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도 여전히 고통스럽다. 그저께도 펑펑 울다가, 말 그대로 발악하다 잠들었다. 이 슬픔, 그리움, 헤어짐, 버림받은 고통, 분노, 의존하고 싶은 마음, 후회 등이 한데 엉킨 상태에 휩싸이는데, 그럴 때마다 ‘이제는 좀 지나가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 내가 있다. 동시에 ‘전화하면 안돼!’ 하며 정신줄을 꼭 붙드는 나도 있다. 그렇게 저항하고, 버티고, 또 무너지고…
8월 중순 이후로 얼굴 한 번 못 본 전남편. 하지만 15년을 함께한 시간이란 건, 이별의 감각을 날마다 예리하게 만든다. ‘이만큼 울었으면 됐잖아’ 해도 늘 예상은 빗나가고, 완전히 바닥까지 떨어져야만 끝을 보는 내가 있다. 그런 내가 제법 고통스럽다.
예전의 고통이 사회적 기준(대학, 취업, 결혼 등)을 충족하지 못했을 때의 무채색이라면, 지금의 고통은 총천연색이다. 유산이라는 사건조차도 그 안에서 입체적으로 보인다. 예전엔 ‘아이를 잃었으니까 당연히 아프다’는 통념에 나를 끼워 맞췄다면, 지금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아이를 원하지 않는 마음도 있었어. 엄마에게 재물로 바치고 싶지 않았어. 전남편의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고, 나처럼 클까봐, 아니면 내가 엄마처럼 될까봐 두려웠어.”
그래, 이제는 사건을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단순히 ‘내 탓이야’라는 죄책감이 아니라, 그 마음의 배경과 구조를 이해하게 되었다.
아이가 있는 가정, 평범하고 안정적인 삶이란 것이 얼마나 환상인지 알면서도, 가끔씩 상실감은 밀려온다. “나도 저런 삶을 가질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어도, 이제는 안다. 이 고통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안희연만의, 나만의 고통이다. 그래서 다채롭고, 나만의 색이 있다. 그 다채로운 고통 속에서 나는 “이제야 제대로 살고 있구나” 하고 느낀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며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을 만났다. 그 책을 통해 ‘배운다’는 것이 무엇인지 새롭게 이해했다.
배운다는 것은 정답을 얻는 게 아니라, 삶 속에서 어떤 사건과 기호를 만나는 것. 들뢰즈는 말한다.
“배운다는 것은 기호를 해석해가는 과정이며, 사물과의 마주침이 우리에게 사유를 강요할 때 비로소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
진리는 준비된 사람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마주친 어떤 사건—그 폭력적인 마주침 속에서 드러난다.
나에게 그 마주침은, 남편이 내 부모를 찾아가 “나는 받으면서 살 거야”라고 말한 순간이었다. 아, 저 사람은 내 편이 아니구나. 내 부모의 편이었구나. 나는 그의 ‘아내’가 아니라, 하나의 ‘장치’였던 거구나. 그 모든 것을 본 순간, 세계가 무너졌다.
하지만 바로 그 마주침이 나를 진실로 끌고 갔다. 이후의 선택들—이혼, 이사, 취업, 재무설계, 글쓰기—모두 그 진실을 보고 난 내가 능동적으로 해낸 일이었다.
그토록 고통스럽고 불안했던 내가, 지금은 조금씩 ‘나에 대한 신뢰’를 만들어가고 있다. 물론 삶은 여전히 고통스럽고, 예기치 못한 일들로 가득할 테지만… 이제는 안다. 나는 바닥까지 떨어지면, 어떻게든 다시 올라올 힘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게 어떤 방식이든, 나만의 걸음으로 살 수 있다는 걸. 이 고통들이 나를 무너뜨리지 않고, 오히려 나를 더 선명하게 만들어줄 거라는 걸. 그러니 지금의 고통도 받아들일 수 있다.
아, 나는 배워가고 있다.
내 삶에서 진짜 배움이 일어나는 중이다.
이것이야말로, 잃어버린 나의 의미 해석 능력의 귀환이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내 고통을, 나의 색으로 살아낸다.
이 고통은 나를 흔들지만, 동시에 나를 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