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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기 반장 Oct 15. 2024

거실 없는 집(하)

'아들'로 살아가는 빠들남

엄마의 용서로 아버지는 다시 한 집 살림을 시작했다. 지극히 이성적인 지식인으로서 “신이 어디 있노?”라고 말했던 할아버지도 “우리 집에 기적이 일어났다!”라며 기뻐했다.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를 모시고 성당에 가서 감사 기도를 드렸다. 할아버지는 동생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줬고, 엄마는 호적에 올려서 동생을 진짜 가족으로 맞이했다. 냉기가 가득했던 우리 집에 꼬마 천사가 온기를 가득 싣고 찾아왔다. 온 세상이 눈부시게 아름답고 모든 것이 찬란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설거지와 집 안 청소는 물론, 자격증 취득을 위해 도서관에 다니며 공부를 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지금껏 소파와 한 몸이 되어 하루 종일 TV에 시선을 고정하던 아버지 모습에 익숙했던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동생은 자다가 코피가 자주 나긴 했지만, 걱정했던 것보단 수월하게 적응해가는 듯 보였다. 엄마가 동생을 목욕시킬 때 동생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집 안 가득 울려 퍼질 때면 모든 것이 문제없이 잘 돌아가고 있다고 느꼈으니까.


한두 달쯤 지났을 무렵, 문득 우리 집에 깃든 행복이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불안감이 올라왔다. 그리고 그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동생은 아버지가 집에 없을 때는 사랑스럽고 귀여운 막내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집에만 오면 뜬금없이 서럽게 울면서 졸지에 엄마와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다섯 살 아이의 생존 본능이었을까. 영악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동생을 보며 완전히 이해했다. 아버지는 동생 편에 서서 이 불쌍하고 어린것을 왜 잘 돌봐주지 않느냐고 화를 냈다. 아직도 나는 “너는 오빠답지 못하다”라고 했던 아버지의 아버지답지 못한 말을 생생히 기억한다. 동생의 행동은 점점 투정을 넘어 메소드 연기처럼 보였고, 그럴수록 오해와 갈등이 잦아졌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온기는 사라졌고 익숙했던 냉기가 다시 살아났다. 드라마 같은 현실이 소금기를 잔뜩 머금은 밀물이 되어 나의 상처 난 속살을 적셔댔다.


내 나이만큼 비정상이 정상의 자리를 대체했던 시간이 17년. 이제 겨우 제자리를 찾아가기 위해 새로운 1년을 보내던 중이었는데, 관성의 바람이 순식간에 혁명의 불씨를 꺼뜨렸다. 하루는 아버지가 뜬금없이 백화점에서 나와 동생의 잠옷을 사 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엄마는 이를 예사롭지 않게 느꼈다. 호환 마마보다 무섭다는 여자의 촉이 발동한 엄마는 영수증을 들고 아버지가 잠옷을 산 매장을 찾아갔다. 탐문 수사 결과, 엄마는 아버지가 젊은 여인과 함께 매장에 왔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발뺌하려던 아버지를 추궁한 엄마는 마침내 자백을 받아냈다. 동생의 생모가 아이가 보고 싶다며 아버지에게 연락했고, 뭐라도 해주고 싶어 잠옷을 사서 보냈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또 한 번 용서한 것도 모자라 동생의 생모를 직접 만나기까지 했다. 엄마의 증언에 따르면, 그 자리에 선글라스를 끼고 나타난 동생의 생모는 쌍꺼풀 수술을 한 상태였다. 이런 철부지에게 엄마는 딱 한 가지를 당부했다. 아이가 보고 싶으면 만나도 좋은데 반드시 엄마를 통해서만 연락하고 만나야 한다는 것. 드라마 대사가 따로 없었다. 그 후로 몇 개월이 지났고 동생을 환대하며 맞이한 지 반년쯤 되던 어느 날. 학원을 마치고 저녁에 집에 왔는데 동생이 보이지 않았다. 뭔가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 엄마에게 동생이 어디 있냐고 물었다. 엄마는 나라를 잃은 듯한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아이고, 또 시작이네! 굳게 닫힌 엄마의 말문을 열기 위해 나는 뭐든 다 수용할 자세가 되어있다고 호소했다.


“아버지가 엄마 몰래 또 그 여자를 만났어. 엄마도 참을 만큼 참았어. 아버지한테 당장 동생 데리고 그 여자랑 같이 살라고 해버렸어!”     


엄마의 말문을 열고 나니 내 말문이 막혔다. 그래, 엄마 말이 맞아. 엄마의 한계는 진작에 넘어섰던 거지. 나는 엄마에게 당장 아버지와 이혼하라고 말했다. 엄마는 내가 ‘결손가정’에서 자랐다는 소리를 듣지 않게 해주려고 그동안 아버지와 이혼하지 않고 참아왔단다. 내가 결혼할 때까지는 참아볼 테니 기다려달란다. 나는 아버지에게 전화했다. 어디냐고 할 말이 있으니 빨리 집에 오라고 말했다.


밤늦게 아버지가 집에 왔다. 나는 엄마와 아버지에게 거실 소파에 앉으라고 했다. 나에게 온전한 거실이란 없는 것일까. 그토록 소통이 갈급했던 어린 시절, 거실 없는 집에서 자란 내가 이제는 거실에서 부모님에게 이혼하라며 소통하고 있었다. 우발적인 감정으로 저지른 일이 아니었다. 엄마가 그랬듯 나도 한 달 동안 숙고해왔던 것을 말해야 할 적절한 때라고 생각했다.


“이제 우리 각자의 길로 갔으면 좋겠어요. 두 분 이혼하세요. 저 때문에 억지로 참으며 희생하지 마세요. 그건 저를 위하는 게 아니에요. 각자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그러니 당장 이혼하세요.”


부모님은 충격을 받은 듯 말이 없었다. 늘 순종하는 ‘착한’ 아들이자 사춘기도 있는 듯 없는 듯 지나간 ‘모범생’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곤 믿기 힘들어서였을까. 엄마, 아버지! 이제부터 그 누구도 탓하지 말고 각자 알아서 행복해지는 겁니다!


나의 단호한 태도에 부모님은 별말 없이 그대로 이혼했다. 나는 엄마와, 동생은 아버지와 살기로 했다. (애초에 아버지가 동생을 보육원에 보낼 정도로 비정한 사람이 아니었단 걸 알았다면 어땠을까? 아버지는 어찌 됐든 동생을 끝까지 책임지려고 노력했고, 지금도 노력한다.) 엄마는 그 길로 신앙생활을 접고 냉담했다. 신의 뜻을 거역했다는 죄책감과 아들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뒤범벅되어 엄마를 지독히 괴롭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엄마는 엄마로서, 신자로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엄마는 내게 종교와 다름없었다. 낮에는 서울에서 오산까지 왕복 4시간 거리를 기간제 교사로, 밤에는 집에서 과외를 하며 엄마는 한시도 허투루 사는 법이 없었다. 일이 있어 밥을 해줄 수 없을 때는 항상 유기농 식단으로 도시락을 싸놓고 손편지를 써놓았다. 나는 언제나 “엄마는 아들을 믿어. 사랑해, 아들!”로 끝나는 엄마의 손편지를 읽으며 온기와 부담이 가득 담긴, 맛있지만 소화가 잘 안 되는 도시락을 싹싹 긁어먹었다.  

   

미세한 틈조차 보이지 않는 완벽한 슈퍼우먼인 동시에 유일한 희망인 아들이 무너지면 곧바로 삶을 포기할 것만 같은 눈빛을 가진 연약한 여인. 그런 엄마 앞에서 나는 그녀의 자존심을 위해 존재하는 마리오네트가 되어버렸다. 10년 전 건강하던 엄마가 갑자기 난소암으로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동안 나의 꿈은 ‘아들 하나 바라보고 사는 엄마의 자랑스러운 아들 하나’가 되는 것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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