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세우는 일, 나를 지키는 일

by Tess

점심시간이었다. 흑화한 채로 밥을 먹고 있는데, 체육 선생이 카톡을 했다. “힘들어 보여요.”

맞다. 요즘은 일도 많고 마음도 무겁다. 게이 파트너도, 직장에서 가장 친한 선생도 멘탈 브레이크다운으로 출근을 못하고 있다. 둘 다 소중한 사람인데, 그런 사람들을 잃을까 봐, 잃은 것 같은 감각에 휩싸여 마음이 무겁다. 나는 대강까지 하느라 미치겠고, 지난 주엔 공개수업 2개, 이번 주엔 수요일과 목요일 모두 수업 6개에 금요일엔 또 공개수업, 거기에 시험감독까지.


그런 상황이니 최대한 말을 아끼며, 에너지를 아끼며, 조용히 밥을 먹고 있었던 거다.

그런데 체육이 말을 걸어왔다. 그래서 밥을 먹으면서 톡을 했는데, 그 인간이 갑자기, 뜬금없이 이딴 말을 하는 거다.

“야하다, 너 자체가.”


그 뒤로도 계속 그 말을 반복했다. 나만 보면 야하다고.


…씨발.

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말이 어제 오후부터 나를 괴롭혔다. 기분이 더러워졌다.

뭐지?

‘야하다’는 말이 칭찬도 아닌데,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하는 걸까? 그것도 직장 동료에게, 그것도 교사라는 사람이.

처음 같이 밥 먹을 때부터 “원나잇 안 해봤겠네” 이러더니, 결국 또 선을 넘었다.

그럼 뭐, 너는 안녕이지.


이혼하고 혼자 산다니까 쉬워보였나?

아니, 설사 쉬워 보이고, 야해 보인다 해도 그런 말을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잖아?

그게 뭐가 어쨌다고, 네가 입에 담아도 되는 말은 아니잖아?


학교에서 원어민 샘들이랑 체육을 씹고 또 씹어도 기분이 안 풀려서, 결국 자기 전에 톡을 보냈다.

불쾌하다고. 그런 말 듣기 불편하다고. 선을 넘은 거 같아서 말하는 거라고.

사실 그 메시지를 보내는 것도 너무 어려웠다.

한 번도, 그런 식의 말에 내가 “불쾌하다”고 말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성적 대상화된 말들. 대학 다닐 때도 들었다.

“오빠들이 잘해줄게. 잘 데 없으면 여기로 와.”

“나랑 하면 되지.”

“넌 볼 게 없어. 만질 게 없어.”


그런 말들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웃어넘겼던 내가, 만 서른일곱이 되어서야, 그것도 카톡으로 처음 불쾌하다고 말한 거다.


그리고 난, 그 일을 요즘 연락하는 썸남들한테 얘기했다.

하나같이 난리가 났다.

“전화해줄까?”

“찾아가야겠다.”

“맞아야 정신 차리지.”


나는 투명하니까, 솔직하게 얘기해야겠다.

사실 그들에게 ‘성희롱 당했어!’라고 말했던 것에는, 고발과 분노만 있던 건 아니었다.

‘나는 여자다. 나는 이렇게 보이는 여자다.’

그 말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즉, 너(체육) 말고도 나를 욕망하는 남자가 있다는 걸 알리고 싶은 마음.

나는 성희롱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성적 존재로서의 나 자신을 확인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런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욕망을 품은 나를, 이제 부끄러워하지 않고 인정한다.


그리고 오늘 아침.

파트너십을 맺고 있는 남자애가 자꾸 이러는 거다.

“체육이 또 뭐라 하면 나한테 얘기해.”

그 말은 공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소유권을 주장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내가 딱 잘랐다.


“내가 알아서 할게, 내가 할 수 있어 �

공감해주고 지지해주는 건 고맙지만, 거기까지!”


체육이나, 섹파인 너나, 내 몸을 욕망하는 건 마찬가지다.

질이 다를 뿐이지.

체육은 불쾌하게, 넌 착하게.

하지만 내 몸은 누구의 것도 아니고, 내가 결정한다.


이게 다행이다.

이제는 그걸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다는 것.


경계를 세우고 있다.

“너는 이 경계 안으로 들어오지 마.”

말로, 행동으로, 내 삶에 선을 긋고 있다.


나는 나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다.

주체적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다.

지금 그걸 증명하는 중이다.


올해 초만 해도 나는,

“전남편, 네가 사라져서 내가 이런 일을 겪잖아…”

울면서, 억울해하면서, 원망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이제는,

“하… 씨발. 별의별 개지랄을 다 보네.”

이렇게 말하고,

해야 할 말을 하고,

들어야 할 말을 듣고 있다.


많이 컸다.

더 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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