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때 한 통역이 모두 좋은 기억만 있었던 건 아닌데, 가장 끔찍했던 사건을 꼽으라면 역시 1번은 장대비가 내리는 날 일본인 골초 클라이언트와 왕복 4시간 동안 함께 차를 타고 이동했던 일이다. 당시는 아직 흡연에 관대한 시절, 인천공항부터 수원까지 다섯 명이 차에 구겨져서 이동하는데 앞에 앉은 일본인 클라이언트가 계속 담배를 피워댔다. 장마철이라 비는 쉴 새 없이 왔고, 덕분에 창문은 1센티도 채 열지 못했다. 차 안이 담배 연기로 가득했지만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괜찮다고 했다. 바이어여서 참는 것이 뻔했다.
나는 너무 괜찮지 않았지만 당시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지금 같으면 바로 말할 수 있는데. 당장 담배를 끄라거나, 피우고 싶으면 차를 세울 테니 나가서 피우고 오라거나. 흡연자와 비흡연자를 나눠서 비흡연자는 택시를 타고 가거나…. 지금 같으면 벌써 여러 옵션이 떠오르지만 당시는 어떻게 해야 될지 알 수 없어 간접흡연으로 고통만 받았다. 이 골초남과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무개념 클라이언트 두 명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저녁은 호텔에서 고급 코스 요리 먹을 예정이니까 통역료는 그냥 무료로 해주시면 안 돼요?"
첫 번째 진상은 밥 줄 테니 통역은 공짜로! 를 외치는 어느 중소기업의 사장님이었다. 어디 머슴도 아니고 노동에 대한 대가를 밥으로 준다는 게 말이 되는가. 통역사들은 어차피 식사자리에서 통역을 하면 밥을 거의 먹지 못할뿐더러 코스는 식기가 여러 번 오고 가기 때문에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통역에 방해만 될 뿐이라 선호하지 않는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했는데 곧 더 악질을 만난다. 여름에 있었던 여행 박람회 때 통역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명함을 주고받은 분이었다. 우리 학교 교수님들의 이름을 읊으며 친분을 과시했던 B 씨.
"아 OO 선생하고 ▲▲선생 아시죠? 저하고 행사 많이 합니다"
며칠 후 전화를 걸어와서는 본인이 구상하는 프로젝트에서 내년부터 통역을 맡아줬음 한다며 한 번 만나서 이야기를 할 수 있겠냐고 했다. 그런데 약속 장소였던 을지로입구역 뒷골목의 큰 한식당에 가니 50명쯤 되는 일본 사람들이 앉아서 통역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처럼 속아서 온 서너 명의 학생들이 곳곳에 앉아 있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해 달라고 요청한 저에게 B 씨가 한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아 앞으로 일 많이 드릴 테니까 이번만 그냥 해주시는 걸로 하면 어떨까요?"
당장 떠오른 말은 '이런 미친'이었다. 어쩜 이렇게 말간 얼굴을 하고 사기를 칠까. (사기꾼의 특성이다)
이미 머슴밥으로 노동의 대가를 퉁치려 하는 것에 대한 분노가 쌓여있던 상태였기에 나도 끓을 대로 끓어 있었다.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 제가 있을 자리가 아니네요.
�� 아니 앞으로 꾸준히 일 드릴 텐데 이번은 우선 하시는 것도 보고, 이렇게 같이 어쩌고… 내가 OO 선생 하고도 오래 일을 했는데…
�� (안 들림) 네~ 이거 신고감 아니에요? 앞으로 연락하지 마세요.
말은 했어도 너무 화나고 농락당하는 기분에 억울함이 치솟았다. 을지로 입구역부터 종로역까지 씩씩대며 걸어왔다. 눈물이 났다. 사람은 화가 나도 눈물이 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상한 사람은 빠른 손절, 빠른 도피가 상책이라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상처받지 않으면서 한 방 먹일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지금의 나라면 아마 이렇게 말하지 않을지.
�� 네, 1시간까지 70만 원, 6시간까지 90만 원이고요, 오늘은 아마 6시간 구간이 될 것 같고 급행으로 요청하신 거라 30% 추가하면 1,170,000원으로 견적이 나오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아 세금계산서 발행도 가능한데 그러면 10% 부가세 가산되고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진행하시겠어요?
이렇게 물어보면 수용하던지 거절하던지 밖에 선택지가 없어진다. 거절하더라도 또 한 방 먹일 수 있다.
�� 아 진행 안 하실 경우, 오늘 이런 상황은 학교에서 규정상 사전미팅으로 간주할 수가 있어서 제가 여기까지 온 시간에 대한 사전미팅 비용이 발생해서요, 청구서 작성해서 메일로 송부드리겠습니다.
당시는 나도 20대 중반이고 이런 경험이 처음인지라 더 이상의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하지만 요즘이라면 이 상황도 영상 및 녹취 남겨서 추가 피해 방지를 위해 학교 및 협회에 공유 및 안건 상정하고 재발 방지 촉구하겠다 덧붙이거나, 법률대리인 통해 본 상황에 대한 연락드리도록 하겠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후배님들이여, 이 챕터를 달달 외우자.
열정페이라는 말이 한동안 유행어처럼 쓰이기도 했는데 학생들의 순수한 열정을 악용하는 사람들은 어느 업계에나 있는 듯하다. 통대생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 통역 경험을 쌓고 싶어 하는 마음도 그들에게는 좋은 먹잇감이 된다. 지인이 소개를 해준 경우면 다소 부당한 조건이어도 그분의 체면이나 앞으로를 생각해서 꾹 참고 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정당한 대가가 반드시 따라야 한다. 내가 자발적 의지로 봉사하는 것이 아닌 한 노동에 대한 보상은 보장되어야 한다. 불확실한 미래를 약속하며 현재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사기다. 커리어를 쌓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순수한 열정이 악용되어서는 안 될 것이지만 혹여라도 열정페이를 강요당하는 상황에 처한다면 아래 비유를 꼭 떠올려 주면 좋겠다.
만약 자동차 전시장에서 마음에 드는 차가 있다. 앞으로 살 거니까 그냥 타고 나간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강도다. 형사 처벌 대상이다. ktx로 빨리 가고 싶은데 앞으로 많이 탈 거니까 오늘만 돈을 안 내고 탄다? 무임승차다. 비행기는 티켓이 없으면 태워주지도 않는다. 돈을 내고 재화를 구입하는 것이 당연하듯 서비스도 그에 상응하는 금액을 내야 한다.
'통역 능력 제공(=내가 힘들게 일궈온 지적재산권의 제공)에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받는 것이 당연하다', '비용 청구하겠다' 하고 당당하게 전하길 바란다.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이제는 이런 사람들 때문에 화났던 감정도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프리랜서로 일을 하다 보니 그럴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사람에게는 굳이 내 감정을 소모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단지 상대와 나의 이해관계가 합치하지 않은 것뿐이니 정중하게 거절하고 서로 다른 이해 당사자를 찾으면 된다. 소개해준 분의 체면 같은 걸 대신 생각해 주느라 끙끙댈 필요도 없다. 만약 그런 일을 당한 걸 알면 소개해준 분이 더 미안해해야 하는 것 아닐지. 알고도 그런 거라면, 참고하지 그랬냐고 나무란다면 그 사이는 딱 그 정도의 사이인 거다. 후배님들도 절대 마음 다치지 말고 비즈니스 마인드로 가볍게 튕겨 내면 좋을 것 같다.
구구절절 길었지만 이러한 일들이 그리고 프리랜서 초기의 일들도 개인적으로는 다음을 운운하며 열정페이를 강요하는 클라이언트를 멀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순간... 그다음은 더 큰 열정페이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 참고로 "저녁은 호텔에서 고급 코스 요리 먹을 예정이니까 통역료는 그냥 무료로 해주시면 안 돼요?"에 대해서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일도 아닌데 굳이 갈 이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 빠르게 다른 분 찾아보세요"
속으로는 '너나 많이 드세요'라고 생각하면서...
* 친절한 금자 씨가 개봉한 지 얼마 안 되던 시점이었다. 표현이 정말 딱이었다.
* 호텔 코스 먹자고 통역을 공짜로 해줄 사람이 있을 까? 결국 통역비를 다 받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