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와 기억,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보수성 그리고 앞 날에 대한 잡생각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미스틱 리버>를 봤다. 영화에는 유년 시절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어른이 되어 버린 세 명의 동갑내기 남성이 등장한다. 지미는 한때 범죄를 저지르며 살았지만, 마음을 다잡고 식료품 가게를 운영 중인 가장이다. 숀은 겉보기엔 훌륭한 경찰관이지만, 집을 나간 아내를 애타게 기다리는 고독한 영혼이다. 데이브는 유년 시절의 성범죄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살아간다. 이들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데이브가 성범죄자에게 납치됐던 25년 전의 그 날, 사건의 현장에 함께 있었고, 범죄자의 얼굴을 목격했으며, 그가 자신들에게 가했던 위협의 공포에 동시에 몸을 떨었던 과거의 기억이다. 셋 중 데이브가 피해자가 된 이유는 순전히 운이 없어서였다. 그래서 지미와 숀도 알고 있다. 자신들도 운이 나빴다면 범죄의 희생자가 되었으리라는 것을. 이들이 현재 자신의 삶을, 과거의 '기억'을 통해 규정하려 태도를 영화는 끊임없이 보여준다.
영화의 상세한 줄거리와 결말을 굳이 글을 통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영화의 대략적인 주제에 대해선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미스틱 리버>를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과거의 비극적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간은, 이후의 삶마저 비극적일 가능성이 크다.’ 내가 영화를 보고, ‘기억’이라는 테마를 깊게 고민하게 된 것도, 감독의 이러한 ‘비관적 시선’ 내지 ‘세계관’이 스토리 저변에 흐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 인물이 데이브다. 불운하게 성적 학대의 피해자가 된 그의 삶은, 과거의 ‘기억’이 연장된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중년이 된 그의 말투와 삶의 방식은 여전히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여린 아이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가 살인사건에 연루되고, 비극적 결말의 주인공이 되는 배경에도, 상처로 똬리를 틀고 있는 유년시절의 트라우마가 존재한다.
‘트라우마’에 대해 내가 아는 바는 별로 없다. 다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았던 친구를 통해 들었던 협소한 지식 정도를 갖고 있을 뿐. 친구는 스스로가 ‘과거의 기억에 볼모로 잡힌 인간’과 같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 현재를 살아가다가 문득 심리적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면, 그는 항상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의 기억 속으로 후퇴하는 기분이었다고 내게 말했다. 현재의 아픔도, 미래에 대한 불안도, 언제나 과거의 상처와 연결된다고 했다. 문제는 그러한 후퇴와 회귀가 반복될수록, 과거의 상처가 아물기는커녕 커지고 곪기를 반복한다는 사실이었다. 뇌에서 ‘기억’을 뿌리 채 제거하지 않는 이상, 망각을 경험하지 않는 이상, 비슷한 질환이 반복될 가능성이 상존한다는 게 그의 자가 진단적 표현이었다.(다행히도, 그는 지금 즐겁게 잘 살고 있는 중이다.)
‘트라우마’가 나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 것도 그 때부터였다. 나는 그저 정신과에서 정식 진단을 받지 않았던 것뿐일지도 모르겠다. 비슷한 경험이 내게도 있다. 현실의 고통과 슬픔의 원인을 줄곧 과거의 상처에서 찾아 헤매던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중얼거린 혼잣말은 “그 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과 같은 무의미한 가정과 후회뿐이었다. <미스틱 리버>에서 살인사건으로 사랑하는 딸을 잃은 지미가 “그 때 차 안에 데이브가 아닌 내가 탔더라면(내가 성범죄의 피해자였더라면),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라는 공허한 가정을 멈추지 않는 장면에서, 과거의 ‘기억’ 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트라우마’의 후퇴와 회귀에 휘말려든 한 명의 인간을 보여주고 있다는 인상을 받은 것도 그래서였다.
‘과거’로의 회귀가, ‘기억’에 대한 집착이 뭐 그리 잘못된 것이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나는 그들의 그러한 삶의 방식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도, 비난할 자격도 없다. 다만 내가 최근의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된 사실은, 삶의 소소한 행복은 언제나 현재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순간에서 피어난다는 점이었다. 과거의 기억보다는 눈앞의 풍경을 음미할 때, 가슴이 뛰었다. 아팠던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누군가를 따지고 재는 것보다는, 내 곁에 있는 소중한 누군가에게 집중할 때, 닫혀 있던 마음이 열렸다. 아팠던 상처를 만지고 후벼서 커지게 만드는 것보단, 흉터를 가릴만한 새로운 기억을 만들며 사는 게 훨씬 더 낫다고 확신하게 됐다. 그래서 다짐한다. 혹시 내가 ‘기억’에 대한 무의미한 가정을 하고 있다면, ‘과거’에 사로잡혀 살고 있다면, 그것은 행복해지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노력해야 하는 순간에 직면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영화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보수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지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보수성’은 사람을 ‘변할 수 있는 존재'로 보지 않는다. ’보수주의자‘를 흔히 ’본질주의자‘와 동격으로 놓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본질주의자들은, 모든 사물에는, 사물의 정체성을 대변할 만한 본질이 존재한다고 믿고, 사람이든 무엇이든 그러한 본질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영웅‘의 탄생을 긍정한다. 본질적으로 남들과 다른 타고난 자질을 갖춘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간은 질적 고하를 기준으로 ’위계‘를 구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미스틱 리버>에서 데이브가 맞는 비극적 결말은 이러한 감독의 보수적 세계관을 상징한다. 성범죄 피해자로 지울 수 없는 불행에 빠졌던 그는, 이후의 삶에서도 불행했고, 죽는 순간까지도 불행하다. 그에게 트라우마란, 극복될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영원히 삶을 망가뜨리는 한 인간의 본질적 정체성과 맞닿아 있다. 물론 영화 자체는 가슴 깊은 곳에 뭉클함을 남길 만큼 훌륭했으며, 생각할 거리를 잔뜩 던져줄 만큼 좋은 작품이었다. 사실 이 정도 분량의 글을 쓸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것만으로도, 영화가 내게 준 만족감이 적지 않았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이는 불안과 공포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 자신을 향한 굳음 다짐이기도 하다. 바로 ‘진보성’에 관한 이야기다. 진보적 세계관은 보수적 세계관과 다르다. 사람을 ‘끊임없이 변하고, 극복될 수 있는 주체’로 바라본다. 철학자 니체의 말 중 잊히지 않는 구절이 있다. 박쥐가 바라보는 세계는 초음파로 이뤄져 있다고 한다. 그래서 박쥐는 죽거나 진화를 거듭하기 전까진, 초음파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뱀은 세계를 온도로 바라본다. 뱀도 박쥐처럼, 죽기 전까지 자신의 세계관을 벗어나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고 니체는 말한다. 인간은 죽지 않아도, 진화를 거치지 않아도, 끊임없이 자신의 세계관을 넓히고 확장하고, 때론 바꿀 수 있는 존재이며, 그렇기에 매력적인 생명체라는 게 그의 시각이다. 마치 자신에게 더 기쁘고, 행복하고, 즐거운 시야를 확보해줄 안경을 찾아다니며, 끊임없이 내게 맞은 안경을 바꿔 끼우며 살아가는 모습이 그와 같다고 할 수 있겠다. 과거의 상처, 실패, 좌절, 트라우마를 “이런 똥 밟았네... 젠장... 다음엔 안 밟으면 되지 뭘 후훗”거리며 넘길 수 있는 지혜 혹은 강단을 키우고 싶고, 그러한 시각을 평생 잃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 ‘그럴 줄 알았어...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야’와 같은 보수적 회로가 작동 될 때마다, 항상 주의하고 성찰하는 태도도 잊지 않아야겠다. 그러한 사고방식에서 멀어지는 삶을 살고자 결심하게 된 것. 그것이 <미스틱 리버>가 내게 준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