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사랑, 노년의 섹스

by 김대일

남편과 사별한 지 10년이 넘은 주인공 손 여사는 늘그막에 손주 새끼 봐주다 그냥 죽을까 전전긍긍한다. 아들 부부에게 일주일 중 이틀은 자유시간을 가지겠다고 항의해 쟁취한다. 하루는 신문에서 <죽어도 좋아>란 영화 기사를 접한 뒤 아들과 영화관에 가 관람한다. 아들은 제 어미가 적적하다고 여겼는지 포르노 비디오 테이프를 가져다가 보여 드린다. 고추모를 같이 심자고 부탁하러 들른 이웃집 이 영감이 우연히 비디오 플레이 버튼을 눌렀는데…

일흔이 다 된 노인 둘이 앉아서 독일산 포르노 영화를 보면서 소설가 이문구의 구어체 뺨을 치는 충청도 사투리로 걸쭉하면서 능청스러운 입담을 펼친다. 민망하기보다 유쾌하고 훈훈하다.


"허는 것에 비해 양은 적구먼."

"저것들은 저게 일이라고 허대유. 양 많은 눔두 봤었지만 밥 먹구 하는 짓거리가 저거라서 워디 괼 틈이 있겄슈?"

"월래, 끝났는디두 또 빠는구먼."

"으레 저 짓거리드먼유."

(한창훈, 「청춘가를 불러요」, 한겨레출판, 2005)


소설이 노인의 성생활을 그리지는 않는다. 영화 <죽어도 좋아> 나 포르노를 보면서 '늙은 몸구석에서 붉은 기운이 은근히 번지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무정 세월아 가지를 말어라 장안에 청춘이 다 늙어가노라'는 청춘가의 한 소절처럼 늙었다는 것에 마음 아파하면서도 모든 걸 포기한 늙은이로 살고 싶지는 않다고 항변하는 듯싶다.

내가 왜 유독 <너도 늙는다>란 제하로 연재되는 칼럼에 환장하는지 곰곰 생각해본다. 아마도 나와 비슷한 연배일 성싶은 필자가 담아내려는, 사람이면 가차없이 겪게 될 늙음에 대한 갖가지 상념들에 전적으로 공감하기 때문일 게다. 이번 칼럼에서는 30대 남자와 70대 여자의 멜로를 그린 장안의 화제작 <빛나는 순간>의 한 장면을 끌고 와서는 노년의 섹슈얼리티, 특히 나이 든 여성의 그것에 대한 편견을 말한다.(김은형, <너도 늙는다-기다리지 말아요, 늙어빠질 때까지>, 한겨레, 2021.07.08.) 즉 부부의 중요성, 친구 관계의 가치에 대해서는 길게 이야기하면서도 '연애'라는 단어는 모른 척 한다거나 나이 든 여성은 무성적 존재여야 한다는 배타성이 완강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여자인 필자조차 과거시험 맨날 떨어지는 뒤처진 성균관 유생 짓을 자임하는 꼴이라고 고백한다. 인생에서 가장 외로운 때가 아이들도 가족의 둥지에서 날아가고 배우자는 세상을 떠나거나 애정 또는 유대감이 사라진 지 오래인 경우가 다반사인 중년 이후인데 말이다. 소설 속 손 여사처럼.

'그것'을 하는 연애이든 안 하는 연애이든 인간다운 노년을 지내자면 연애가 꼭 필요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칼럼 속 마사 누스바움의 말은 상대방을 향한 허황된 욕망의 끊임없는 갈구와 그로 인한 비극적 상실감에 허우적대는 젊은 것들의 사랑에 비해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다 겪은 백전노장 노년의 연인들은 서로가 완벽하길 기대하지 않는 담백함으로 해서 더 매력적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긴 밤과 일요일 오후에 느끼는 외로움을 달래듯 "좋은 사람이, 가까이 있다는 것, 밤중에, 어둠 속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연애야말로 인간적인 노력으로서의 연애가 아니고 뭐겠는가. 그러니 좀 관능적이면 어떠랴. <죽어도 좋아>에서처럼 여자 주인공 할머니가 영감님 거시기를 빨면 좀 어떻고. 더 늙어빠지기 전에 사랑하겠다는데.

(칼럼 내용을 많이 끌어다 쓴 점 밝힙니다.)


https://m.hani.co.kr/arti/opinion/column/1002589.html#c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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