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문이 왜 열렸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모두가 그럴 거라 했지만, 나는 그러지 않을 거라 호기롭게 장담했다. 그러나 중학교 2학년, 결국 들끓는 열기로 가득한 사춘기가 시작됐다.
나의 반항을 만천하에 공표했다. 중학교 1학년 때 줄곧 전교 10등 안에 들면서 선생님들의 총애를 받던 우등생이었다. 그랬던 내가 2학년 봄, 어깨까지 오던 머리를 짧게 숏컷을 하고 학교에 갔을 때 나를 쳐다보던 담임선생님의 눈빛이 아직도 선연하다. 별명이 큰 바위 얼굴이었던 나의 담임선생님은 큰 얼굴에 큰 눈을 갖고 계셨는데 그 큰 눈을 껌뻑거리면서 한참을 나의 변화에 휘둥그레하셨다. 어찌 된 영문인지 스스로 답을 찾고 싶었던 것 같다. 그 답을 나 자신도 찾을 수 없었는데 선생님은 이미 알고 계셨을까.
당시 반항은 나와 비슷하게 사춘기의 열병을 앓기 시작한 친구들을 만났을 때 시너지가 폭발했다. 친구 넷과 함께 우리는 그 나이에 할 수 있는 모든 반항을 시도했다. 공부는 당연히 안 했고, 당시 최고 아이돌이었던 HOT에 빠져서 시도 때도 없이 교실에 모여 춤을 추고 그들의 이야기에 심취했다.
부모님 몰래 대전에서 버스를 타고 HOT를 본다고 서울 드림 콘서트까지 막무가내로 가기도 했다. 이런 덕질 정도야 엄마도 지나가는 과정이겠거니 하고 눈감아주셨다. 문제는 진짜 못된 범죄도 저질렀다. 우리는 거칠 것 없이 문구점에 들어가 팬시용품들을 훔쳐서 당당히 나오기도 했고, 대형 슈퍼 앞에 진열된 과자들을 자연스럽게 훔쳐서 친구네 집에 모여 낄낄대며 먹으며 우리의 무용담을 자축하곤 했다.
매일 그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도대체 왜 그러는지 스스로도 모른 채 이상하고 괴상한 행동들을 일삼았다. 그렇게 봄을 지나고 여름 방학 전에 보게 된 기말고사, 중학교 2학년에 올라와서 처음 본 중간고사에서도 1학년 때와 비교하면 가파른 속도로 추락한 성적이었지만 기말고사는 차마 믿을 수 없는 등수가 성적표에 새겨져 있었다. 나뭇잎이 짙은 녹음으로 변해가도록 괴상한 반항을 일삼던 나를 참고 지켜만 보시던 담임선생님이 드디어 나를 따로 불러내셨다.
선생님은 학교 도서관을 관리하며 동아리 활동인 문예반 담당 선생님이셨다. 면담 장소로 오라고 부른 곳은 교무실이 아닌 도서관이었다.
도서관 사서실에서 선생님은 나를 앞에 앉혀두고 가만히 바라보셨다. 특별히 혼내거나 성적에 관해 꾸짖지 않으시고 "앞으로 월요일 아침마다 일찍 와서 도서관 봉사를 해줬으면 좋겠구나"라고 말씀하셨다. 매주 월요일에 학교에 일찍 와서 도서관에서 책 정리를 하는 봉사를 하라는 것이었다. '뜬금없이 웬 도서관 봉사?!'란 생각이 먼저 떠올랐지만 부드럽지만, 묵직한 어투로 말씀하신 선생님의 명을 감히 어길 용기는 서지 않았다. 그래서 그 다음 주부터 도서관 봉사를 하기 시작했다.
월요일 아침 일찍 도서관에 도착해보니 다행히 혼자서 봉사하는 것이 아니었다. 선생님이 맡고 있던 동아리 문예반 선배들도 함께 책을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고, 나는 그 옆에서 하라는 대로 도우면 되는 일이었다. 나는 당시 선배들이 시키는 대로 책을 분류하고 책장의 먼지들을 닦는 일을 했다. 크게 어려운 일은 없었다. 그런데 선배들은 책을 정리하면서 책에 관한 이야기로 서로 진지한 대화를 나누면서 자기들끼리 웃곤 했다.
당시 그들이 나눴던 이야기에 대한 구체적 기억은 없다. 다만 그들의 이야기에 나도 점점 스며들고 있었다. 선배들이 나눈 많은 책 중에 <데미안>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처음으로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차올랐다. 작가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헤르만헤세.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이야기가 더 알고 싶었다. 그렇게 나의 인생 책인 <데미안>을 만났다. <데미안>을 읽으면서 먹먹한 감동과 설명할 수 없는 희열을 처음으로 책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선생님은 내가 도서관에서 나만의 ‘데미안’을 만나게 될 거라는 것을 아셨을까. 데미안을 읽은 후, 나는 헤르만 헤세의 또 다른 작품도 읽기 시작했다. <수레바퀴 아래서>, <싯다르타>, <클링조어의 마지막여름>. 당시 15살 내가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들이었다. 그런데도 난 책 속에 곧잘 빠져들어 그들과 깊이 침잠하여 도서관에서 홀로 심오한 세계를 향유하고 있다는 착각을 즐겼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퍼지는 그 향기가 좋았다. 도서관 회백색의 음습한 벽 냄새마저 사랑스러웠다. 난 월요일 오전뿐만 아니라 수시로 도서관을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도서관과 책의 냄새를 사랑하며 사춘기의 열병을 자연스레 빠져나왔을 때, 큰바위얼굴 선생님은 나에게 문예반에 들어오라고 하셨다. 이제 겨우 책과의 사랑에 빠질 참이었는데 문예반이라니. 더구나 선생님은 나에게 시를 지어보라 하셨다. 선생님의 권유를 자연스레 또 받아들였고, 오글거리고 이상하게만 느껴지던 시 쓰기도 순순히 받아들였다.
선생님이 만드신 문예반의 이름은 '시나브로'였다.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의 순우리말, 시나브로란 이름을 지은 선생님은 우리가 느리더라도 조금씩 문학을 알아가길 바라는 순전한 마음으로 글 쓰는 것을 응원하셨다. 그런 의미로 매해 문예반에서는 매 학기 시화전을 교내에서 큰 행사로 준비했다.
20여 명 남짓의 문예반 동기, 선후배들과 시화전 날짜가 정해지기 두세 달 전부터 글감을 찾는 여정을 시작했다. 선생님은 그 어떤 주제도 좋다고 하셨다. 다만 충분히 보고 느끼고 생각하라는 주문만 하셨다. 시화전을 준비하며 '글감 여행'이란 낭만적 이름을 붙인 우리만의 백일장을 학교 운동장에서 열곤 했다. 그날은 우리끼리 모여 교정의 모든 것들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여중생들의 넘치는 감수성은 도처에 널린 들풀과 돌멩이에도 남다른 의미가 매겨지게 했다.
최종 완성된 시를 짓기까지 수십 번의 지난한 퇴고 과정이 반복됐다. 시구에 어울리는 단어 하나를 신중히 고르고, 문장 배열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바꿔보면서 행 하나를 매만지는 수고로움에 때때로 서로 예민해지곤 했다.
시화전은 시만 짓는 일이 아니라 그 시와 어울리는 그림 또한 손수 준비해야만 했다. 가끔은 미술에 재능이 있는 친구의 손을 빌리는 이도 있었지만, 내가 지은 시에 어울리는 그림을 아무리 설명한들 내가 느낀 그대로 상대방이 이해해 줄 리 만무했다. 한 땀 한 땀 고이 꿰어낸 나의 시구에 어울릴 그림도 결국 어설픈 나의 손으로 그려내야 진정 ' 나의 시'가 될 수 있었다.
선생님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큰바위얼굴처럼 묵묵히 내가 쓰는 글을 지지해 주셨다. 어떤 시든 수줍게 내밀어도 정성스레 퇴고를 도와주셨고, 좀처럼 왜 살아야 하는지 의미를 알 수 없었던 그 시절에 시를 짓는 일은 내 삶을 아끼고 가꾸는 실제적인 길이 된다는 것도 몸소 보여주셨다. 선생님 덕분에 한동안 잊고 있었던 쓰는 기쁨을 찾았고, 잊고 지냈던 슬픔의 감수성이 되살아났다. 처음에는 시를 짓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이후에는 산문을 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시를 짓던 소녀는 더 긴 문장을 매만지고 어루만지는 본격적 글쓰기에 돌입했다.
그렇게 선생님과 쭉 중학교를 마쳤으면 나는 쉬지 않고 글을 썼을까. 중학교 3학년 졸업을 몇 달 앞두고 난 또 급히 전학을 해야 했다. 당시 고향은 물에 잠겼지만 수몰 지역을 벗어나 근방에서 농협에 다니고 있던 아빠는 갑작스레 퇴직을 선언하시고 서울로 가서 자영업자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아빠의 선택으로 우리 가족과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길로 들어서게 된다.
선생님이 곁에 계시지 않아도 꿋꿋하게 글감을 찾아내글을 썼다면 '좋아하는 것'을 찾는 여정이 이렇게 돌아오지 않아도 됐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늘 남는다. 그럼에도 그 시절 곁에 있어 줬던 선생님과 문예반, 그리고 시를 짓던 소녀의 추억 덕분에 백일장에서 시를 짓는 마음으로 다시 좋아하는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제는 나의 시를 점검받을 수 있는 선생님은 곁에 계시지 않지만 내 인생 속에 지을 수 있는 나만의 시를 홀로 꿋꿋하며 매만지고 또 점검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전시하는 시는 아닐지언정 허투루 다듬지 않은 정성스러운 하루하루를 만들어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