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자동으로 생기는 숙제가 하나 있었다.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넘겨진 페이지를 지나온 이들이라면 바로 알 수 있으리라. 바로 일기 쓰기다.
요즘은 초등학교에 들어가도 일기 쓰기를 매일 숙제로 내주지 않는다. 의무와 자율 사이에는 큰 간격이 존재하는 듯 하지만, 때론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에서 예기치 못한 자유함을 누리는 순간도 있다. 어릴 적 일기 쓰기는 내게도 먹기 싫은 쓴 약을 삼키는 것만큼 피하고 싶은 것이었지만, 분명 일기 쓰기는 생애 첫 글쓰기에 제대로 도전한 것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은 우리에게 또박또박 글쓰는 것을 강조하셨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 백발 머리의 신혜정 선생님은 글씨를 또박또박 쓰는 것이 초등학교 1학년생의(내가 다닐 당시에는 국민학교였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늘 말씀하셨다. 그리고 매일 일기 쓰기를 숙제로 내주셨다. 주말에도 예외는 없었다. 글쓰기보다 똑바로 글씨 쓰기를 연습시키려는 목적이 컸으리라.
그 일기장을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정확히는 친정엄마가 버리지 않고 보관하고 있었다는 것을 결혼할 즈음에 알았다. 뭐가 그리 급한지 하던 공부도 마치지 않고 서둘러 결혼하겠다는 큰딸의 결혼식을 얼마간 앞두고 엄마는 베란다에서 오래된 상자를 꺼내왔다. 여러 번의 이사를 해오는 동안 그것을 간직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당신의 결혼식 앨범과 우리 어릴 적 앨범이 들어있는 상자에 함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하면서.
그 빛바랜 상자 속에는 일기장 십여 권이 빠짐없이 차곡차곡 오랜 세월의 흔적을 남기며 서로 엉겨 붙어 있었다.
신혼집부터 최소한의 살림으로 살아야 하는 형편이었지만 차마 그 일기장은 버리지 못해 결혼 후 4번의 이사를 하는 동안에도 기어이 들고 다녔다. 이제는 나보다 두 아이가 더욱 소중히 여겨 심심할 때마다 그것을 꺼내 읽으며 보물 다루듯 애틋하게 다뤄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1학년 아이가 매일 쓰는 일기였으니 하루 세 끼 비슷한 음식을 먹는 것만큼 재미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늘 똑같은 친구들과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고 하교후에는 깜깜하도록 친구들과 동네에서 같은 놀이를 하며 보냈으니 더더욱 일기를 쓸만한 소재가 없었을 터였다. 미루고 미루다 밤에 잠들기 전에 일기장을 펼쳐놓고 빈 백지를 뭐로 채울지 고민했던 것이 생각난다. 결국 써놓은 일기장을 읽어보면 지루하기 짝이 없게 비슷한 내용의 반복이다.
또박또박 글쓰기를 강조했던 선생님은 일기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는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일기가 하루 동안 있었던 모든 일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루 중에서 가장 특별했던 그 무엇을 주제로 삼아 쓰는 것이라는 것을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
일기장은 초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조금씩 환골탈태하기 시작한다. 늘 비슷한 패턴으로 쓰던 일기에 드디어 스토리텔링 기법이 등장한다. 하루는 좋아하는 친구를 소개하기도 하고, 또 하루는 시를 써서 힘들었던 마음을 표현해 보기도 했다. 의무적인 글쓰기에서 조금씩 글쓰기의 기쁨을 알아가기라도 했던 것일까. 분명 2학년 여자아이 일기장은 글쓰기 연습터가 되어가고 있었다.
쓰는 행위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나의 일상과 주변을 세밀하게 살펴야 한다는 것도 배워갔다. 글감을 찾기 위해 주변을 관찰한 것이다. 밤에 일기를 쓸 것이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면 놀던 친구들을 뒤로하고 슬그머니 홀로 뒷산 오솔길을 갔다 오거나, 큰아빠 댁까지 하릴없이 걸으며 부러 들판의 채 영글지 않은 옥수숫대를 만져보고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무궁화 꽃잎을 따서 찢어도 보고 접어도 봤다.
작고하신 이어령 선생님이 여섯 살배기일 때 홀로 보리밭에서 굴렁쇠를 굴리다 눈물을 흘렸던 순간은 처음으로 죽음을 인식한 것이라고 고백한 것은 유명하다. 메멘토모리. 나도 홀로 시골 들판을 걸으며 그런 비슷한 마음을 가졌던 것이리라. 이어령 선생님처럼 죽음까지 생각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을지라도 난 매일 일기를 쓰면서 일찍 철이 들었고, 날마다 친구들과 뛰어놀면서도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틈을 만들었다.
하루는 일기장을 들고 혼자서 산에 올라간 적도 있다. 새벽에 테니스를 치고 약수터에서 물을 떠 오는 아빠를 따라 몇 번 가본 적 있는 산이어서 호기롭게 도전해 보기로 한 것이다. 지금도 못 말리는 길치인데 어릴 때라고 달랐을까. 인적이 많은 길이라 사람이 지나다닌 흔적이 있었을 텐데도 약수터에서 내려오는 길을 못 찾아서 엉뚱한 곳으로 간 적이 있다. 이상하게 무섭지 않았다.
따스한 봄날이었고, 사람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그곳이 처음부터 오고 싶었던 목적지처럼 느껴졌다. 흡사 이상한 나라 엘리스처럼 나무 구멍 밑으로 빠진 것이라 여기며 그 길에 낙엽을 모아 둥그런 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 엎드려 일기장을 펼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때의 또렷한 기억은 고스란히 일기장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기억 속에서는 일필휘지로 근사한 문장을 잔뜩 적어놓았을 것 같지만 막상 일기장에는 그저 뒷산에 혼자 올라 약수터에서 물을 마시고 다람쥐를 봤다는 딱 그 나이다운 글로 적혀있어 민망하기도 하지만, 분명 당시에 어린 나는 글을 쓴다는 것이 나만의 은밀하고도 근사한 행위라는 것에 홀로 도취했다. 다행히 그곳에서 무사히 내려왔고, 그 뒤로도 혼자 그곳을 종종 찾았다. 나만의 글쓰는 아지트였다.
우리 마을은 언젠가는 댐으로 만들어져 물속으로 사라지게 되리라는 것을 모두가 알았다. 어린아이가 상실의 개념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난 유독 슬픔을 자주 느꼈다.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고 있을 때도 갑자기 혼자 슬펐고, 일요일에 교회에 다녀와 홀로 둑에 앉아 흐르는 개울을 보고 있을 때도 알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가을 수확 시절에 할머니를 따라 풍년이 든 노란 벼가 끝없이 펼쳐진 너른 논을 볼 때도 기쁨보다는 그것이 곧 사라질 것이라는 아련한 아픔이 더 크게 느껴지곤 했다. 당시에는 그 감정을 나의 언어로 포착해서 제대로 쓰는 법을 알지 못했지만, 쓰는 것으로 그 알 수 없는 슬픔의 감정을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그저 쓰는 것이 좋았다. 쓰기까지 단순하지 않은 그 복잡다난한 감정의 변화를 겪어내는 것도, 그리고 그것을 나름의 행위로 시도해서 한편의 일기로 만드는 과정도 좋았다.
안타깝게도 도시로 이사를 오고 중학생이 되면서 매일 일기를 쓰는 행위는 거기에서 멈췄다. 그럼에도 쓰는 것이 좋았던 나는 이후 휘몰아쳤던 사춘기의 거대한 광풍에서 빠져나오는 법을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