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우리는 남남이 되었다.

by Tess

작년 8월, 법원에서 이혼을 마치고 갓 ‘전남편’과 ‘전부인’이 된 우리는 말없이 함께 지하철을 탔다. 그는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는 순간까지도 “부모님한테 잘해. 이혼하고 나면 부모님이랑 같이 사는 건 어때?”라고 말했다. 14년의 시간을 정리하면서, 그는 끝까지 나를 보지 않았고, 나의 부모를 바라보았다.


황당해하면서 앉아있는데 그는 나에게. “힘들면… 전화해.” 라고 말했다. 얼마나 황당하던지!

'이 사람, 아직도 우리가 어떤 사이인지 모르는구나. 내 감정과 결정을 가볍게 보고 있구나. 내가 언젠가 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구나'

‘전화해’란 말은 결국 당신과 부모의 말을 잘 듣는 ‘희연’으로 돌아오라는 뜻이구나. 나는 분노했고, 그 분노 덕분에 정말 많은 걸 해냈다. 취업도, 이사도, 자립도. 에너지 뿜뿜하면서...


그리고 이혼한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문득, 그날의 그 말이 다시 떠올랐다. “힘들면… 전화해.” 이번에는 그 말을 생각하며 울지 않았다. 대신, 내가 전남편에게 갖고 있던 환상이,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오만이 서서히 걷히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진 정말 울기만 했다. 너무 울어서, ‘내가 심심한 건가? 눈물에 중독된 건가?’ 싶어 스스로를 관찰하기도 했다. 이 신체적 고통도 자극이자 쾌락으로 느껴지는 건 아닐까? 물론, 그런 분석조차 되지 않는 날은 그냥 엉엉 우는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끈질기게, 이별, 고통, 단절감, 그리움, 상실 등을 다시 보려고 애썼다.


“우린 정말 특별한 사이였어.” “너 같은 사람은 없을 거야.” “당신이 나한테 정말 잘해줬었지.” “우린 예쁜 부부였어.” 이런 문장들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그게 나의 좁은 시야에서 비롯된 환상이었다는 걸 점점 알게 된다. 나는 그렇게 나를 속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22살에 당신을 만나 군대도 기다리고, 직장을 그만두고 러시아도 따라갔다. 그때 받은 스트레스로 자궁내막증 수술도 했고, 대학 사람들에게는 동거녀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당신과 꼭 잘 살아야만 했다.


우리는 ‘정말 잘 사는 커플’이어야 했고, ‘본보기가 되는 부부’여야만 했다. 그게 내가 겪은 고통을 보상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다. 내가 그렇게 임신과 아이에 집착했던 것도 ‘완벽한 가정’, ‘남부러울 것 없는 모습’이라는 상을 완성해야 내 인생의 불행이 덜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모순된 욕망이었나. 완벽해 보이기 위해 아이를 원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우리가 얼마나 fucked up 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데, 나는 그걸 몰랐다. 아니, 안 봤다.


나는 스스로의 눈을 가리고, 보고 싶은 것만 보며 살았다. 진실을 왜곡하면서, 열심히, 정말 열심히 그렇게 살았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건 단순히 ‘환상’이라는 단어로도 모자란다. 그건 치밀하게 구성된, 너무 오랫동안 살아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던 하나의 세계였다. 그 구도 안에 있을 땐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맞는 것처럼, 옳은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러니까… 너무 자책하지 말자 희연.


지금 돌이켜보면, 그 세계는 예쁘고 이상적인 부부가 아니라 내 부모의 경제력에 기대어 소꿉놀이하던 두 어린아이였다. 우리는 남매처럼 관계 맺으며 서로를 억압하고 통제했고, 부모의 사랑과 지원을 받기 위해 경쟁했다. 그 구도 안에서, 타고난 성별에서 이미 밀린 나는 ‘이상적인 아내’라는 역할에 충실하려 했고 그래서 임신과 출산에 집착했다.


그 역할과 구도에서 빠져나오고 나니 이제야 보인다. 내가 어떤 위치에서 얼마나 큰 답답함과 외로움, 불안과 고통을 겪었는지. 그리고 지금, 나는 마침내 그 세계 밖에 있다

“내가 만든 세계에서 드디어 빠져나왔다. 이제, 내 욕망으로 나를 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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