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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기 반장 Sep 17. 2024

구름이 된 하니

'아들'로 살아가는 빠들남

“그냥 콩! 쥐어박았는데 그대로 캑! 쓰러지더라고요.”


순간 식초 한 사발을 들이킨 듯 시신경이 타들어 가는 느낌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한창 무르익던 상견례 자리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남영동 대공분실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왜 하필 그때 그런 말을 꺼냈을까? 심지어 술 한잔도 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말이다.     


외아들로 자란 나는 늘 외로웠다. 초등학생 때 엄마를 끈질기게 졸라 반려견 한 마리를 입양했다. 하얀 토이 푸들의 이름은 ‘하니’였다. 부모님의 냉전으로 북극 같던 우리 집에 벚꽃처럼 찾아온 하니가 고마웠다. 내 팔을 베개 삼아 잠들 때까지 하니는 하루종일 그림자처럼 나를 따랐다. 반려견 입양을 반대했던 엄마도 내게 귀여운 동생이 생겼다며 미소지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달랐다. 내가 하니를 사랑할수록 아버지는 하니를 증오했다. 급기야 아버지는 하니를 때리기까지 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같은 아버지를 보며 나는 혼란스러웠다. 나를 끔찍이 아껴주는 아버지가 어떻게 내 동생한테는 끔찍한 짓을 할 수 있을까? 잘못하다간 나도 개같이 얻어맞는 건 아닐까? 하니가 맞으면 내 마음도 함께 멍들었다. 아버지 눈치를 살피다 내가 먼저 하니를 때리기도 했다. 어차피 맞아야 한다면 아버지보다는 내 손이 낫겠다 싶었다. 미안함에 심장이 아렸다.      


아버지는 기어이 우리 형제를 격리했다. 침대에서 함께 자지 못하도록 하니를 거실에 목줄로 묶어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내가 일어나면 목줄이 마구 날뛰는 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거실에 나가보니 아버지와 하니가 없었다. 놀라서 엄마에게 묻자 더 놀라운 답변이 돌아왔다.


“아빠가 웬일인지 하니를 데리고 산책하러 가는 것 같더라. 이제 좀 예뻐하려나 봐. 걱정하지 말고 학교 잘 다녀와.”


믿기 힘들었지만, 믿고 싶은 말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하니가 보고 싶어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꼬리를 흔들며 미친 듯이 달려오는 하니를 상상하며 문을 열었다. 그런데 아무도 없었다. 현관에 멀뚱히 서 있으니 적막이 미친 듯이 내게 달려들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엄마가 집에 오기만을 기다렸다. 하니가 어디 있냐며 닦달하는 내게 엄마는 어렵사리 입을 뗐다.


“현중아, 놀라지 말고 잘 들어. 새벽에 하니가 갑자기 움직이질 않는 거야. 네가 알면 난리가 날까 봐 학교 갈 때까지 베란다에 숨겨놨었어. 병원에 데리고 갔더니 뭘 잘못 먹어서 장이 꼬인 거라고 하더라. 엄마가 묻어주고 왔어.”     


1996년 6월 25일이었다. 전생을 믿지 않지만, 그땐 하니가 전생에 6.25 전쟁 참전 용사였나 싶었다. 엄마는 아침에 믿기 힘들어도 믿고 싶은 말로 나를 속였다. 그런데 밤에는 믿고 싶지 않은 말로 믿기 힘든 나를 달랬다. 한번 시작된 눈물 댐 방류는 몇 시간이고 계속되었다. 엄마는 말이 없었다. 정신이 돌아올 때쯤 나는 다시 정신 나간 소리를 했다.


“엄마, 나 오늘 술 마시면 안 돼?”


엄마 옆에서 즐겨보던 드라마 때문이었을까. 초등학교 6학년 입에서 나와서는 안 되는 말이 튀어나왔다. 교사였던 엄마는 늘 엄격했지만, 그날만큼은 말없이 맥주를 사주었다. 어른들은 무슨 맛으로 이딴 액체를 마시는지 속으로 욕하면서 꾸역꾸역 한 캔을 비웠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아침이었다. 여전히 집 안은 고요했다. 하니를 잃었는데 세상은 잔인하리만치 침착했다. 날은 또 왜 그렇게 맑던지. 새파란 하늘에 새하얀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 있었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언제나 느긋해 보였던 구름이 사실은 조급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아차렸다. 어디론가 달려가는 구름들 사이로 저 멀리서 구름 하나가 유독 미친 듯이 달려왔다. 하니였다. 두 눈을 의심했지만, 분명 하니였다. 갑자기 두 눈에 차오르는 뜨거움에 ‘하니 구름’이 일렁였다. 더럽게 아름다운 날이었다.     

 

‘아아, 장이 꼬여서 죽은 하니가 하늘로 가서 구름이 되었구나.’


상견례 자리에서 반려견 이야기만 안 나왔어도 지금까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을 거다. 아버지는 내게 못 가게 하려고 묶어둔 하니가 밤새 낑낑대며 내게 가려는 모습이 얄미웠단다. 순간 꿀밤을 콩! 쥐어박았는데 급소를 맞았는지 캑! 죽어버렸단다. 아버지는 종류와 크기에 상관없이 세상 모든 개를 똥개로 인식하고 있었다. 똥개가 아들에게 병균이라도 옮길까 봐 애가 탔다고 했다. 상견례 자리만 아니었다면, 하늘에서 지켜볼 엄마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다면 과연 나는 그때 아버지에게 어떤 말을 쏟아냈을까?     


상견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맹수처럼 포효했다. 왜 나는 단 한 번도 저항하지 못했을까? 왜 아버지는 가장 중요한 날에 가장 실없는 말을 내뱉어 망신을 줄까? 왜 엄마는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 아버지의 만행을 변호해 준 걸까? 20년 전에 방류했던 눈물 댐이 다시 터져버렸다. 나는 그날도 맥주를 마셨다. 20년 전에는 엄마가 곁에 있었지만, 그날은 아내가 곁에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내 모습에 아내는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아내에게 한참을 쏟아내자 내 안의 의문이 하나씩 정리됐다. 나는 부모의 냉전 속에서 눈치를 보며 자랐기에 ‘착한아이 콤플렉스’가 있었다. 아버지는 엄밀한 할아버지로 인해 ‘아버지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엄마는 늘 아들의 미래를 염려했다. 엄마는 내가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길 바랐다. 아버지는 사도세자처럼 평생 할아버지라는 이름의 뒤주에 갇혀 발버둥 치며 연명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자신의 감정을 죽이며 부자 관계를 살리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 여긴 듯했다.     


삼십 대 중반이 되어서야 나는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달려들었다. 엄마가 내게 어떤 존재였는지, 하니가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아버지 귀에다 낱낱이 때려 박았다. 시간이 흘러 아버지는 진심으로 미안하다며 용서를 구했다. 모든 게 결핍과 과잉, 무지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엄마의 삶을 통해 나는 성경에서 말하는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는 뜻이 무엇인지 이해했다. 엄마의 거대한 사랑을 떠올리면 언제나 나는 엄마의 사명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엄마의 희생으로 나는 아버지를 미워할 수도 포기할 수도 없게 되었다. 1996년 6월 25일에 마셨던 괴상한 맥주 맛이 기억난다. 엄마와 맥주 한잔하고 싶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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