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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채원 May 11. 2023

9. 천육백명에 국제회의통역사는 저 하나입니다 2/3

처음으로 인사한 부서원들의 모습은 상상과 조금 달랐다. 상상 속 직장인은 딱 떨어지는 칼정장에 넥타이, 반짝 반짝 윤나는 구두, 칼다림질한 셔츠, 커피를 한 손에 들고 핸드폰을 귀와 어깨 사이에 끼고, 메모하는 모습, 일에 심취해 있을 때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집중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러나 부서원들의 첫인상은 ‘체크무늬가 이렇게 다양했나’였다.     


내가 간 곳은 삼성전자 기술총괄. 사업부에 새로운 기술을 전파하기 위한 컨트롤 타워였다. 연구직들이 대거 포진해있었고, 내가 간 부서는 나 빼고 모두가 엔지니어였다. 공대 캠퍼스를 그대로 옮겨온 듯한 사무실 풍경이 문과 출신자에게는 너무나 신선했다. 임원 보고가 많은 수석님만 양복에 넥타이를 하고 있었을 뿐 모두 체크무니 셔츠에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입사 첫 주는 실수 연발이었다. 통역만 할 줄 알았지, 메일 쓰는 법부터 엉망이었고 문서 전송 오류, 결재 실수 등등 입사 후 한동안 인트라넷에 적응 못 하고 버벅였다. 이런 나를 옆자리 앞자리 뒷자리의 체크무늬와 면바지 부서원 전체가 나서서 제 일처럼 도와줬다. 뿐만 아니라 매번 생소한 공학과 기술 개념에 어리둥절한 나를 앉혀놓고 친절하게 1:1 과외를 해주었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고 하는데, 공대식으로 1과 0을 놓고 이진법인 줄도 몰랐던 내게 그들은 마더 테레사요, 미카엘 천사와 미륵불의 현신이었다. 


훗날 동료들은 이때를 회고하며 “우리가 함상 사람 만들었지”하며 뿌듯해했다. 어떤 동료는 자기가 나를 업어키웠다고 했다. 함상은 회사에서 내 호칭이었다. 동료들과의 회사 생활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서일까, 퇴사한 지 15년이 된 지금도 엔지니어들과 일을 하면 고향에 온 듯한 익숙함과 편안함을 느낀다.      


회사에서 하는 통역은 학교와 너무나 달랐다. 새로움의 연속이었다. 우선 말투도 사용하는 어역(단어, 표현)도 상상과 괴리가 컸다. 통대에서는 보통 연설문으로 수업하고 스터디를 해서 "존경하는 내외 귀빈 여러분"으로 말을 시작하는 게 익숙했는데, 회사에서는 아무도 그런 말투를 쓰지 않았다. 


물론 일본 회사와의 기술교류회 때는 부회장님 인사말씀, CTO 인사말씀 이런 건 있었지만, 통대생이 하루 평균 열 번도 넘게 듣는 ‘인사에 갈음한다’거나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는 말을 써본 것은 퇴사할 때까지 손에 꼽았다. 이 세계는 격식 있는 수사어 같은 건 찾아보기 어려웠다. 숫자와 각종 기술 용어와 팩트만이 난무하는 곳이었다. 주어 챙기고 목적어 챙기고 서술어 챙기는 건 나와 사내 아나운서밖에 없었다. 심지어 첫 주에는 칭찬 같은 칭찬 아닌 말을 들었다.      


“함상만 고상하게 어디 시상식장 온 것 같아요”      


그랬다. 통대에서 배운 연설문의 정형화된 문구와 수사법이 필요 없는 곳이었다. 정부 기관이나 다른 조직은 모르겠지만 우리 부서는 아니었다. 


그럼 어떻게들 이야기하느냐? 일단 말투가 투박한데 은유법을 꽤나 좋아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한 임원의 말은 “우리는 지금 총알받이 돼가지고 피흘리며 싸우고 있는데 말이야, 당신들은 총이나 들어본 적 있어요? 여긴 최전방인데 후방이 뭘 아냔 말야”였다. 그날은 회의 전체가 군대 은유였다. 이걸 병역의 의무도 없는 60대 일본인 고문님들에게 통역하라니. 


유머도 특이했다. 갑자기 어느 임원이 “이게 10의 n승만큼 어렵다니까”라고 하는데 모두가 박장대소를 하는 거다. 통역하는 나만 제외하고 말이다. 어느 지점이 웃긴 거지? 그 웃음이 더 난해했다. 농담에 그래프 나와, 수치 나와, 공식 나와, 부품 나와... 통역할 때마다 오늘은 어떤 은유가 나올까 기대하는 재미도 있었다. 입사 5개월쯤 됐을까나도 서서히 조직 문화에 물들어가니 사내 어법이 어느새 통역에도 스며들었다. “杓子” 한국어로 하면 누구나가어중이떠중이 다라는 뜻인데 나도 모르게 그걸 개나 소나 다 하면 뭐가 의미 있겠어요” 이렇게 통역해버린 거다그 말을 해놓고 당사자인 내가 더 깜짝 놀랐다간부들은 함상도 이제 여기 사람 다 됐네’ 하며 웃었다기뻐해야 하는 건지는 애매했지만 싫진 않았다다만 프리랜서로 전향하고 다시 말투를 돌려놓아야 할 때는 고생을 조금 해야 했지만 말이다     


말투 문제는 양반이었다. 매일 쳐내야 할 통역, 번역 양이 가히 상상 초월이었다. 지금은 삼성이 통대 졸업생들이 많이 취업하는 기업 중 하나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인하우스 통역사로 취직하는 것은 대부분 정부 부처였다. 일반 대기업에 통역사가 있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내가 들어간 조직은 1,600명, 한일 국제회의통역사는 나 하나였다. 정확한 소속은 기술총괄 CTO전략실 개발혁신팀 기획운영파트지만, 책상은 회로인프라그룹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업무 지시는 총괄 여기저기서 날아왔다.      


입사하자마자 일폭탄이 떨어졌다. 근무 시간이 8시간인데 이 중 기본으로 회의 통역이 5-6시간은 됐다. 학교에서는 수업 시간에 나에게 배분되는 시간은 다 합해야 고작 15분도 채 안 됐는데, 회사에서는 1시간, 2시간은 기본, 월례회의 같은 큰 회의는 3시간을 내리 휴식 없이 혼자서 통역해야 했다. 원래 통역은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해 2인 1조가 교대로 하는 것이라 배웠건만. 통번역 업계의 상식은 이곳에서 통용되지 않았다.   

   

오전엔 팀 회의, 파트 회의, 점심엔 부회장님 중식 통역, 오후엔 옆 사업부 통역, 지방 사업부 통역, 외부 인사 초청 세미나, 본사 세미나, 포럼, 국제회의까지 모두 나의 몫이었다. 오전에 시작한 회의는 점심시간까지 이어질 때도 많았고, 그대로 식당까지 이동해 밥을 먹으며 통역을 했다. 식사자리에서 통역하는 일명 밥통이었다. “함상 밥 먹어야 하니까, 이제 우리 말하지 맙시다”고 하면 나는 그 말을 또 통역했다. 침묵은 10초도 못 갔다. 이제 막 한 술 뜨려하면 ‘통역이 진짜 힘든 일 같아요’, ‘그러니까요, 함상 너무 힘들 거 같아요’ 이렇게 또 한마디씩 통역 일을 만들어냈다. 웬수들이 따로 없었다. 심지어 이 회사 사람들은 빨리 먹기 선수였다. 다들 빈 식판을 앞에 두고 묵언 수행을 하는 모습을 보니 숟가락을 저절로 놓게 되었다.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석식 통역도 있었다. 그 당시 임원 석식은 단순히 저녁 회식이 아니라 주요 안건 협의가 이루어지는 회의 자리였다. 석식이 야식이 되는 시간까지도 이어지기 일쑤였다. 밤 12시 퇴근도 흔했다. 지방과 일본 출장 통역까지 있었다. 나는 회사라는 생태계 서열 최하위의 말단 사원이었다. 임원을 모시고 출장이라도 가는 날에는 초비상이었다. 임원 의전해야 해, 해외 거래처에 드릴 선물도 챙겨, 부장님은 상무님 챙기라 해, 상무님은 부사장님 챙기라 해, 당시 미혼인데도 왠지 층층시하 시부모님을 모시는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번역도 사정은 비슷했다. 통역 사이사이에는 다음 회의, 내일 회의, 모레 회의에서 쓸 번역거리들이 폭우처럼 메일함에 쏟아져내려왔다. 번역도 학교 과제 때는 1.5페이지를 한땀 한땀 한 주 동안 다루었는데, 회사에서는 하루에 ppt 60페이지도 당장 뱉어내야 했다. 현실은 가차 없었다. 사내 메신저는 언제나 불이 났다. “함상, 이거 일본어로 뭐예요?” “함상, 혹시 이거 한 줄만 빨리 번역해줄 수 있어요?” “함상, 일본 분한테 메일이 왔는데 일본어를 전혀 몰라서... 답장 좀 대신해줄 수 있어요?” “함상, 함상, 함상~” 그 와중에 각종 일본어 감수도 했고, 무슨 패기였는지 점심시간에는 짬을 내서 부서원들에게 일본어 강의도 했다. 일반 사원들이 해야 하는 각종 연수와 일반 업무도 해야 했다. 


함상, 함상, 함상... 듣기만 해도 부아가 치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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