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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기 반장 Sep 13. 2024

아내를 부탁해

'남편'으로 살아가는 빠들남

아내는 연구대상이다. 결혼 9년 차, 함께 살아보니 아내에 관한 논문 한 편, 책 한 권은 족히 나올 것 같다. 학창 시절 늘 2학기에 반장이 되곤 했던 나는 반전 매력의 소유자가 확실하지만, 아내 앞에서는 명함도 못 내민다. 첫눈에 아내가 얼마나 단아하고 여성스러워 보였으면 교제한 지 1개월 만에 내가 청혼을 했고 4개월 만에 결혼식을 올렸겠는가. 아내의 외향에 철저히 속은 나는 세상 털털한 아내의 내향에 적응하느라 혼돈의 신혼을 보냈다.      


며칠 전 지인이 반려견을 처음으로 조카에게 맡겼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반려견을 얼마나 아꼈던지 그는 여행을 다녀오는 1주일간 조카더러 그의 집에 머물며 반려견을 돌보게 했단다. 그러면서 조카에게 ‘반려견을 돌볼 때 주의 사항’을 작성해서 건넸는데 항목이 무려 60개나 되었단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에서 여주인공 그녀를 사랑했던 남주인공 견우가 그녀의 소개팅남에게 ‘그녀를 대할 때 주의할 점 10가지’를 담담하게 읊던 장면과 그때 흘러나왔던 배경음악인 신승훈의 ‘I believe’가 머릿속에 자동 재생되었다.       


과연 연구대상인 아내를 대할 때 주의할 점 10가지는 무엇일까? 문득 호기심과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노트북을 열었다. 좋아, 일단 신승훈의 노래 ‘I believe’부터 틀고. 아니, 내친김에 영화 <엽기적인 그녀>도 다시 한번 봐야겠다. 지금까지 열 번은 넘게 본 것 같은데 그래도 그 느낌을 살려야 하니까. 엽기적인 그녀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아내를 묘사하는데 그 정도 정성을 쏟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제 아내를 대할 때 다음 10가지를 주의해주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하나, 아내에게 여자다운 거 요구하지 마세요. 세 자매 중 맞이인 아내는 씩씩해서 가구 조립도 잘하고 운전도 터프하게 잘해요. 특히 운전할 때 아내의 후진하는 모습에 지금도 반하곤 해요. 남편한테 내가 책임질 테니 돈 걱정하지마!”라고 말할 줄도 아는 여장부이기도 해요. (하지만 걱정돼요. 겁이 많고 세심하며 여린 여인이기도 하니까요. 아내는 전원주택에 살 때 도둑이 들까 봐 안방에 호신용으로 망치를 놔둔 적도 있고 매미 한 마리에도 독수리를 만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기도 해요. 작은 것에 감동하고 또 작은 것에 상처받는 천생 여자이니 소중히 대해주세요.)     


, 아내의 취미를 존중해주세요. 아내는 맥주를 좋아해요. 그것도 너무 차갑지 않은, 냉장고에서 꺼낸 지 15분 정도 된 맥주여야 해요. 중국에 있을 때 상온의 맥주를 즐기던 습관이 남아있어서 그래요. (그러나 단순히 술을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맥주에는 깊은 사연이 있어요. 사업을 하시는 부모님을 돕기 위해 많은 걸 포기하고 중국으로 건너간 아내가 날마다 마셨던 눈물 젖은 맥주. 외로웠던 그 시절 유일한 친구였기에 맥주를 찾는 걸지도 몰라요. 이게 감동 포인트인데 옆에서 아내가 그냥 맛있어서 마신 것뿐이라며 초를 치네요.)      


, 질문이 많아도 친절히 다 답변해주세요. 기본적으로 궁금한 게 많은 사람이에요. 그냥 호기심 천국이라고 생각하세요. 특히 스포츠 경기를 볼 때 아내의 질문이 중계진의 멘트보다 많더라도 당황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아내는 지금 관심을 표현하는 중이니까요. 관심이 가는 사람에게만 마음껏 질문하며 사랑을 확인하고 또 전달해요. 아무한테나 묻지 않는다는 거죠. 또 지나치게 궁금한 게 많다는 것은 그만큼 지나치게 관심이 많다는 뜻이니까 아내의 질문을 환대해주세요. 물론 저도 힘들긴 해요.)     


, 오글거리고 달달한 표현은 기대하지 마세요. 제가 볼 때 아내의 MBTI는 분명 T인데 F라고 우기거든요. 아내는 영화를 볼 때도 반드시 총이 나오고 피가 튀는 걸 좋아해요. 멜로물을 함께 보고 싶다면 깔끔하게 포기하고 혼자 보세요. (그렇다고 아내가 내면의 달큰함까지 싫어하는 건 아니에요. 굳이 말하지 않아도 행동 하나, 눈빛 하나로 전해지는 깊은 진심을 선호하는 거죠. 아내는 오글거리고 달달한 표현은 못 하지만, 제가 아프면 자기가 더 아파하며 손을 꼬옥 잡아주거든요. 티는 별로 안 나도 분명 속 깊은 F가 확실해요.)    

    

다섯, 불규칙한 식욕을 존중해주세요. 평상시 아내는 식욕이 별로 없어요. 하지만 한 달에 한 번 호르몬의 변화가 있을 때 푸드 파이터로 변신한답니다. 당황하지 마시고 그 주기에 맞춰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먹게 해주세요. 오죽하면 제가 피의 여신이라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겠어요. (그래도 인스턴트나 배달 음식보다는 건강한 음식을 먹도록 도와주세요. 그래야 호르몬도 안정되고 몸도 마음도 빠르게 회복될 수 있거든요. 결국 자기 입맛대로 먹을 게 뻔하지만, 기왕이면 패스트푸드보다는 슬로푸드를 먹게끔 도와주세요.)      


여섯, 식욕에 이어서 아내의 편식은 무죄에요. 소스를 좋아하는 아내는 케첩을 먹기 위해 감자튀김을 시키고 초장을 먹기 위해 회를 주문해요. 비슷한 맥락으로 케첩이 잔뜩 들어간 피자나 햄버거, 초장을 실컷 먹을 수 있는 물회도 좋아해요. 고기류는 육회와 차돌박이, 대패 삼겹살 등 씹기 편한 것을 선호하니 고기는 얇게 잘라주세요. (그나마 골고루 잘 먹는 저와 살면서 많이 좋아졌어요. 안 먹던 생연어, 오리고기, 자몽 등을 입에 대기 시작했거든요. 아내의 편식을 존중하되 골고루 먹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아내가 건강하고 예쁘게 살길 바라니까요.)      


일곱, 말할 때 잔 실수도 매력으로 봐주세요. 아내는 대충 뜻만 통하면 자기 마음대로 단어를 말하는 경향이 있어요. 배우 우피 골드버그그 여자 있잖아, 우드골피!”라고 하거나 휴무를 쉬는 날과 합쳐서 오빠, 오늘 이마트 쉬무인가 봐!”라고 하거든요. 당황하지 마세요. (아내의 매력이자 가족들의 웃음 버튼이거든요. 얼마 전엔 어디냐는 처제의 메시지에 아내가 금왕왕 돈가스라고 답해 처제를 자지러지게 만들었어요. 정답은 금화왕 돈가스이거든요. 늘 우리는 실수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아내는 실수조차 자유로움으로 승화시키는 사람이에요. 저는 아내를 보며 자유로움을 느낀답니다.)      


여덟, 갑자기 길 가다가 춤추더라도 침착하세요. 마트에서 장 볼 때, 거리를 걸을 때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오면 아내의 몸이 먼저 반응해요. 디스코를 추듯 양 집게손가락을 안테나처럼 바짝 세워 걸음마를 막 시작한 아기처럼 둥실둥실 바운스를 타는 것은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다는 것을 이해해주세요. (아내는 왕 소심한 트리플 A형인 듯 보이지만, 학창 시절에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춤도 추고 또래의 질투를 받을 정도로 인기도 있었다는 사실 아시나요? 나중에 아이들 독립시키고 나면 남편과 함께 커플 댄스를 배우고 싶다고 하는데 확실히 춤을 향한 열정이 있는 것 같아요. 운동할 땐 분명 몸치인데 신기할 따름이죠. 아내는 이렇게 여유를 아는 유연한 사람이에요.)     


아홉, 말투에 민감하기에 예쁘게 말해주세요. 아내는 거칠거나 싸늘한 말투에 상처를 많이 받아요. 그리고 허세가 담긴 말투에 경기를 일으켜요. 아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말을 예쁘게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주세요. (신혼 때 제가 세게 말했다가 아내를 앓아눕게 만든 적이 몇 번 있었어요. 그때마다 저는 전복죽을 정성껏 만들어 아내에게 갖다 바치며 용서를 빌었죠. 덕분에 요리 중 전복죽 하나만큼은 자신 있는데 전복죽 만들 일이 없게 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하겠죠. 아내에게 최대한 따듯하고 진실하며 아름답게 소통해주세요.)       


, 확고한 취향을 인정해 주세요. 아내는 절대로 사치하지 않아요. 하지만 한번 골랐다 하면 가장 비싸거나 가장 희귀한 것을 선택해요. 어릴 때 유복하게 자라서 보통 눈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저를 남편으로 고른 거겠죠. 후후.) 자잘한 것 여러 개 사주지 마시고 모아뒀다가 확실한 것 하나를 사주세요. 또 아내가 뭔가를 사야 할 때 여러 가지를 보여주며 하나만 골라 달라고 조를 거예요. 그럴 땐 정성껏 골라주고 그 즉시 내가 뭘 골랐는지 잊어버리세요. 아내는 분명 그걸 안 살 거거든요. (아내의 유니크한 취향만큼이나 아내는 유니크한 존재니까요.)


아내를 엽기적인 그녀로 만들 의도는 없었는데 쓰다 보니 범상치 않은 느낌이긴 하다. 나는 지난 15년간 오프라인과 온라인 커머스를 넘나들며 매출 1등을 찍어본 MD로서 보는 눈 하나는 기깔나다. 그런 내가 선택한 아내이니 얼마나 특별하고 값지겠는가. 나는 아내 이야기를 할 때면 자연스레 눈이 반짝이며 입꼬리가 올라간다. 아내는 나랑 가장 친밀한 친구이다. 주변에서는 우리 부부가 그저 바보같이 행복하게 사는 줄 알지만, 여느 부부처럼 지지고 볶으며 살아왔다. 다만 조금 특별한 점이 있다면 ‘소통’과 ‘배려’가 아닐까 싶다.     

 

우리 부부는 시시콜콜 수다를 떨며 장난을 많이 친다. 며칠 전엔 꿈도 없고 현실에도 태연한 아내의 정체성을 내가 한 마디로 ‘현실에 눈감은 현실주의자’라고 정의하는 바람에 둘이서 빵 터져 배에 식스팩이 생기기 직전까지 웃었다. 부부간에 개그 코드가 통하고 깨알 같은 대화를 즐긴다는 건 분명 큰 복이다. 또한, 우리 부부는 결혼 전에 부부 계명을 세웠는데 ‘사랑은 상대의 조건이 아니라 나의 인격이다.’라는 항목 덕분에 서로 배려를 안 할 수 없게 되었다. 때론 너무 배려하다가 싸움이 나기도 한다.


혼자서 낄낄거리며 글을 쓰는 나를 보며 아내가 슬그머니 서재로 들어왔다. 아내를 잘 부탁한다며 작성한 십계명을 보여주자 웃음 버튼이 작동한 아내가 “오빠, 어디 가는 거야? 마지막이야?”라고 묻는다. 한창 웃던 내 마음속에 울컥하는 뭔가가 올라왔다. 사람 일은 어찌 될지 모르는데 만일 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I believe’를 틀어놓고 남은 가족들에게 아내를 잘 부탁한다고 말해야 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그때가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평생 나 자신에게 아내를 잘 부탁하고 싶다. 현중아, 지희를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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