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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채원 May 11. 2023

9. 천육백 명에 국제회의통역사는 저 하나입니다1/3

인하우스 통역사의 장밋빛 착각, 실제 업무 현장, 그리고 얻은 점

2학년에 올라가서는 주말도 학교에서 보냈다. 악명 높은 통대 졸업 시험 대비를 위해서였다. 전문대학원이기 때문에 학위 취득은 논문 심사가 아니라 졸업 시험 방식이었다. 당시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은 졸업 시험을 볼 수 있는 기회를 4번 줬다. 졸업시험은 학기말에 치러지기 때문에 2학년 말 포함 총 2년의 유예 기간을 얻을 수 있다. 기회가 많다는 것은 한 번에 붙기 어렵다는 의미였다. 졸업 시험 대비는 통역 연습이었다. 

 

스터디로 북적이는 토요일, 의외로 놀랍도록 고요한 일요일을 반복해서 학교에서 보냈다. 여름 방학 때 통역 부스에 에어컨을 달아주는 공사가 진행된 때를 제외하고는 매주 주말을 부스에서 보냈던 것 같다. 이때 새집증후군으로 콧물이 흘렀지만 개의치 않았다. 


졸업시험은 불안감의 크기에 비해 의외로 쉬웠다. 수업 시간에 발통역을 자주 시전했기에 통역이 적성에 안 맞는 것 아닌가를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많았는데 막상 졸업시험장에서는 평온하기만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실전에 강한 체질이었다. 


졸업 후 나의 첫 번째 선택은 인하우스 통역사였다. 통역사의 업무 방식은 크게 프리랜서와 인하우스로 나뉜다. 인하우스 통역사는 상근 통역사라고도 한다. 프리랜서는 의뢰인 입장에서 봤을 때 외주로 통역을 의뢰하는 방식, 인하우스는 사내에 통역사를 고용해 업무를 맡기는 방식이다. 


나의 최종 종착지는 프리랜서 통역사였다. 하지만 통역은 대부분 어떤 조직의 의뢰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일 텐데 앞으로 프리랜서로 일을 하는 데 있어서 회사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알아야 할 것 같았다. 졸업 후 첫 진로를 인하우스 통역사로 정한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당시 통대에서 나는 막내였다. 동기들은 전원 나보다 몇 살 많았고 열 살 많은 언니도 있었다. 동기들 대부분이 여러 해 동안 직장 생활을 한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통역 상황을 파악하거나 통역 자료를 이해하는 데 능숙했다. 나도 식당 서빙도 개인 교습과 주방 알바, 주유소 알바, 해보고 장어 공장 컨베이어 벨트 알바도 해봤기에 아르바이트는 베테랑이었지만 회사 근무 경험이 전무했고 언니들을 보며 소위 회사 짬밥의 대단함을 느꼈다.   


처음으로 시험을 본 곳은 당시 외교통상부, 지금의 외교부였다. 2006년 1월, 졸업도 전에 공고가 떴다. 필기시험과 구술시험을 합격하고 최종 면접까지 갔지만 문을 닫고 나오면서 이미 느꼈다. 떨어졌을 거라는 것을. (불합격의 느낌은 촉이 좋은 듯). 서류부터 최종 면접까지 한 달 여의 시간이 흘러 있었다. 불합격 발표가 난 그날, 다행인지 삼성전자에 원서를 내보면 어떻겠냐는 선배의 연락을 받았다. 외교부는 거의 한 달을 준비했는데 삼성은 서류 준비에 하루 반밖에 없었다. 면접은 당장 3일 후. 시간이 촉박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삼성 취업 50문 50 답’이라는 족보가 떠돌고 있었다. 얼른 다운로드를 받아서 요소요소 내 말로 바꾸어 연습을 했다. 엄마가 설거지하고 계시면 뒤에 대고, ‘네! 제가 지원하게 된 동기는’, 아빠가 낚싯대를 닦고 있으면 쓱 옆에 가서 ‘️네!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질문은’ 이렇게 시뮬레이션을 해댔다. 통대 내내 쉐도잉과 동시통역 연습을 하며 중얼대는 딸의 모습에 익숙했던 가족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정작 면접에서는 내가 준비한 질문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저희가 용어는 다 영어라 영어도 잘하셔야 하는데 영어는 어디까지 하세요! 자신 있으신가요?” 라든가, “저희 시그니처 컬러가 파랑이잖아요? 혹시 나는 파랑이 될 수 없는데 파랑이 되라고 한다면 될 수 있나요?” 이런 류의 질문을 받았다. 파랑이 될 수 있냐는 질문은 특이해서 내 답변까지 기억에 남는다.      


‘전 아르바이트는 많이 해봤는데 직장은 다닌 적이 없어서 사회생활 경험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를 색으로 표현한다면 투명이라고 생각해요. 아무런 색도 물들어있지 않아요. 파랑이든 빨강이든 새로운 색을 입히기에 회사 입장에서는 최적 아닐까요?’      


기억 미화로 인해 보정된 부분이 있겠지만 아무튼 대략 저렇게 말했던 것 같다. 앙큼한 답변 같아 보이지만 솔직한 심정은 ‘붙여만 줘라 그런 게 뭐 대수냐’였다. 훗날 면접에 들어오신 수석님께 “저 왜 뽑으셨어요?” 하고 물어보니 “좋은 말로 하면 여유 있고, 나쁜 말로 하면 기 세 보여서”라고 하셨다. "잘 버틸 것 같아서"라고 하셨다. 네? 


합격 소식은 졸업식을 열흘쯤 앞두고 날아왔다. 아빠가 정말 기뻐하셨던 기억이 난다동네 친구분들을 불러 모아서 고기를 거하게 사셨다합격은 내가 했는데 왜 아빠는 남한테 고기를 사는 거냐 물어보니 엄마가 자랑하고 싶어서 저러시는 거라며 웃었다아빠는 바로 이듬해 췌장암 말기로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이때 좋아하던 모습이 가끔씩 떠올랐다그나마 자립하는 모습을 보여 드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식 입사는 3월 2일로 결정이 되었지만 출근은 당장 이틀 후부터였다. 인수인계도 받고 OJT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남양주에서 수원은 멀었다(앞에서 집이 멀었다는 이야기를 몇 번이나 해서 그래서 도대체 어디 사는지 궁금해하실 분들도 있을 것 같은데 남양주였다). 원룸을 계약했다. 인생 첫 회사 생활과 생애 두 번째 자취가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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