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함께라면 육아 지옥도 천국이 된다
'아빠'로 살아가는 빠들남
직장 동료들과 점심 식사 후 카페에서 수다를 떨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오른쪽 허벅지가 간질거렸다. 진동하는 휴대전화를 꺼내 보니 아내였다. 밥 먹기 전에 통화했었는데? 무슨 일인가 싶었다.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응, 여보. 밥 먹었어?”
“응…. 그게…. 뭐라고 말해야 하지? 내가 임신테스트기를 종류별로 다 해봤는데….”
콩닥콩닥 가슴이 뛰었다. 과연 무슨 말을 할까 숨죽이고 기다렸다.
“4개 모두 두 줄이 나왔어. 임신인가 봐.”
“뭐라고? (2초 후) 축하해, 여보! 선강이한테 동생이 생겼네! 하하하!”
계획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계획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마침 교회에서 우리 부부와 1주일 차이로 먼저 첫째를 출산했던 부부가 얼마 전에 둘째 임신 소식을 전해 내심 부러워하고 있던 터였다. 외아들로 외롭게 자란 나는 아들에게 동생이 생기면 좋겠다 싶었다. 좀 더 욕심을 내자면 여동생으로.
아들은 키워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어른들의 말이 이제야 이해가 간다. 아버지도 나를 볼 때 하나뿐인 아들 키워놨더니 자기 아내와 자식밖에 모르는 놈이다 싶을 것이다. 주변에서도 성인이 된 아들과 살갑게 지내는 부모는 거의 보지 못했다. 하지만 딸과는 친밀하게 지내는 부모를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특히 모녀간에 자매처럼, 친구처럼 알콩달콩 재미있게 지내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딸이 있으면 아내는 물론 온 가족에게 큰 기쁨이 될 것 같았다.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내 표정을 보더니 동료들이 무슨 일 있냐고 물었다. 입 밖에 내기엔 조심스러운 시기였지만, 이미 얼굴로 모든 걸 말하고 있었기에 숨길 수 없었다. 동료들은 격하게 축하해 줬지만, 막상 아이 둘의 아빠가 된다고 생각하니 야릇했다. 카페에서 나와 다시 사무실로 향하는 길에 등 뒤로 내리쬐는 따사로운 햇살이 느껴졌다. 그날따라 눈앞에 드리운 그림자가 유독 짙어 보였다.
아내가 첫째를 임신했을 때 아내의 외할머니가 날마다 그렇게 고추를 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첫째는 정말 고추를 달고 태어났다. 교회 터줏대감인 외할머니는 옛날 분이라 무조건 아들을 원했고 우리의 둘째 임신 소식을 알면 또다시 같은 기도를 할 게 뻔했다. 아내도 나도 기왕이면 딸이길 바랐기에 이번엔 우리가 더 간절히 기도해야겠다 싶었다. 마침내 병원에서 성별을 알게 된 날, 기도 대결에서 머릿수로 밀어붙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과 딸, 모두 이루었도다! 양어깨가 무거워진 만큼 뭔가 든든해지는 기분이었다.
배가 불러오는 아내를 보며 아들을 임신했을 때와는 또 다른 점을 몇 가지 발견했다. 먼저 태동의 형태가 달랐다. 아들은 축구를 하듯 아내 배를 퉁퉁 짧게 차댔다면, 딸은 스트레칭을 하듯 쭈우우욱 밀어댔다. 그리고 아들은 입덧으로 아내를 실컷 고생시키고 난 후 평상시 안 먹던 칼국수를 자꾸 찾게 했었는데 딸은 먹는 거로 아내를 힘들게 하지는 않았다. 또 임신한 배 모양이 아들은 옆으로 퍼졌던 반면 딸은 앞으로 볼록하게 나온 것도 신기했다. 이토록 아들과는 다른 매력을 발산하는 공주님은 과연 어떤 모습일지 기대하며 출산을 손꼽아 기다렸다.
2020년 3월 18일, 드디어 둘째가 모습을 드러냈다. 첫째 때 자연주의 출산으로 아내가 17시간이나 진통하는 모습에 질리기도 했고 주변에 자연주의 출산이 가능한 병원도 사라졌기에 둘째는 자연분만을 택했다. 자연주의 출산은 의학적 개입을 지양하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아이를 낳는 방법이고 자연분만은 기본적인 의학 조치만 받고 수술은 하지 않는 방법이다. 첫째 때를 떠올리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는데 둘째는 진통 4시간 만에 생각보다 빨리 순산했다. (아내에게는 이 또한 긴 시간이었을 텐데. 여보, 정말 고생 많았어!) 아들은 태어날 때 태지가 거의 없고 얼굴이 조막만 해서 인형 같았다. 그런데 딸은 달랐다. 사진을 찍어 득녀 소식을 주변에 알려야 하는데 도무지 촬영 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다. 태지에 덮인 넓적하고 주름진 얼굴이 터프한 남자아이 같았다. 떡두꺼비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비주얼, 누가 봐도 나를 닮았다고 해야만 하는 얼굴이었다. 분명 딸이 맞는데 어떻게 하지?
출산의 기쁨도 잠시, 근심이 생겨났다. 나중에 딸의 원망을 듣지 않으려면 열심히 재테크해서 또 다른 아버지를 만나게 해줘야겠다 싶었다. 누군가에겐 두 명의 아버지, 원래 낳아준 아버지와 새 얼굴로 다시 태어나게 해 준 아버지가 있다고 하지 않던가. 출산 후 정신없는 가운데서도 아내 역시 딸의 얼굴을 확인하곤 나와 같은 마음이었노라고 고백했다. 신생아 사진에 여러 필터를 적용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최대한 공들여 수정한 사진과 함께 득녀 소식을 지인들에게 알렸다.
‘김평안(태명) 공주는 2020년 3월 18일 14:14에 3.04kg으로 건강하게 태어났습니다.’
첫째의 태명은 평강이, 이름은 선강이라고 지었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강한 자’라는 뜻이다. 둘째의 태명은 평안이, 이름은 예안이라고 지었다. ‘예수님 안에서 평안한 자’라는 뜻이다. 첫째와 둘째의 태명을 따서 우리 집 이름은 ‘평평당’이라고 지었다. ‘평강과 평안이 깃든 집’이라는 뜻이다. 아내는 ‘예안’이라는 이름이 예쁘다며 마음에 들어 했다. 이름만큼이나 얼굴도 예쁜 딸일 거라 생각했는데 마음속 평강과 평안은 어디로 가고 근심과 걱정이 몰려오는 것이더냐! (하지만 딸아, 엄마 아빠는 진심으로 예안이의 탄생을 기뻐하고 환영했단다. 오해 없길 바란다.)
장모님은 어쩌면 김 서방을 이렇게 쏙 빼닮았냐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형부와 판박이라며 처제들도 합세했다. 아들이 막 태어났을 때는 분명 다들 아내를 닮아서 예쁘다고 했었는데…. 만일 엄마가 계셨다면 뭐라고 했을까? 팔은 안으로 굽고 피는 물보다 진하며 가재는 게 편이라 엄마의 입장은 분명 달랐을 것이다. (신생아 때 내 사진을 찾아보니 아들은 나의 도플갱어가 확실했다.) 손주를 품에 안고 행복해하는 엄마의 모습을 볼 수 없어 서글펐지만, 아무튼 못 생김은 내 몫이고 예쁨은 아내 몫이었다. 딸아, 널 어쩌면 좋니? 골 때리는 딸내미의 얼굴을 보며 나도 모르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당시 코로나 19 누적 확진자가 전 세계 20만 명, 국내 8천 명을 돌파하던 시점이었다. 코로나 시국인 데다 양가 부모님에게 육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 나는 육아휴직을 썼다. 산후조리원에서는 남편의 출입까지도 엄격히 통제했다. 1주일간 남자팀, 여자팀으로 나뉘어 나는 아들과 집에서, 아내는 딸과 산후조리원에서 보냈다. 그때 집에서 찍었던 영상을 보면 토마토 스파게티를 입가에 잔뜩 묻혀서 마치 붉은 수염이 난 것 같은 아들한테 나는 ‘러시아 불곰 아저씨’라고 놀리기도 하고, 이불로 바이킹 그네를 만들어 아들을 깔깔거리게도 했으며, 침대에서 아들의 몸통을 회전시켜 더블 악셀, 트리플 악셀을 구사하는 피겨 선수로 만들기도 했다. 엄마와 떨어져 지내는 아들을 걱정하는 아내를 안심시키기 위해 날마다 한 편씩 찍어서 보냈던 증거물이었다.
하루는 길었지만, 1주일이 금방 지나갔고 드디어 아내와 딸내미가 집으로 오는 날이 되었다. 육아서와 전문가, 주변 육아 선배의 증언에 따르면 첫째가 둘째를 처음으로 만나는 순간이 가장 중요하단다. 첫째가 느낄 상실감은 흡사 왕위를 빼앗긴 왕의 마음이요, 바람난 배우자가 웬 아이 하나를 데리고 나타났을 때의 심정이란다. 동생을 맞이한다는 것이 이토록 충격적인 사건이라니! 아내와 나는 작전을 짰다. 먼저 아들의 환심을 살 장난감을 미리 사서 숨겨뒀다가 동생이 오빠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라며 깜짝 이벤트를 열고, 아빠가 동생을 안고 등장하여 아들에게 보여준 후 “이제 엄마가 동생을 안아봐도 될까?”라고 허락을 구하는 것이었다.
아들이 어린이집에 간 사이, 나는 아들이 환장하던 포클레인, 레미콘 등 공사장 장난감 세트를 사서 옷장에 숨겼다. 집에 온 아들에게 동생이 준비한(?) 선물을 주니 입이 귀에 걸렸고, 이때다 싶어 내가 얼른 딸내미를 안고 아들에게 보여주었다. 흔쾌히 엄마가 동생을 안아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작전은 대성공을 넘어 작은 기적까지 일으켰다. 아들이 얼마나 좋았으면 동생을 안고 우유를 먹이겠다고 하질 않나, 동생 이마에 뽀뽀를 하질 않나 질투는커녕 사랑이 흘러넘치는 모습이었다. 이 과정을 영상으로 촬영하던 막내 처제가 “우와, 진짜 행복한 가정이다!”라며 감탄을 연발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아들은 자신이 왕위를 빼앗겼다는 사실을, 배우자의 외도로 생긴 것만 같은 존재가 자신을 몹시 불편하게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곤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 발버둥 쳤다. 자연스레 둘째의 육아는 오롯이 내 몫이었다. 엄마의 얼굴을 오랜 시간 가까이해야 딸내미가 조금이라도 엄마를 닮아갈 텐데 나와 하루종일 붙어있으니 더욱 나를 닮아가는 것만 같았다. 얼굴로 웃기는 건 개그맨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달란트라고 생각했는데 우리 부녀를 보며 친구들도, 친구의 엄마까지도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어찌 됐든 웃음을 준다는 건 좋은 일이니 나 역시 즐거웠지만, 씁쓸함이 남았다. 나는 괜찮은데 우리 딸은….
첫째가 신생아일 때 육아휴직을 통해 좌충우돌 육아 경험을 해둔 덕분일까. 둘째 육아는 비교적 수월했다. 게다가 둘째가 얼마나 순한지 세상에 이런 천사가 있나 싶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얼굴을 보면 깜짝 놀라곤 했다.) 점점 육아의 달인이 되어가던 어느 날, 잠투정하다 잠든 둘째를 보며 문득 영화 <인터스텔라>가 떠올랐다. 불 꺼진 캄캄한 방은 우주로 변했고 그 공간에서 나는 유영하며 다른 차원에 있는 듯한 딸내미를 바라보았다. 시간 여행을 하며 37년 후 미래에서 온 내가 현재 7개월 된 나에게 젖병을 물리는 것 같은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딸아, 아빠가 예뻤으면 참 좋았을 텐데 정말 미안하다!)
갓난아이였던 딸내미를 키운 건 팔 할이 나였다. 아내도 천 번 만 번 동의하는 바다. (지금은 아빠를 집사처럼 부려먹다가 조금이라도 자기 뜻대로 안 되면 “아빠, 싫어!”를 외치는 네 살배기 딸이 언젠가 이 글을 꼭 읽길 바란다.) 육아휴직 기간이 끝나자 나는 다시 지옥문을 열고 악마 같은 상사가 기다리는 회사에 복직했다. 대기업 직장인 월급이 결코 적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네 식구가 되면서 외벌이로는 감당이 안 되는 현실에 직면했다. 급한 대로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했다. 잠시 빌려 쓰고 금방 메꾸면 되는 임시 조치라 생각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마이너스 숫자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늘어났다. 지금껏 이런 적자는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마음이 점점 쪼그라들었다.
‘나는 지금까지 경제 공부도 안 하고, 재테크도 제대로 안 하고 도대체 뭘 하고 살아온 걸까?’
인생을 잘못 살아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코로나 시국이라 전면 재택근무를 하는 바람에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 회사 출근, 방문을 열고 나오면 육아 출근으로 이어지는 퇴근 없는 삶이 펼쳐졌다. 이때 전셋집 주인까지 갑질을 해대는 통에 나는 점점 피폐해져 갔다. 급기야 뉴스에서 혀를 끌끌 차며 봤던 일가족의 극단적 선택이 전혀 다른 세계의 일만은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가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가족을 행복하게 해주려던 나는 어디로 간 걸까? 뭔가 머릿속이 망가지고 있던 게 분명했다.
팬데믹으로 유동성이 확대되며 주식 열풍, 부동산 광풍이 불었고, 벼락부자가 늘면서 심리적 벼락 거지 또한 증가해 양극화가 심해졌다. 나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결단하고 주식 공부를 시작했다. 동시에 내 집 마련과 파이프라인 구축을 위한 고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금융 문맹이었던 내가 재테크 학습을 하면서 의외의 재능을 발견한 것 같았다. 사실 재능보다는 간절함과 절박함이 만들어 낸 작은 열매일 것이다. 시간이 지나며 주식으로 약간씩 수익이 났고, 부업을 통해 큰돈은 아닐지라도 조금씩 형편이 나아졌다. 그리고 마침내 보금자리론을 통해 내 집 마련도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힘든 시기를 버틸 수 있게 도와준 건 글쓰기의 힘이었다. 당시 나는 잠을 줄여가며 두 번째 책을 집필하고 있었다. 주변에서는 코로나 시국에 아이 둘 외벌이 가장이 재택근무하랴 육아하랴 어떻게 책까지 쓸 수 있냐고 놀랐지만, 글쓰기는 숨통을 틔워주는 유일한 분출구였다. 나는 글을 쓰면서 턱밑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쉬었고 다시 살아갈 활력을 얻었다. 그러고 보면 나의 각성과 삶의 도약은 딸의 탄생과 더불어 가족이라는 존재가 선물해 준 거룩한 부담 덕분이 아니었나 싶다. 나를 보며 하마처럼 입을 쩍 벌리고 웃는 매력 덩어리가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까지도 생각하는 대로 살지 못하고 사는 대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열심히 사는 내게 하늘이 감동한 것일까. 해가 지날수록 딸내미의 얼굴이 점점 예뻐지더니 어느 날 아기 때와는 딴판인 얼굴로 훌쩍 자라 있었다. 거기에 더듬더듬 말하기 시작한 딸은 나를 그냥 화덕 속 버터처럼 녹아내리게 했다. 밀당을 잘하는 딸은 묘하게 상대를 자기편으로 끌어당기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한겨울에 쏟아지는 우박처럼 똥고집을 부리며 나를 공황에 빠뜨렸다가도 살랑살랑 봄바람 같은 애교로 순식간에 내 마음을 노란 유채꽃밭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래서 나쁜 여자에게 빠지면 약도 없다는 건가? 지금 내 눈엔 딸이 세상에서 가장 귀엽고 예쁜 공주 그 자체다.
이렇게 말하면 ‘딸바보’를 넘어 ‘딸등신’처럼 보이겠지만, 주변에서도 딸을 보는 시선이 완전히 달라졌다. 특히 신생아 때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은 딸의 얼굴에 천지개벽이 일어난 줄 안다. 그들은 딸에게 “예쁘다”라고 하지 않는다. “정말 예뻐졌다”, “왜 이렇게 예뻐졌냐”라고 한다. 예뻐진 딸을 보며 이번엔 장모님이 “우리 큰 딸 어렸을 때랑 똑 닮았다!”라고 했다. 처제들도 큰 언니를 닮아 예안이가 예쁜 거라며 거들었다. 그런데요, 분명 딸은 저 닮았다고 하시지 않았었나요? 원래 아이는 얼굴이 계속 변하는데 태어날 땐 날 닮았다가 점점 아내를 닮아가는 중이란다. 아, 그렇군요!
아무렴 어떤가. 딸을 바라보며 핑크빛으로 물든 내 눈을 보고 아내는 눈에서 범람하는 꿀만 모아다 팔아도 금방 부자 되겠다고 야단이다. 딸은 유치원에서 오후 5시에 하원하는데 나는 어린 왕자를 기다리는 여우처럼 오후 4시부터 행복해지곤 한다. 어떨 땐 참지 못하고 30분 전에 데리러 가는 날도 있다. 혼자 바보 같은 미소를 지으며 유치원에 도착하고 문 앞에서 인터폰으로 “잎새반, 김예안이요”라고 말한다. 나도 모르게 까치발을 세우며 기다린다. 딸이 나타나기까지 1~2분의 시간이 1~2시간처럼 느껴진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딸은 문밖에 누가 왔는지 두리번거리며 신발을 갈아 신는다. 그때 눈이 마주치면 문이 닫혀있어 목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입 모양이 “어? 아빠다!”라고 쫑알거리며 배시시 웃는 딸이 보인다. 그 미소가 나를 우주 어딘가 행복의 나라로 순간 이동하게 만든다. 이제는 제법 무거워진 딸을 번쩍 들어 안고 유치원을 나선다. 집에 오는 길에 모래 놀이터에서 조개껍데기를 줍기도 하고, 젤리를 사러 슈퍼에 들리기도 한다. 집에 와서는 술래잡기와 역할놀이, 퍼즐 맞추기와 색종이 접기를 하며 꿀 같이 달콤한 시간을 보낸다. 질투의 화신인 첫째가 태권도를 마치고 집에 오는 오후 6시 전까지 딸과의 데이트 1시간은 하루 중 가장 달달한 나만의 당 보충 시간이다.
내가 지금 직장인이었다면 과연 이런 행복을 누릴 수 있었을까? 요즘 내가 딸과 보내는 시간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한다면 강남에 건물 몇 채는 세우고도 남을 것이다. 퇴사를 하고 자유 직업인이 된 지 어느덧 10개월이 되니 슬슬 생계가 걱정되고 네 식구를 어떻게 먹여 살릴지 불안감이 엄습할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지난 10개월 동안 모아둔 돈을 까먹으며 사는 백수인 줄만 알았는데 다시 보니 강남 건물주가 되어있었다.
최근에 딸이 뜬금없이 다가와 “아빠 최고야! 아빠 사랑해, 축복해!”를 귀에 속삭이는 날이 부쩍 많아졌다. 수줍은 공주의 고백에 온몸이 녹아버린 버터 왕자가 된 기분이다. 아내와 아들이 검은자위는 다른 곳을 보면서도 흰자위로 우리 부녀를 감시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아내는 결혼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남편의 눈빛이 낯설고 신기하며 불편한 것 같다. 여보, 미안하지만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라서 용서해 주길 바랄게. 아들도 가장 예뻤던 네 살 때가 있었는데 어느새 여섯 살이 된 지금은 어린아이 티를 벗고 종종 징그러운 애늙은이처럼 되어버렸다. 아들아, 미안하지만 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 2년 동안 네게 사랑을 몰빵 했으니 지금은 질투 나도 잠시만 참아줄 수 있겠니? 모두를 만족시키려고 하면 아무도 만족할 수 없다는 말처럼 온 가족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는 없는 법. 그냥 나 당분간 딸바보로 살면 안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