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적 이른 나이에 결혼했다. 단둘이 살 수 있다면 단칸방도 좋다는 순전한 열망으로 시작한 결혼이었다.
당시 우리가 가진 돈으로 얻을 수 있는 집은 5,500만 원짜리 다세대 주택의 허름한 전세 뿐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설렘으로 그 집을 계약했고, 소꿉놀이하듯 살림살이를 하나씩 채워가는 재미를 누렸다.
그 집에 대한 콩깍지가 벗겨진 것은 예상보다 빨리 찾아온 첫째를 임신한 이후였다. 1년간 꽉 채운 둘만의 신혼을 보낼 때는 호텔 스위트룸처럼 근사했던 곳이 셋이 된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초라한 민박집으로 둔갑했다.
신혼집은 서울 문정동이었다. 우리 집을 주변으로는 빌라촌이 들어서 있었고, 길을 건너면 아파트 일대가 펼쳐졌다. 신혼 때는 그 길 건너 아파트가 그저 우리 집 주변에 어우러져 존재하는 풍광일 뿐이었다. 아이를 낳고 그 집에서는 도저히 아이를 키울 수 없다는 생각에 미치자 그제야 근방 아파트 가격을 알아봤고, 길 건너 세상과 내가 있는 곳의 건널 수 없는 간격을 깨달았다. 결혼 전에 살던 친정집도 아파트였건만 서울 아파트에 살기 위해 이토록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것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순진한 새댁이었다.
결국 아이를 출산하기 직전에 우리는 안양시 평촌으로 이사를 왔다. 21평의 복도식 아파트였는데 아이를 위한 우리의 공간으로 마련했던 첫 보금자리였다. 남편과 나는 겁도 없이 엄청난 대출을 얻어 그 집을 더럭 사버렸다.
10층 4호, 1004호였던 우리 집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그 누구보다 행복한 가정을 꾸려갈 것이라 믿었다. 집을 계약하는 날, 계약서에 쓰여있는 1004호를 보고 우리 부부는 이후로 그 집을 '천사의 집'이라 명명했다. 아이를 출산하고 혼자서 신생아를 키우는 것이 어떤 변화를 불러오는지 전혀 알지 못했던 우리의 순진함이 드러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조리원에서 꿈결 같은 시간을 보내고 천사의 집으로 호기롭게 옮겨왔다. 양쪽 어머니들 도움을 받을 처지도 아니었거니와 그동안 맏딸로 부모님께 아쉬운 소리를 해보지 못한 나는 육아도 당연히 홀로 감당할 몫이라 여겼다. 그런데 조리원에서는 순하게 먹고 자고 싸기만 했던 아이가 집으로 오자마자 돌변했다. 낮에는 잠만 자려 들었고, 밤에는 도무지 잘 생각을 하지 않고 끊임없이 보챘다. 바로잡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낮에 재우지 않고 놀려야 했으나 밤새워 기진맥진한 나도 아이가 잠들면 함께 잠드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렇게 낮에 통잠이라도 자줘서 버텼는데 시간이 지나자 밤에도 토막잠을 자더니 낮에도 2시간 이상을 자지 않고 온종일 징징댔다. 천사가 징징이로 변한 순간, 천사의 집은 어둠의 기운에 스멀스멀 잠식당했다.
당시 남편은 회사에서 신입 티를 벗고 선임들의 요구에 어떻게든 부응하려고 애쓰던 시기였다. 토요일도 출근하던 시기였으니 평일에는 10시 전에 퇴근하기 어려운 때였다. 그런 그에게 밤새 보채는 아이까지 함께 봐달라고 부탁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남편은 그가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해 도왔다. 물론 잠에 깊이 빠지면 아이가 우는 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어떻게든 버티고 버텨서 엄마로서 스스로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친구들이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새로운 일터에서 적응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때면 더더욱 내게 주어진 삶을 잘 살아내는 것으로 나의 선택을 잘한 것이라 인정받고 싶었다. 그러나 수시로 무너졌다. 아이와 눈을 마주치며 "엄마 곁에 와줘서 고마워." "내 아가, 사랑해"라고 말하며 힘껏 사랑해 줄 것을 다짐하고 또 다짐했지만 걷잡을 수 없이 우울함이 몰려왔다.
10층 거실 창에 서서 아득하게 아래를 내려다보며 뛰어내리고 싶다는 아찔한 생각이 무너진 틈으로 비집고 올라왔다. 도움을 청할 곳은 결국 남편뿐이었다. 회사에서 아등바등 버티고 있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울부짖었다.
나 이렇게는 살 수 없을 것 같아!
그것이 산후우울증이라는 것은 나중에야 다시 돌아봤을 때 깨달을 수 있었다. 당시에는 내가 우울증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그에 맞는 해결책을 찾는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지 가운데를 아이를 짊어지고 어떻게든 헤쳐가야 했다. 당시 남편은 나름의 방법으로 나를 위로하고 육아에 전력으로 도왔지만, 결국 홀로 아이를 감당할 때는 오로지 나 혼자서 치열한 싸움터에 서 있는 듯했다.
눈에 보이는 적이었다면 당치도 않을 어퍼컷이라도 날려봤을까. 어여쁜 내 아이를 앞에 두고 느껴서는 안 되는 감정을 마주할 때는 죄책감이란 더 큰 적이 강한 펀치를 날렸다. 그 싸움은 도무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 더 미칠 노릇이었다. 내 아이가 태어났는데 속절없이 무너지는 나의 연약함이 미웠다. 저 우주만큼 크고 위대하다는 모성애가 나에게는 왜 생기지 않는 것인지 원망스러웠다. 온갖 부정적인 감정에 잠식당한 채 아이를 안고 10층 베란다를 서성거리던 그 시간이 여전히 또렷하게 떠오른다.
찰나였지만 아이가 낮잠을 잘때, 그토록 원하던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졌는데 막상 그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했다. 처음에는 고갈된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아이와 함께 자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러다 쳇바퀴 돌듯 아이의 루틴이 어느 정도 정해지자, 하루에 두 시간 정도는 아이와 함께 자지 않아도 버틸 수 있게 됐다. 그 시간은 어떻게든 나를 위해 써야 한다는 거룩한 사명감마저 생겼다. 시행착오도 많았다. 처음에는 어질러진 집 안 이곳저곳을 정리하는 데 그 시간을 허비했다. 어질러진 집을 보는 것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것 중의 하나였으니 그것을 정리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내 눈을 정화할 뿐, 무너진 마음을 회복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드라마를 보기도 했다. 다른 이의 삶을 엿보고 다른 세계 속 이야기에 빠져있는 동안에는 나의 힘든 상황들을 잠시 잊게 해 준다. 강력한 마취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취제가 강력할수록 그것에서 깨어났을 때 후유증은 더 큰 법. 아이가 제때 낮잠을 자지 않거나 2시간 이상 쉬지 못하면 짜증과 우울의 깊이가 더더욱 커졌다. 계속 드라마의 마취에 빠져 지낼 수는 없었다. 그때도 스스로 계속 물었던 질문은 그것이었다.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지?
시간이 차고 넘칠 때는 굳이 좋아하는 것을 물어서 그것을 할 필요는 없다. 해야 할 것, 하고 싶은 것, 하기 싫은 것들이 뒤엉켜서 그저 시간의 분절에 적당히 배분해서 처리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나를 위해 오롯이 하루에 두세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때는 시간 사용법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래서 아이를 키우는 엄마에게는 간절한 질문이 되는 것이다.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그 시절 내가 그랬던 것처럼 현재도 많은 엄마들이 산후우울증을 겪는다. 이제는 너무도 많은 육아 정보가 흩날린다. 결혼하기 전에 널리 퍼진 낭설로 출산을 꺼리는 부부들도 더 많아졌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이 세상에 가장 존귀한 생명을 내어놓는 위대한 행위임이 분명하지만, 그것을 지켜내기 위해 엄마가 홀로 감당해야 하는 무게가 만만치 않다. 어린아이와 홀로 견디는 엄마들의 시간이 손안의 스마트폰이란 강력한 마취제에만 뺏기지 않았으면 한다.
세상의 모든 엄마가 진짜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답을 찾고, 자신에게 오롯이 주어진 몇 시간의 자유를 가장 농밀하고 행복하게 누리길.
이제는 떠나왔지만 천사의 집이 그립기도 한 것을 보면 난 그 터널을 잘 빠져나온 모양이다. 떨어져서 바라보아야 비로소 삶의 전모가 보인다. 지나고 보니 엄마가 된다는 것은 시선을 모두 아이에게 옮기는 것이 아니었다.
엄마가 되는 건 자기 삶을 제대로 살피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용기를 내는 위대한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