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통번역파트가 따로 있거나 부서장이 업무분장을 하는 조직도 있지만 당시 우리 회사는 각 부서에서 나에게 직접 통번역 업무를 의뢰하는 시스템이었다. 직속상관인 차장님은 다른 층에 계셔서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기도 했고, 통번역은 내 관할이라고 자율성을 보장해주셨다.
많은 사람이 필요로 해준다는 것은 능력과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는 의미 같아서 감사한 일이지만 확실히 업무량이 많기는 했다. 당시는 통번역 업무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지금보다 더 부족했고, 조직 내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통역은 버튼만 누르면 나오는 거라는 인식이 있었다.
반년이 채 안 돼 과부하가 와버렸다. 통역이 너무 좋아서 시작했는데 하루 종일 밥도 제대로 못 먹고 통역에 치여 사니 번아웃이 올 것 같았다. 특히 매월 3주차가 되면 마음이 무거웠다. 금요일에 CTO전략실 월례회의가 바로 3시간이나 계속되는 바로 그 회의였기 때문이다. 어느샌가 천재지변을 기도하고 있었다. 그렇게 통역사가 되고 싶었는데 통역에서 도망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스트레스가 많았던 날은 집에 가서 혼자 소맥을 마셨다. 점점 주량이 늘어갔다.
대책이 필요했다. 과도하게 일이 몰리는 통번역 의뢰 체계와 통역 방식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통번역 전문직을 뽑아놓고 통번역 아닌 잡무가 본업을 방해하는 것도 바꿔야 했다. 대기업이라 업무 체계나 분업 체계가 잘 잡혀 있었지만 통번역 영역은 아직 시작 단계였다. 내 전임자가 이 조직의 첫 통역사였다.
통번역 업무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면 그건 내 몫이 맞았다. 내가 주체인데 내가 가만히 있으면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을 곳이었다. 긴 싸움이 될 것 같았다. 그래도 가장 큰 수혜자는 어차피 나, 그리고 내 후임이 될 후배들과 이 업계가 될 거라 믿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한 명 더 뽑아달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만큼은 통과될 리 만무했다.
돈이 들지 않으면서 너무 파격적이지도 극단적이지도 않아야 했다. 제일 쉬운 길을 두고 돌아가야 했지만... 일단 시작이 반이라 했다.
1. 통번역 업무 체계를 만든다.
2. 통번역이 아닌 업무를 없앤다.
목표는 크게 두 가지였다.
우선 직속상관인 차장님께 면담을 신청했다.
이런 저런 사정을 말씀 드리니 의아하단 표정을 하셨다.
"몇 달 해보니까 혼자서 하기에 일이 많습니다."
"전임자는 그런 말 없었는데?"
"그래서 나간 거 아닐까요?"
"얼마나 일이 많길래? 업무일지라도 써봐."
라고 하셨다.
그때부터 3주간, 기본적인 통번역 의뢰는 물론, 메신저로 오는 번역 의뢰 한 토막, 지나가다 참새 방앗간으로 들리는 일본어 관심자들의 ‘함상~’ 질문도 한 토막 빼지 않고 깨알같이 썼다.
1) 통역
의뢰한 사람은 누구이며, 언제 있을 회의를 어느 시점에 의뢰했는지
(함상 잠깐 10분 후에 상무님 방에서 미팅 통역 괜찮아요? 이런 것도 많았기에)
통역의 참석자 명단도 꼼꼼하게 썼고, 어떤 내용의 회의인지도 썼다.
* 회의 내용을 간략하게 적은 것은 나중에 통역 의뢰를 수락할지 권한이 내게 주어지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내용에 따라서 통역 지원을 요하는 중요도가 낮은 것은 "이 정도는 여러분께서 통역 없이 소통해주세요"로 쳐낼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근거가 되었기 대문이다.
2) 번역
마찬가지로 의뢰한 사람은 누구고, 내부 문건인지 그저 참조용 자료인지 여부, 몇 페이지이며, 난이도는 어떤지, 제시한 기한을 적었다.
어떤 사람은 번역을 마치 '내가 맡긴 지갑 좀 주쇼'하듯 내놓으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함상, 이거 너무 급해서 그런데 짧고 금방 할 수 있을 거라서 오늘 중으로 부탁할게요"
퇴근 10분 전에 메신저로 던지고는 본인은 퇴근하는... 당연히 깨알같이 소통 내용을 적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떤 번역은 내부 문건도 아니고 단순 개인 참조용으로 논문이나 잡지에 공개된 기술 동향을 번역해달라는 것도 있어서 중요도도 낮고 외주로 줘도 무방한 것들도 있었다. 그런 문서들은 센터 요율로 책정해서 회사가 절약한 비용도 적어서 냈다.
메일 한 줄, 일본어 이거 뭐예요, 그러면서 대꾸해준 시간까지 아주 깔끔하게 분단위로 적어서 낸 것은 덤.
3) 통번역 외 업무
이른바 내 입장에서 잡무라 할 수 있는 통번역 외 업무는 구차해보일 정도로 상세하게 썼다.
그 시간에 번역을 했다면 몇 페이지를 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아꼈을 비용도 센터 기준으로 책정을 해서 함께 적었다.
4) 심지어 업무일지를 쓰는 데 할애한 시간 30분까지 포함해서 일지를 매일 17시에 메일을 보냈다.
미국 회사도 아니고 대한민국의, 심지어 세대차이 많이 나는 아저씨들이 가득한 보수적인 기업에서
이렇게 일일이 내 존재 가치와 이유를 금전으로 환산해서 설득하는 것은 솔직히 품위가 없어 보일 수도 있고 어쩌면 구차해보이기도 하고 정서에도 안 맞았을 수 있지만
회사란 자고로 영리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이니 어떤 업무든 돈으로 환산해서 보여주는 것이 제일 잘 먹힐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나는 체면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업무 환경을 통번역하기 쉽게 바꾸는 게 더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파브르 곤충기도 울고 갈 업무일지를 쓰기도 3주쯤 지난 어느 날
업무일지 송부 버튼을 누르고 몇 분 후, 전화벨이 울렸다. 차장님이었다.
“일이 많네~ 그냥 니 맘대로 해. 바쁜데 일지도 이제 그만 써~”
먹혔다! 차장님은 진짜 네가 이렇게 일이 많은지 몰랐다고 했다.
이것을 계기로 내 사기도 조금은 충전되었다. 꽉 막힌 곳인 줄 알았는데 아니구나, 오픈마인드와 유연성을 갖추고 있구나... 말투는 투박하지만, 아무리 부하직원이라도 근거를 대고 건의하면 조율해주는 합리적인 조직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알아서 하라는 말도 감사했다. 전적으로 신뢰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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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개혁을 시도한 것은 번역 업무 체계였다.
우선 업무 프로세스를 가시화했다. 여러 부서에서 산발적으로 오는 의뢰를 엑셀로 취합해서 의뢰처, 담당자, 예상 소요시간, 예상 납기를 기재해 유관부서 전체에 공유를 했다.
당연히 번역 납기 예상일은 번역을 하는 당사자인 내가 정했다. 내 업무 비중은 통역이 80%, 번역이 20% 정도였는데, 통역은 주로 임원 회의나 외부 행사였다. 회사 생태계상 상부 일정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암묵적 룰. 통역 일정이 늘거나 변경되면 번역 납기는 후순위로 미뤄질 수 밖에 없었다.
목록에 이미 번역을 기다리는 사람이 당신만이 아님이 투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미안해할 것도 길게 사정을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네 2주 걸립니다" "네 다음 주 목요일까지 가능합니다. 중간에 회의 추가되면 더 늦어질 거고요"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근거자료가 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연착륙한 건 아니었다. 한 번에 수긍한 사람이 의외로 없었을 정도. 그 설득과 회유도 종류가 다양했다.
'왜? 함상 많이 바빠? 우리 먼저 그냥 해줘~' 같은 그냥 찔러보기는 순수한 편.
'함상, 제가 진짜 이번만 도와주시면 은인으로 모실게요, 맛있는 식사 대접할게요' 같은, 상대방은 그게 당근인 줄 알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전혀 의미 없는 말도 있었다.
'저도 저희 부장님한테 혼나는데...'같은 귀여운 징징거림도 있었고
'이거 차장님께 상의를 드려봐야겠네=너의 상사에게 이른다' 같은 유치한 협박도 있었다.
허나 타격감이 없을 수밖에 없는 게 이미 업무 일지 사건으로 인해 통번역 업무 전권은 나에게 위임이 되어 있던 상황.
아닌 게 아니라 때로는 바쁜 데 차장님이 더 거드는 때가 있어서 얄미웠던 적도 있었다.
"그렇게 바빠? OO부서 먼저 해주지. 진짜 너무 급하다고 우는 소리하는데... 그건 좀 해주자"하고 슬며시 본인 친분 있는 사람들의 일을 새치기로 들이 밀었었는데...
이제는 얄짤 없이 본인 선에서 잘라내고 나에게 협조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
나는 "이게 절차다!"란 기조로 일관하면 될 뿐이었다.
돌아보면 거절하고 설득하는 일도 에너지가 소모가 되는 일인데 돌아보면 이 과정이 소통(거절) 스킬 향상과 효율화에 많이 도움을 주었던 것 같다.
"부회장님실/CTO실과 일정 조율하시죠" 이 한 마디에 '아 괜찮습니다, 기다릴게요'하며 일동 태세를 급선회하는 모습은 귀엽기까지 했다.
"급하신 거 너무 알죠, 통번역사 한 사람만 더 뽑아도 빨리 받으실 수 있을텐데... 인사에 건의해보실래요?"
"그렇게 급하시면 외주 주시겠어요? 저희 대학원에 통번역센터 연결해드릴게요"
목록에 기재된 담당 부서 간 일정을 조율하도록 했고
통번역 리소스가 부족하다는 점을 공론화했고
그래도 급해, 빨리를 부르짖는 사람은 외주를 주도록 제안했다.
- 급하다고 한 사람들 열에 아홉은 시간 여유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어서
급하다, 빨리라는 말은 의뢰인의 들숨날숨 같은 것이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말 급한 사람은 이미 문서를 작성하는 시점에 진작에 의뢰를 한다는 것.
특히 외주처를 소개한 것은 당장 그 시점보다 시간이 지날수록 통번역사의 가치 향상에 좋은 효과를 가져왔다.
센터의 요율표를 보고 번역비가 이렇게 비싼지 몰랐다는 것. 기간도 충분히 줘야 하고 수정하고 싶어도 돈이 든다는 것. '급해 빨리 내일까지 내놔'를 당당히 요청해 온 ppt 100장이 사실은 누군가의 한 달 월급과 맞먹으며, 심지어 내일까지는 해줄 사람도 없고, 설령 누가 빠르게 해준다 하더라도 급행료가 붙어서 2배쯤 비싸지고, 신기술이라 난해하여 난이도 가산금이 붙으면 생각지도 못 한 단위로 금액이 나갈 수 있다는 것.
견적서를 받아보고 이런 것들을 인지하게 된 사람이 알아서 소문을 내줬기 때문이다.
"함상이 알고 보면 진짜 비싼 분이었어. 일을 막 부탁하면 안 될 것 같아"
(뒷북이지만 대단히 고마운)
반년 정도가 걸려 가시화, 유관부서 간 조율 유도, 인력 충원 제안, 외주 제안 크게 이 네 가지를 통해 번역 업무환경은 대대적으로 개선되어 갔다.
맡기지도 않은 내 보따리를 먼저 내놓으라 아우성대던 사람들이 한 둘 씩 변해갔다.
조금씩 불만이 줄었고, 차분히 기다리기 시작했다. 자판기처럼 소모적으로 번역사를 이용하는 일이 줄고 자체적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은 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2000년대 중반이라 기계 번역은 상용화된 것이 거의 없었고, 있다 하더라도 정확도가 대단히 낮아 신뢰할 수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자)
어느 시점부터는 오히려 번역을 해준다는 것은 본인들이 당당하게 누릴 권리가 아니라, 업무에 적극 협조해주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주기 시작했다. 드디어 번역 업무 체계가 닦였다.
진입로는 매우 좁았고, 혼자서 한 삽 한 삽 뜨는 것만 같아 어제와 오늘의 차이를 느끼기 어려울 때도 많았지만, 때로는 돌부리도 암석도 웅덩이도 가득했다. 시간이 지나면서는 혼자가 아니었다. 가속도도 붙었다. 뒤돌아보니 어느새 넓고 평평한, 그저 달리기만 하면 되는 고속도로가 뚫렸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지치지 않은 나에게, 그리고 협조해준 동료들에게 감사한 마음이었다.
또 희망 납기는 고정을 해두고 원문을 늦게 주는 일도 많았는데
그때의 경험으로 지금도 원문을 늦게 주면 납기도 늦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주지를 시키는 것도 잊지 않고 있다. 업무가 그것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당신이 늦게 주는 시간만큼만 지연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예약한 다른 업무로 인해 당신의 의뢰는 세 배, 네 배 더 지연될 수 있다는 것도 잊지 않고 주지시킬 수 있게 되었다.
통역은 겨울 무렵부터 자가 판단 휴식제를 도입하겠다고 선언을 했다. 자가판단 휴식제는 내가 통역하다가 알아서 휴식하는 방식이었다. 제일 좋은 방법은 한 명 더 통역사를 뽑고, 학교에서 제시하는 시스템대로 15분씩 교대를 하는 것이지만 당장은 언감생심이었다. 차선책으로 타협을 했다. 장시간 회의는 내용 부하를 고려해서 요약해서 전달하는 방식으로 하기로 했다.
매일 있는 간부 회의부터 시도해 보았다. 통역을 하다가 집중력이 줄어들 때쯤 ‘지금부터 10분 쉬겠습니다’ 이렇게 질러 버렸다. 처음에는 수석님, 책임님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함상이 이제 회사를 다니기 싫은가 보다"
농담 한 소리씩은 했지만 큰 잡음 없이 수용해주셨다. 일본어를 할 줄 아는 간부에게 도와달라고 하고 바톤 터치를 하기도 했다. 점심은 위장 건강을 위해 따로 먹기로 했다. 석식이 있을 때는 따로 미리 저녁밥을 먹고 가기로 했다.
점차 조금씩 큰 회의에 가서도 시도해봤다. 감사하게도 이미 경험해본 분들이 이번엔 내 대변인으로 나서주시는 게 아닌가. “동시통역이 원래 15분씩 교대를 해야 할 정도로 뇌 과부하가 크다 하네요” 이러면 상무님이 “흠흠, 기계도 오래 돌리면 고장 나는데, 인간인데 쉬어줘야지” 북치고 장구치고 주거니 받거니...하면서 훈훈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더 큰 회의에 가서는 상무님이 부사장님께 ‘동시통역이라는 게~’하며 또 홍보대사를 자처해주셨다. 어느새 외부 회의에 가서는 ‘우리 통역사 쉬어야 하니까, 몇 시까지 하고 쉽시다’까지 확대되었다.
마침 당시에 옆 부서에서 IBM 프로젝트가 한창이었던 것도 좋은 기회가 되었다.
팀에서 프로젝트 회의에 참관을 가기도 했는데 그곳에는 통번역대학원 선배님 두 명이 번갈아 통역을 하고 있었다는 것.
그 프로젝트에 자주 얼굴을 내밀던 책임님 왈....
"통역비가 그렇게 비싸대, 퇴근 시간 넘으면 또 돈이 더 붙는다대? 그래서 17시 땡하면 칼 같이 퇴근시켜야 한대"
"번역은 또 안 한대, 번역은 또 따로 돈을 내야 한대"
"통역사들 피곤해서 쉬어야 한다고 세션 하나 하고 막 15분씩 쉬어"
그 이야기를 들은 부서원들이 한 번씩 다녀와서는 부서 전체에 조금씩 바람을 불어넣는데
내 입장에서는 얼마나 고맙던지.
기회다 싶어서 통번역 의뢰가 몰리거나 혼자서 통역을 오래 해야 할 때는 그 프로젝트 이야기를 활용할 수 있었다.
"보셨죠~ 제가 일한 만큼 받았으면 여기에 빌딩을 샀을 겁니다"
"심지어 저 쪽은 두 명이 번갈아서 하는데 저는 혼자 하잖아요?
"제가 쉬어야 한다고 하면 젊은데 왜라고 하셨잖아요. 쉬어도 잘 할까 말까 하는 게 통역이에요. 뇌가 돌아가야 할 수 있는 겁니다"
"좋은 통역을 듣고 싶으시면 여러분이 저를 소중히 생각하시고 제가 하자는대로 하셔야 해요"
이렇게 나는 점점 부서원들에게 통번역 업무가 얼마나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지 삼성전자식(?) 비유로 인식 변화를 도모해가는데...
"벽에 점 하나 찍고 두 시간 세 시간 그것만 보는 거 할 수 있어요?"
"노래방에 가서 혼자 세시간씩 노래할 수 있어요? 가사도 보면 안 되고 절대로 틀리면 안 돼요. 하실 수 있나요?"
"근데 왜 통역은 혼자 두 시간 세 시간씩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계란으로 바위치기일 수 있지만 계란이 단단해지면 바위도 흔들리는 걸까.
한 명 두 명 나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
차장님이 부장님으로 승진한 이듬해에는 통번역 외에 꼭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업무는 빼거나 다른 부서로 이관하기로 했다. 어떤 업무라도 통번역과 겹치면 통번역을 우선시하기로 순서를 정했다.
이 과정도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말은 일지 사건 전부터 꺼냈지만 실현까지 거의 1년이 걸렸으니까.
차장님 면담을 상상하며 잠들기 전에 얼마나 이 대화를 시뮬레이션을 했던지.
"차장님 이미 일지 썼을 때 보셨겠지만 저 업무가 많았잖아요?
"그런데?"
"근데 우리 총괄에 통번역사 한 명이잖아요. 동시통역할 수 있는 사람 저 한 명이요."
"그치"
"학부 어학 전공자를 뽑으셔도 되는데 일부러 통번역 전문자로 석사 졸업생을 뽑으신 거잖아요... 동시통역이나 전문번역 교육 없이 바로 업무 투입할 수 있는 사람으로요"
"그래서?"
"그래서 저한테 통번역 아닌 잡무가 많아지면 회사가 손해인 거 같아요."
벼르고 벼르다 하고 이 말을 다 한 날에는 심장이 터질 것 같기도 했지만
또 몇 번 해보니 나중에는 숨쉬듯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때 설득의 심리학이라는 책을 회사 도서관에서 발견하여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어던 기억이 난다.
잡무가 본업에 미치는 영향과 그로 인한 회사의 손실이 크다는 것,
잡무를 없앰으로써 생기는 손해는 극히 미미하다는 것,
시대 흐름에도 부합하지 않고 한 사람이 하면 될 업무를 나눠서 하는 중복 업무가 많다는 것,
이런 말을 면담 때마다 하기에 이르른다.
시뮬레이션을 너무 많이 한 탓인지
급기야 사고를 치고 마는데...
외국인 고문이 전무급 인사팀장에 면담을 하러 갔을 때
내 입장에서는 임원회의에서 늘 만나는 전무님이라 우리 차장님보다 친근한 느낌이 들어서
"함상은 뭐 힘든 거 없어?"할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저 이야기를 말해버리고 나온 것.
아직 사원 나부랭이가 전무님께
"통번역 업무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시면 좋겠다, 회사에 더 이득될 것 같다" 이런 말을 질렀다니..
인사팀과 우리 차장님이 한 번 뒷목을 부여잡긴 했지만
아무튼 그래서 통번역 외 업무는 모두 제외시키는 데 성공을 했다.
소소한 행정 업무나 지원 업무도 모두 없앴다. 예를 들면 언어가 안 통한다며 가끔 외국인 고문님의 비행기 티켓이나 어학 수업 예약을 대신 해드리거나, 골프 비용 처리도 의뢰하고 보일러가 잘 나오는지, 청소는 잘 됐는지 등 주택 관리 같은 부분도 연락을 대신 해드려야 했는데, 이 부분은 통번역과 무관하고 시간만 소통하면 되는 문제라 총무팀에서 맡아서 하기로 업무를 이관했다. 인사팀도 적극적으로 서포트해주었다.
출장 전 해외 거래처 선물을 위해 리움미술관에 가서 도자기 픽업하기, 문화재 반출 수속 같은 선물 준비 같은 업무도 모두 없어졌다.
타 부서로부터 통역, 번역, 감수 요청이 늘어나면서 업무 시간 중 많은 시간을 외부로 차출되어 자리를 비워야 했던 것도 설득에 도움이 되었다.
"통역 들어올 때 상무님 커피도 한 잔 타오고"라는 말도 이제는 아무도 하지 않았다.
(입사하고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정말 놀랐다. "저 커피 안 마시는데요?" "책임님이 드시는 김에 하나 더 타가시면 어떨까요" "통역 준비하느라 안 됩니다" 등등으로 처음부터 철벽을 치기는 했지만)
회사 차원에서 통번역의 전문성을 인정하고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다니 감사했다.
이제 더 이상 몸이 하나뿐이라 미안해 할 필요도, 일은 일대로 하고 아쉬운 소리를 들을 필요도 없어졌다. 서로 존중하고 조율하면서 쾌적하게 업무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무조건 혼자 해결하려 하지 말고 문제를 가시화하고 공론화해서 소통하고 조율하면 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의견과 대안을 제시하고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하면 된다는 소통의 방법을 배웠다.
얻은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회사는 사회생활 경험이 전무한 새내기 통역사에게 돈 주고도 갈 수 없는 소중한 배움의 장이었다. 회사 대 회사 간의 대규모 회의부터 현업 실무진의 소규모 회의, 출장과 석식까지 모두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조직에서 있을 법한 여러 회의의 형태와 의사소통 체계를 경험할 수 있었다.
프리랜서였다면 경력 1-2년차에 경험하기 어려운 탑 교류회 통역도 해볼 수 있었다. 타 기업과 회사 대 회사 기술교류회가 많아서 굵직한 일본 기업의 회장단도 만나볼 수 있었다. 회로, 기구, 소프트웨어 같은 기본 요소부터 로봇, 반도체, 디스플레이, 모바일, 가전, 각종 분야의 원천기술도 배울 수 있었다. 이후 프리랜서로 나와서 통역할 때 기술 기계를 포함해 모든 공학적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 큰 기반이 되었다.
다양한 신기술도 접할 수 있었다. 지금은 흔하게 보는 플렉서블 디스플레이 기술도 상용화되기 한참 전인 이미 2006년에 회사에서 다룰 만큼 신기술의 최전선을 엿볼 수 있었다. 번역은 ppt 100페이지쯤 하루만에 할 수 있는 근육이 붙었다. 충분한 훈련을, 심지어 분야 전문가들의 피드백을 받으면서 할 수 있던 귀한 시간이었다.
2년 반 조금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삼성전자에서의 생활은 이후 어떤 상황에서도 큰 그림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시야를 넓혀 주었다. 통대 동기 언니들을 보며 부러워했던 회사 짬밥이 내게도 차곡차곡 쌓여 갔다.
그로부터 시간이 한참 흘러도 삼성전자와 연이 닿는 일이 생길 때마다 과거의 추억은 늘 새롭게 피어오른다. 삼성 파운드리 포럼 일본 행사 사회자로 무대에 설 때는 신기하게도 한색의 대명사인 파란색으로 가득한 행사장에서 따뜻함과 아늑함을 느꼈다. 무대 위에서 나만의 방식으로 인사를 했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사회를 맡은 삼성전자 출신, 한일국제회의통역사 함채원입니다.”
삼성전자 출신, 짧은 한 마디지만 짧지 않은 나의 첫 사회생활 좌충우돌 역사가 담겨 있다. 사회인으로서 자립할 수 있도록 내 기반을 든든하게 다져준 회사와 동료들에게 지금도 고마운 마음이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