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 '사회의 쓴맛'에 감춰진 또 다른 얼굴
군인 신분을 반납하고 막 대학에 복학했을 때의 일이다. 부모님 부담도 덜어드리고 용돈도 벌어볼 겸 아르바이트를 구하기로 결심했다. 때마침 아는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는 나보고 과외를 해볼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과외는 대학생들이 꿈꾸는 최고의 아르바이트다. 선배는 사정이 생겨 일을 그만두게 됐다며,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을 내가 대신 맡아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학생이 사는 곳은 부촌으로 소문 난 반포 2동에 있는 아파트였다.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아파트 단지로 들어서니 주차장에 즐비한 고급 외제차가 눈에 들어왔다. 그 날은 시범 과외가 있는 날이었고, 나는 선배를 따라 복도식 아파트의 입구를 거쳐 302호라고 써진 출입문에 다다랐다. 초인종을 눌렀고, 순해 보이는 인상의 학생이 어색하게 마중을 나왔다. 우리는 거실 옆 작은 응접실에 자리를 잡았고, 곧 과외가 시작됐다. 과목은 수학이었다. 아이는 중학교 2학년이었지만 진도는 벌써 3학년 과정이었다. 외고에 진학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사건이 발생한 건 과외가 끝난 뒤였다. 과외가 끝날 무렵 귀가한 학생의 어머니는 나에게 다가와 이름, 고향, 사는 동네, 학교, 전공 등 각종 신변에 대해 캐묻기 시작했다. 아마 ‘주3회에 45만원’짜리 과외 선생님으로서 손색이 없는 지 따져보는 절차였던 것 같다. 예상했던 대로, 그녀는 나를 탐탁치 않아했다. 그랬을 것이다. 그녀에겐 내가 제대로 된 검증 없이 빽으로 입사한 ‘낙하산 인사’처럼 보였을 테니. 이리저리 나를 훑어보던 그녀는 의심에 찬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인문계 전공자에게 수학 과외를 맡기는 게 염려되네요.” 그 말을 듣고선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모처럼 찾아 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고, 어떻게든 학생의 어머니를 설득하고 싶었다. 쓸데없는 말이 입에서 튀어나온 것도 그쯤이었다. “비록 인문계 출신이지만, 학생시절 수학 1등급을 놓쳐 본 적이 없습니다. 믿고 맡겨주세요” 그것은 절반의 거짓과 절반의 진실이 섞인 말이었다. 나는 1이라는 숫자와 거리가 먼 학생이었다. 하지만 가르치는 일이라면 자신 있었다.
나의 치기어린 발언이 몰고 온 후폭풍은 엄청났다. 학생의 어머니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곧이어 강압적이면서도 익숙한 손짓으로 아이를 방으로 들여보내더니, 나를 어두운 거실로 데려가 소파 위에 앉혔다. 우리들의 기나긴 대화는 그렇게 시작됐다. 아니, 그것은 ‘대화’라기 보단 ‘일방적인 훈계’에 가까웠다. 그녀는 ‘겸손의 미덕’도 모른 채 주제넘게 잘난 체를 했다며 나를 질타했고, 나는 주눅 든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스스로의 잘못을 되짚었다. 5년도 더 된 일이지만, 그녀가 했던 말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저도 이래봬도 직업이 ‘의사’고, 제 남편은 ‘대학 교수’예요. 결코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라고요. 그런데 학생은 뭐 그리 대단한 인간이라고 자랑을 해요?” 50분 넘게 이어지던 대화가 끝나고, 그녀는 나를 문 밖으로 배웅할 때 까지 “똑바로 살라”며 가르침을 설파했다. 나의 고용 여부는 좀 더 고민한 뒤에 결정하겠다고 했다. 나는 거듭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고, 그녀는 자신이 꼭 나쁜 사람이 된 것 같다며 핀잔을 주고선 문을 거칠게 닫았다. 기나긴 하루의 끝이었다.
그 날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창가에 앉아 우울한 마음을 달랬다. 사회의 쓴 맛을 경험했다고 한탄하며 늦은 밤까지 친구들과 술을 마신 기억도 난다. 당시 나는 아직 세상 물정에 어두웠고, 그래서 모든 비난의 화살이 나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 실언으로 일을 그르친 스스로를 원망하며 앞으로의 삶 속에선 말조심을 실천할 것을 다짐했다. 억울한 생각도 들었다. 상대에게 신뢰감을 주기 위해 했던 나의 말은 어느 순간 '겸손'과 '예의'가 결여된 자화자찬으로 둔갑해 있었으니까. 자신감을 어필하는 나의 표현법에도 문제가 있었겠지만, 학생의 어머니가 나의 의도를 지나치게 곡해했다는 생각에 마음 한구석에서 원망의 감정이 솟구치기도 했다. 그리고 며칠 뒤 아이의 어머니로부터 연락이 왔다. 새로운 과외 선생님을 구했다고 했다. 그렇게 이 사건은 내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이 일이 다시 떠오른 건, 얼마 전 논란이 됐던 ‘파리바게뜨 불법파견’과 관련된 기사를 접하면서였다. 기사에 따르면 본사 소속 직원이 협력업체 소속 가맹점 제빵기사에게 수시로 욕설과 협박을 섞은 업무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특히 나의 눈을 사로잡았던 건 본사 직원과 제빵기사 사이에 오간 카카오톡 대화 내용이었다. “앞으로 똑바로 해”라는 기사 속 문장을 읽자마자 나는 과거 나에게 비슷한 말을 했던 한 여성이 생각났다. 그녀는 나에게 “똑바로 살라”고 말했었다. 폭언과 욕설은 없었지만, 고압적인 말투와 손가락질로 나를 비난했었다. 그 때의 경험을 감히 파리바게뜨 소속 제빵기사가 겪어야 했던 ‘부당함’과 비교할 순 없을 것이다. 다만 이런 생각은 들었다. 5년 전 그 날, 내가 모든 잘못의 주인공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그녀 역시 비난받아야 마땅했다고.
당시 내가 말실수를 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에게 나를 질책할 권리가 있었던 것일까? 그녀와 난 일면식도 없었는데 말이다. 내가 과외교사로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거절 의사를 밝히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굳이 그녀는 나의 잘못된 ‘언행’을 문제 삼고 ‘똑바로 살라’며 50분 간 분노 섞인 훈계를 했다. 그녀는 무엇을 원했던 것일까. 나의 진심어린 반성과 사죄를 받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자신은 의사정도 되니 대단할 것 없어 보이는 대학생에게 무슨 말이든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것도 아니면, 고용인으로서 지닌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업무와 관련 없는 ‘인격적 가르침’까지 예비 피고용인에게 전해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일까. 어느 쪽이 됐든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녀 역시 ‘겸손의 미덕’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는 것. 더불어 지나간 과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그 날 내가 경험했던 일은 한낱 ‘냉혹한 사회의 쓴 맛’을 넘어, 우리 사회에서 사라져야할 ‘갑질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