 주변이 캄캄해졌다. 정전이었다. 아직 오후 시간이긴 했지만 11월의 해는 짧았다. 교실 안은 어슴푸레했다. 웅성웅성, 면접관 교수님들의 ‘정전인가 보네’, ‘누구 부를까요’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찰나지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생겼다.
신이 도왔는지 갑자기 첫 문장이 튀어나오자 나머지 부분은 알감자처럼 둘둘둘 끌려 나왔다. 이때의 느낌을 후일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한 장면에서도 느낄 수 있었는데, 치히로가 약탕에서 강의 신에게 박힌 가시를 뽑아내자 온갖 것들이 한 번에 쑤욱 터져 나오는 것과 흡사한 느낌이었다.
메모리가 술술 잘 이어졌다. 자신감이 붙어서일까, 안심한 걸까. 나머지 추가 질문에 대한 답도 자신 있게 나왔다. 어두워진 덕분에 긴장한 표정도 감춰졌을 것 같다. 성적 장학생으로 합격이 되었다. 내가 통역사가 될 수 있었던 데는 한국전력공사 지분도 약간은 있지 않을까 가끔 생각해 본다.
합격 소식을 듣고 나서는 한동안 종각역으로 출근 도장을 찍었다. 종각역 베니건스도 가고 이자까야도 갔다. 한동안은 종각역의 지박령처럼 친구들과의 모든 약속을 종각역으로 잡았다. 종각역의 밤은 역시 아름다웠다. 입학 전까지는 활자를 멀리하고 놀기만 했다. 3월 개강 때는 후회도 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이때만큼 마음 편했던 때가 또 있었을까 싶다. 통역사가 되기 위한 108 관문 중 이제 하나 겨우 통과한 것이었는데 그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다. 이때만 해도 가혹한 통대 생활이 기다리고 있는 줄을 꿈에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