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3학년, 여름에 들어서며 서울로 전학을 왔다. 평소 열정 없이 과학을 가르치던 담임 선생님은 엄마가 학교까지 찾아와 딸의 일생일대 중요한 상담을 했음에도 변함없이 관성을 유지한 채 "지금 전학시키세요"란 성의 없는 답을 내놨다.
서울로 이사를 예정하고 있었지만 급한 상황은 아니었고, 만일 선생님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가라고 했으면 얼마든지 그 시기를 맞출 수 있었다. 그런데 당장 전학시키라는 말에 엄마는 나만 홀로 서울에 있는 이모 집에 덜컥 하숙하는 신세로 전학을 시켰다.
사촌 동생과 한방을 쓰며 눈칫밥을 먹었던 것은 버틸만했다. 문제는 당시 서울은 거주지에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에 따라 고등학교를 우선 배정해 주는 원칙이 있었다. 나는 당시 전학 간 중학교에서 달랑 홀로 멀리 떨어진 외딴 고등학교에 배정받았다.
고등학교는 살던 곳에서 버스를 타고 20분가량 가야 했고, 버스를 내려서도 걸어서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 가파른 언덕 끝에 있었다. 예전부터 무당이 많이 있는 골짜기라는 뜻으로 동네 이름이 붙여진 곳이었다.
입학 첫날, 학교 교칙에 따라 머리를 귀밑 3cm로 자른 신입생은 나를 포함해 열 명도 안 되는 듯 보였다. 그 학교는 근방 중학교에서 소위 일진이라고 불리는 아이들의 집합소로 불리는 곳이었다. ‘어떤 환경에 처했든 꿋꿋이 혼자 열심히 하면 되지'라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그런 친구들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주변 환경과 친구들의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나만의 방패막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그때 찾은 것이 도서반이었다.
도서반은 다른 동아리와 달리 유일하게 전교 석차 커트라인이 존재했다. 높은 성적을 요구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커트라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카오스인 학교 내에서 도서반의 존재가 다르게 와닿았다.
중학교 때 문예반 활동도 도서관을 거점으로 이루어졌다. 문예반 회원들은 돌아가며 도서관 봉사를 했고 따로 동아리실이 있었지만, 넓은 도서관을 무대 삼아 선후배들과 삼삼오오 모여 글감을 찾고 나누며 쓰곤 했다. 글쓰기를 떠올릴 때 도서관의 회백색 벽과 촘촘히 꽂혀있던 책 무더기에서 흘러나온, 오래된 종이 냄새가 자연스레 어우러졌다. 위로의 향, 문학을 사랑하도록 만들었던 책들. 도서반이라면 그 향수를 다시 찾고 나의 새로운 놀이터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도서반 지원 심사는 무사히 통과해 나는 도서반 16기 신입부원이 됐다. 합격하고 보니 도서반이 교내에서 꽤 유명한 동아리인 것이 확실했다. 그 이유는 당시 14기 남자 선배들 넷이 잘생기고 공부까지 잘하기로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소위 도서반 F4로(당시 유행했던 만화, <꽃보다 남자> 패러디) 불리고 있었다.
나는 방과 후에 그들을 매일 볼 수 있는 행운을 누렸고, 반친구들은 F4 오빠들 실제 모습은 어떠냐고 자주 묻고 했다. 나도 도서관에 가면 선배들이랑 책 읽고 공부하는 것이 전부였기에 그들의 실제 모습을 알리 만무했지만, 그런 질문을 받는 것만으로 의기양양했다. 절대 만화 같은 일이 내게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렇게 도서반의 정예 멤버가 됐고,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도서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됐다. 그러나 그곳은 문예반과 달랐다. 그 누구도 그곳에서 글쓰기를 하지 않았고, 책을 읽는 것에 어떤 코칭도 주지 않았다. 도서반은 그저 하교 후에 도서관에 모여 우리끼리 공부를 할 수 있는 동아리실을 제공한다는 것이 가장 큰 특권이었다.
인근 지역에서 날라리들이 가장 많고 선생님도 포기했다는 학교에서 그나마 공부하겠다고 모인 선배들과 동기들이 도서반에 있었다. 선배들은 우리에게 책을 읽으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정신 교육을 주로 했다. “너희는 도서반이야. 다른 애들에게 휩쓸리지 말고 공부해라. 네 미래를 생각하고 행동하란 말이야.” 이런 식의 말을 많이 해줬고, 그들도 우리와 함께 공부를 하며 본을 보였다. 알량한 특권 의식에 사로잡힌 그들이 꼴사납게 보이기도 했지만 난 그 집단에 속해있다는 유치한 우월감에서 굳이 벗어나진 않았다. 그 안에 숨어 의미 없는 학교생활을 버티는 피난처로 삼았다.
글쓰기는 시도도 하지 못했지만, 도서관에서 나는 성인 소설들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괜히 허세를 부리며 카뮈의 책을 독파해 본다고 시도한 적도 있다. <달과 6펜스>를 읽으며 고갱이 모티브가 됐다는 소설 속 주인공의 삶을 동경하기도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한동안 충격에 빠져 멍한 상태로 보냈던 기억도 떠오른다.
도서관 밖의 학교 생활은 험난했고, 서울에서 자영업자가 된 아빠의 삶은 더욱 험난하던 때였다. 누구보다 강한 분이라 여겼는데 아빠는 서울에 와서 마음의 둑이 무너졌다. 그리고 끝도 없이 허물어져갔다. 아빠는 우울증의 늪에 깊이 빠졌고, 그나마 간간이 버티던 자영업 운영도 두 손 두 발을 들고 하지 못하겠다고 누워만 지내던 때였다.
당시 도서관은 내게 도피성 같은 곳이었다. 서울, 집, 아빠의 새로운 일터 그리고 학교와 반 친구들마저도 모두 낯설고 두렵기만 했던 그때, 간신히 도서관으로 피했다. 가장 안전하고 따스한 곳이었다. 글 쓰는 일을 알려주는 큰 바위얼굴 선생님도, 문예반 동기들도 없었지만, 읽을 수 있는 책이 있었고, 홀로 상상의 세계를 뻗게 해 준 F4 오빠들도 있었다.
그 시절에도 나는 분명 좋아하는 그 무엇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