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유산 _ 그 과정과 후기
2019년 10월 2일 수요일 퇴근하는 남편에게 ‘임신테스트기’를 사오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나는 얼마나 임신에 대한 기대가 없었던지 그날 밤 은창이 손에 있는 임테기는 본체만체 했다. 임테기보단 은창이 손에 있던 안주인 회에 더 눈길이 갔다. 다음날이 쉬는 날(개천절)인지라 우리 둘은 연어회에 화이트와인을 마셨다. 나는 술이 부족하다며 집에 있던 싸구려 레드와인까지 따 한 병을 다 비웠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생리할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라는 마음으로 임신테스트기에 쪼르르 내 소변을 흘려보냈는데, 그 막대기에 태어나 처음보는 두 줄이 떴다!!! 나는 화장실에서 “으아악” 이라며 소리를 질렀고, 은창이는 무슨 일이라도 난 듯 놀라 헐레벌떡 뛰어왔다.
분명 ‘임신’이라는 두 줄이 떴는데도 나와 남편은 믿을 수가 없었다. 우리 둘은 ‘진짜?’ 와 ‘설마...’ 하는 마음을 품은채로 집을 나와 근처 약국마다 들려 임신테스트기를 3-4개를 사왔다.
결과는 모두 양성반응! 그렇게 믿기 힘든 며칠을 보내고, 다가오는 토요일 신랑과 동네에 있는 산부인과에 가서 초음파를 보았다. 그리고 정말 나의 몸에는 아기집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 시커먼 초음파 사진을 보고 몇 번이나 믿을 수가 없어,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나는 아직 너무 임신 극 초반이기도 하고 조심스러운 마음이 커 부모님을 제외하곤 임신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은창이는 회사사람은 물론이요, 본인이 속한 축구팀 단톡에도 ’와이프 임신해서 앞으로 축구 못나간다.’며 그렇게 설레발을 쳤다.
임신을 하면 축복이라며 마냥 기쁠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먼저, 깨비가 다리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내가 임신해서 재활까지 잘 시켜줄 수 있을까? ‘아이가 태어나면 깨비랑 잘 지낼 수 있을까?’ ‘우리 집은 왜이렇게 좁지?’ ‘아가가 이렇게 좁은 집에서 잘 클 수 있을까?’ ‘학교에는 언제 그만둔다고 이야기하지?’ ‘초반에 유산이 흔하다는데 어떻게 막을 수 있지?’ 등 돈걱정, 강아지걱정, 출산걱정 등 참 낳은 걱정 속에서 지냈다.
그렇게 혼란 속에서 일주일을 보내고, 6주차 평일에 혼자 병원에 갔는데, 아이는 엄마의 걱정과는 달리 잘 커주어서 나는 아이 심장소리라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아이가 잘 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드디어 안심할 수 있었다.
’그래, 심장소리까지 들었으니, 이제 안심해도 되겠지’. ‘아직 9달 정도 시간이 있으니까 그 때까지 아이를 맞을 준비를 잘 해보자.’라며 나를 다독였다.
아이의 태명도 라이온킹을 보고 감명을 받아 ’심바’라고 대충 지은 것에서 ’하느님의 선물’을 줄여 ‘하선’이로 바꿨다. 태교책도 사고, 클래식음악도 들으며, 내가 정말 임신이구나 라며 즐겨하던 욕도 끊고 몸가짐을 바르게 했다.6주차에 아이 심장소리를 들으니 병원에서 임신확인증을 발급해주었다. 이를 들고 은행에 가니, 아이맘카드를 발급해주었고 그 속엔 60만원이란 지원금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7-8주가 되던 주말 신랑에게 아이 심장소리를 들려주겠다며 자랑스럽게 이 아이맘카드를 들고 병원에 갔다. 하지만 우리 하선이는 모든 것이 멈춘채로 내 안에 있었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드디어 결혼 4년만에 나도 엄마가 되는구나, 하나씩 차분히 준비해보자 라며 임신사실을 받아들이고 안심했을 때, 그렇게 하선이는 떠나버렸다. 의사선생님은 계류유산은 원인이 없으니 절대 엄마 탓 하지 마시고 어서 털어버리라고 했지만 나는 그 뒤로도 ‘아 내가 혹시 그 때 이중주차 된 차를 밀 때 배에 힘을 줘서 그런가’, ‘학교에서 수업할 때 매일 서 있어서 그런가’ 라며 과거를 되짚어가며 괴로워 했다.
의사선생님은 이런 경우 소파수술을 통해 죽은 아이를 나의 자궁에서 꺼내는 조치가 필요하다며, 예약을 잡고 가라고 이야기 했는데 그 당시 나는 정신이 빠져.. ‘조금 기다려보면 아이가 다시 살 수도 있지 않을까요?’ 라며 질문했던 기억이 난다.
오히려 유산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집에 온 날은 그 동안 조심한다며 못했던 탕목욕도 하고, 남편과 삼겹살에 맥주도 마시며 ‘그래, 원래 이게 내 삶이지.’ 라며 씩씩하게 굴었던 생각이 난다.
그렇게 또 믿기 힘든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 오전.
나는 팔다리가 묶인채로 태아와 자궁벽을 긁어내는 소파수술을 받고 회복실에 들어와 걱정하는 엄마를 붙잡고 펑펑 울었다.
“엄마, 우리 하선이도 아팠으면 어떻게 하지?”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정부에서 준 임신축하금은 나의 유산수술과 회복용 영양제값으로 다 소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