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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리 Oct 02. 2023

경영학과 국문학 사이, 영어영문학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것은 의지적 선택이 아닌, 수능 점수 줄 세우기로 자연스레 맞춰진 결과였다.



대학에 진학하기 전까지 시험 영어가 아닌 다른 영어는 공부하지 못했다. 그런 게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 채 학교 공부에 임했다. 3040 내 또래들 대부분이 그랬듯이.


학교 영어 성적은 늘 좋았다. 도서반 울타리 안에 있었던 덕인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도 성적은 상위권이었고, 영어 시험은 특히 교과서만 달달 외우면 만점 받기에 크게 어렵지 않았다. 나는 내가 영어를 곧잘 한다고 착각했다. 그래서 겁도 없이 대학교를 진학할 때 영어영문학과 원서를 넣었고 덜컥 합격했다.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국문과를 가기엔 점수가 높았고, 경영학과에 가기엔 못 미쳤기 때문에.


그 사이에 영어영문학과가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대학에서 맞닥뜨린 '진짜 영어'는 내 예상과 수준을 완전히 뒤엎는 것이었다. 토종 국내파 출신인 나는 특례 입학생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영문과에서 주눅이 들었고, 열심과 성실을 발휘해도 좀처럼 따라잡을 수 없는 그들의 네이티브 아우라에 계속 자존감만 깎일 뿐이었다. 그래도 꾸역꾸역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영어에 심술이 난 마음을 달래며 공부했다.


그렇게 자연스레 영어를 가르치면서 돈도 벌고 나름 보람찬 30대를 지나왔다. 그렇지만 진짜 나에게 '영어'가 어떤 존재냐고 묻는다면 '치가 떨리게 싫다'라고 소리쳐 외치고 싶었다. 대학에 진학해서 아이를 낳고 영어 강사를 하는 동안 영어는 끈덕지게 내 삶에 붙어있었지만, 그것을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내세울 수 없었던 것이 삶의 큰 비애였다.



마흔을 앞두고 간절히 바랐던 것은 부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지, 반대로 잘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 바로 아는 것이었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무턱대고 열심히 하며 살았던 삶이었다.


성실함을 무기로 그냥 내게 주어진 대로, 해야 하니깐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며 꾸역꾸역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러한 삶의 태도는 살면서 내게 해보다는 득을 더 많이 가져다줬다. 그렇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즐기면서 기쁘게 한 것이 없다는게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엄마가 되고 아이들이 커 물리적으로 손이 덜 가자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비로소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본격적으로 찾았다. 영어를 좋아하기 위해 애쓴 시간도 있었고, 그것은 현재 진행형이다. 코로나로 학원에 속해서 일하던 강사직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면서 오히려 영어의 압박에서 벗어나 즐겁게 공부하는 법을 터득하기도 했다.


영어 원서를 읽는 북클럽에 들어가 좋아하는 책을 읽고 영어로 토론하는 적당한 부담을 일부러 만들며 영어와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무엇보다 내 아이들에게는 내가 대학 때 겪었던, 진짜 영어에 배신당하는 기분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아서 지금까지 '엄마표 영어'로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원서 읽기로  매일 영어를 마주한다. 큰아이가 2학년 때 시작해서 현재 6학년이 되도록 매일 이어가고 있으니 이 정도면 나와 아이들의 성실함을 칭찬해 줄 만하다.

 


누가 시켰다면 결코 지속하지 못했을 것이다. 수능 줄 세우기로 국문과와 경영학과 사이의 영문과에 진학했고,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도 내가 진짜 좋아하고 잘하고 싶은 것을 찾지 못해 엄마가 돼서도 이어진 나의 방황은 적어도 엄마로서 아이들에게 영어만큼은 더 좋은 방향으로 안내할 수 있었다.


영어와 고군분투했던 그 시절이 힘겹고 지긋지긋했지만, 오랜 시행착오는 끝끝내 나에게 새로운 의미를 만들고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했다. 어느새 두 아이는 자막 없이 디즈니 영화를 깔깔거리며 보고, 둘이 대화할 때는 자연스레 영어와 모국어가 뒤섞인다. 나와는 다르게 영어는 그저 재미있고 즐거운 것으로 느끼고 있으니 그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대학 진학시 영문과가 아닌 곧장 국문과에 갔으면 좀 더 빨리 좋아하는 것을 찾고 글쓰기에 전력을 다할 수 있었을까. 그걸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영문과에 진학해서 해외에서 공부했던 친구들을 보고 좌절했던 만큼 타고난 글쓰기 재능을 드러내는 누군가를 보며 더 깊은 좌절과 방황을 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늘 가지 않은 길을 아쉬워하고, 그 길 끝에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을지 홀로 상상하며 현재의 자리를 불평한다. 부끄럽게도 엄마의 자리에 있으면서 현재의 나에 감사하지 못하고 다른 평행 우주에 존재할 법한 또 다른 나를 만들어 비교하며 좌절할 때가 많았다.


비로소 영어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었던 때는 나의 실력을 솔직히 인정하고 민낯 그대로의 나를 마주하는 용기를 냈을 때였다. 그 용기를 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좋아하는 것은 불현듯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동안 내가 살아온 궤적 속에 늘 함께하고 있었던 것들이 그 자리에서 오래도록 나의 애정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엄마로 살아온 13년, 그리고 나이 마흔이 다됐을 때야 나와 함께하고 있었던 수많은 것들이 제대로 보였다. 내가 지나온 공간, 살아온 시간, 지우고 싶은 부끄러운 기억들, 믿음으로 지지하며 함께했던 친구들, 그리고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었던 가족들까지. 그 모든 것들이 이미 나의 세계를 만들어 좋아하는 그곳으로 나아가게 해준다.


조승연이 저서 <플루언트>에서 "외국어 공부는 연애만큼이나 타 문화에 대한 사랑과 이해를 요구하는 감성 투자"라고  말한 것은 비단 언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좋아하는 것을 찾는 여정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이미 나와 함께하고 있는 것들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시간이다. 그 투자의 시간이 쌓이면 언제고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진짜 무엇을 좋아하는지.


우리 집 두 아이가 오랜 영어 인풋의 시간을 거쳐 자연스레 아웃풋을 근사하게 내뱉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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