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사랑 위에 세워진 아름다운 도시, 드레스덴
드레스덴에서
by 책 쓰는 중고차 딜러 Dec 26. 2019
냉정과 열정 사이
두오모 성당의 전망대, 큐폴라에 남녀가 서로 마주 보고 서 있다. 10m도 안 되는 두 사람의 거리에는 10년의 세월이 담겨 있다. 아름다운 피렌체를 배경으로 서로를 향한 사랑의 냉정과 열정 사이는 점점 좁혀진다.
소설과 같은 제목의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의 무대가 되며 피렌체는 낭만의 메카가 되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를 비롯해 단테, 보티첼리, 브루넬레스키 등 르네상스 예술의 거장들을 잉태한 피렌체는 도시 전체가 걸작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바라보는 피렌체의 전경이 압권이다.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처음 만났던 사랑의 베키오 다리, 그 밑을 흐르는 아르노강, 붉은 지붕으로 가득한 피렌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피렌체가 독일에도 있다면 믿겠는가? 우리 부부는 ‘독일의 피렌체’라 불리는 도시 드레스덴으로 설레는 발걸음을 옮겼다. 11일간 머물렀던 카셀의 베이스캠프에서 떠나 드레스덴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했다. 드레스덴, 베를린, 쾰른을 거쳐 벨기에, 프랑스, 룩셈부르크를 방문할 계획이었다.
분단과 화합 사이
드레스덴은 독일에서 가장 부강한 작센 주의 주도였다. 오스트리아와 폴란드의 국경과 접하는 지역에 있는 드레스덴은 교역을 통해 부유한 도시가 되었고 호화롭고 웅장한 건축물들로 도시 전체를 가득 채웠다. 또한, 유럽 각지의 미술품이 이곳으로 모여들며 예술·문화의 도시, ‘독일의 피렌체’로 발전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오색찬란했던 드레스덴은 잿빛 폐허가 되었다. 연합군의 폭격으로 도시의 80%가 파괴되고 시민의 절반이 희생당했다. 당시 영국군의 폭탄은 블록(Block) 하나를 날려버릴(Bust) 정도로 위력이 컸다. 여기서 초대형 상업영화를 뜻하는 ‘블록버스터(Blockbuster)’라는 말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분단되었지만, 반세기에 걸쳐 파괴된 도시를 원형대로 복원하기 위해 동서독이 협력했다. 그 결과, 드레스덴이 부활할 수 있었다. 영광의 상처라고 해야 할까? 도시 곳곳엔 상처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까맣게 그을린 잔해와 새롭게 보수한 부분의 명암대비가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프라우엔 교회. 드레스덴을 대표하는 루터교 교회로 복원 때 쓰인 잔해의 조각을 볼 수 있다. 교회 앞 광장에는 마르틴 루터의 동상이 있다.
웅장함과 화려함 사이
평소 수수한 여인이 어느 날 한껏 꾸몄을 때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발산하듯 그동안 독일의 검소하고 단아한 모습에 익숙했던 우리 부부는 드레스덴의 도발적인 매력에 흠뻑 취하였다. 하나의 거대한 갤러리 같은 도시의 거리를 따라 독일 바로크 건축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츠빙거 궁전에 도착했다.
아우구스투스 대왕의 여름 별궁으로 지어진 츠빙거 궁전은 웅장한 규모와 화려한 외관을 자랑한다. 내부에는 아름다운 정원을 비롯해 박물관과 미술관도 있다. 고급 과자 선물 세트 같은 이곳은 우리 부부의 시간을 ‘순삭(순간 삭제)’해버렸다. 갤러리엔 루벤스, 반 에이크, 뒤러, 렘브란트 등 거장들의 작품이 있는데 특히 라파엘로의 <시스틴 마돈나>가 유명하다.
츠빙거 궁전의 외부(왼쪽) / 츠빙거 궁전의 내부 정원(오른쪽)
우리 부부는 ‘미알못(미술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 3유로를 주고 오디오 가이드를 대여했다. 그러나 영어로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설명을 듣고 있자니 미술의 세계는 멀고도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은 결국 내가 느끼는 대로 해석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위안하며 3개 층에 걸쳐 전시된 작품을 감상하였다. 간혹 눈에 익은 유명한 작품이 나올 땐 탄광에서 금맥을 발견한 것처럼 반가웠다. 미알못이면 좀 어떤가? 츠빙거 궁전의 웅장함과 화려함 사이에서 우리 부부는 왕족이라도 된 듯 우아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사진과 예술 사이
츠빙거 궁전에 입장했던 문과 반대편 문으로 나가자 입이 떡 벌어지는 광경이 펼쳐졌다. ‘극장 광장(Theaterplatz)’에 들어선 것이었다. 이곳에선 누구나 사진작가가 될 수 있다. 어느 방향에서 사진을 찍어도 모두 예술작품이 된다. 극장 광장은 ‘360도 포토존’이라 할 수 있다. 아내가 사진을 보고 정말 내가 찍은 게 맞냐며 화들짝 놀랄 정도였다.
극장 광장 중앙에는 말을 타고 있는 요하네스 왕의 동상이 서 있다. 요하네스 왕의 뒤편에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오페라 하우스로 꼽히는 ‘젬퍼 오페라 하우스’가 있다. 요하네스 왕의 정면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싼 보물이 있는 박물관이자 독일에서 가장 웅대한 르네상스 궁전인 ‘드레스덴 성’이 있다. 젬퍼 오페라 하우스와 드레스덴 성 사이에는 츠빙거 궁전이 있고, 츠빙거 궁전 맞은편에는 작센에서 가장 큰 바로크 양식의 가톨릭 교회인 ‘대성당’이 있다. 360도 포토존에서 나는 신나게 카메라 버튼을 눌러댔다.
젬퍼 오페라 하우스(왼쪽) / 요하네스 왕 동상과 대성당(오른쪽) 대성당과 드레스덴 성(왼쪽) / 정면에서 찍은 대성당 야경(오른쪽)
무언가에 홀린 듯 대성당과 드레스덴 성 사이로 걷던 우리 부부 앞에 또 하나의 거대한 걸작품이 나타났다. 역대 군주 35명을 비롯한 총 94명의 인물이 등장하고 길이만 101m에 달하는 벽화, ‘군주의 행렬’이었다. 2차 세계대전의 대폭격 속에서 거의 유일하게 보존된 원본이라고 한다. 우리 부부도 대규모 행렬과 함께 힘차게 행진하다 보니 슬슬 허기짐이 느껴졌다.
거대한 벽화, ‘군주의 행렬’(왼쪽) / 저녁 식사를 했던 분위기 있는 ‘뮌츠 골목’(오른쪽)
낭만과 현타 사이
마침 작은 레스토랑이 양쪽으로 줄지어 있는 골목이 나타났다. 전형적인 유럽 감성이 느껴지는 식당가였다. 이보다 더 낭만적일 수 있을까? 뭐 좀 비싸면 어떤가? 내일 치즈버거 한 개로 버티더라도 오늘만큼은 드레스덴의 갬성을 놓칠 수 없었다. 우리 부부는 가장 예쁘고 맛있어 보이는 가게로 들어갔다. 마침 유리병에 들어있는 장미꽃 한 송이가 식탁마다 놓여있어 로맨틱의 화룡점정을 찍는가 했으나 생각보다 맛없는 음식 때문에 ‘현타(‘현실 자각 타임’을 줄여 이르는 말로, 헛된 꿈이나 망상 따위에 빠져 있다가 자기가 처한 실제 상황을 깨닫게 되는 시간)’가 왔다. 추천받아 주문한 음식이 돼지 간 요리였는데 당황스러운 맛이었다. 순대를 좋아하는 내게도 비릴 정도였으니 현타가 올 수밖에.
음식의 맛이 아쉬웠지만, 야경의 멋은 황홀했다. 독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야경으로 손꼽히는 드레스덴의 야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졌다. 우리 부부는 괴테가 ‘유럽의 발코니’라고 칭했을 정도로 아름다운 엘베 강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브륄의 테라스’를 걸었다. 로맨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우리 부부는 찬란한 드레스덴을 배경으로 서로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아우구스투스 다리에서 본 드레스덴 구시가지의 야경
상처와 회복 사이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남녀 주인공이 사랑을 나눴던 피렌체의 명소들이 부럽지 않았다. 남주인공 준세이와 여주인공 아오이는 서로를 향한 사랑의 열정이 컸던 만큼 상처의 냉정 또한 깊었다.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열정은 냉정에 식고 냉정은 열정에 녹으며 비로소 따스함이 완성된다.
어린 아이도 동화 <바람과 해님>에서 배우듯이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고 닫힌 가슴을 열게 만드는 것은 따스한 햇볕이다. 비참한 전쟁의 결과로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분단과 화합을 거쳐 마침내 상처를 회복한 드레스덴을 보며 준세이와 아오이의 따스한 사랑을 느꼈다. 민족상잔의 냉정과 분단, 상처가 가득한 대한민국에 열정과 화합, 회복의 날은 언제쯤 올까?
낮에는 드레스덴의 웅장하고 화려한 외관에 취해 볼 수 없었지만, 밤이 되자 서서히 알 수 있었다. 드레스덴을 흐르는 아름다운 엘베 강은 드레스덴의 회복을 위한 독일인의 따스한 사랑이었다는 것을. 우리에게도 이제는 한강의 '기적’을 넘어 한강의 '사랑’이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