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베를린 장벽의 기쁨과 분단국가의 아픔

베를린에서

※ 앞서 밝혔지만, 이 글은 휴직 중 2017년 2월에 한 달간 독일에 머물렀던 30대 직장인 신혼부부의 체험기다. (간혹 우리 부부가 지금 독일에 있는 줄 알고 걱정하는 분들이 있다.) 코로나19의 빠른 종식을 간절히 바라며 3년 전 추억을 소환해본다.



아브라카다브라! 열려라 참깨!

숙취를 빨리 깨기 위해 사우나를 찾는 사람이 많다. 열탕과 냉탕을 오가며 땀을 빼기도 하는데 오히려 탈수 증상을 유발하므로 주의해야 한다. 비텐베르크에서 무언가에 취한 듯 열탕과 냉탕을 오가며 진땀 뺐던 우리 부부는 녹초가 되어 베를린에 있는 숙소로 향했다.


정교하지 않은 내비게이션에 의지해 같은 곳을 몇 번이나 빙빙 돈 끝에 예약한 호스텔에 도착했다. (한국 내비게이션의 우수성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커다란 캐리어와 함께 지친 몸을 이끌고 출입문을 열려는 순간, 손잡이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반대편 정문으로 가보았지만, 역시 굳게 다문 악어 입처럼 요지부동. 문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통화 감이 멀어 안내원의 말이 독일어인지 영어인지 알기 어려웠다.


“어제 방을 예약했는데 문 좀 열어주세요!”라고 열심히 말했지만, 좀처럼 소통이 되지 않았다. 입은 하나, 귀는 둘인 이유가 말하기보다 듣기를 두 배로 하라는 뜻이라는데 상담원과 나는 마치 입은 둘, 귀는 하나인 괴물처럼 각자 할 말만 계속 떠들어댔다. 해도 지고 배도 고팠다. 다시 전화를 걸었는데 뭔가 이상했다. 자동응답 같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던 그때, 아내가 목사님(‘8일 차’ 글에 등장)에게 도움을 청해보자고 지혜를 발휘했다.


목사님 덕분에 이메일에 적힌 비밀번호로 열쇠함을 열었다. 내 이름이 적힌 봉투 안에 열쇠가 들어있었다. 드디어 ‘헬게이트’ 같았던 문이 ‘게이트웨이(차원의 문)’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공동샤워장, 공동 휴게공간 등 내부 시설을 보니 학창 시절 수련회가 떠올랐다. 한 층에 남녀 샤워장이 각각 있었는데 문이 없어 누구나 드나들 수 있었다. 아내가 샤워할 동안 나는 절에 있는 사대천왕처럼 문지기가 되었다. 가까운 휴게실에 외국인 여럿이 피자를 즐기고 있어 신경쓰였다. 따뜻한 물줄기에 긴장감이 녹아내리자 액체 괴물이 된 듯 몸도 흘러내려 침대에 찰싹 붙은 채 잠이 들었다.


호스텔 공동휴게공간. 인상적인 브라운관 TV (왼쪽) / 환상적인 조식(www.ju-li.de) (오른쪽)


새나라의 어린이, 새나라의 시간표

다음 날 아침, 알람을 맞춘 것도 아닌데 우리 부부는 조식 시간에 맞춰 눈을 떴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역시 배꼽시계가 가장 정확하다. 아늑하고 조촐한 호스텔 분위기와는 달리 화려한 조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단순히 숙박비가 저렴해서 선택한 곳이었는데 호텔 부럽지 않은 조식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리 부부는 자리가 없어 4인 식탁에 앉았는데 동양인 버전 아인슈타인 느낌이 나는 한 노신사가 합석했다. 한국인이라 반가운 마음에 이런저런 맛있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대학교수인데 휴가 때면 홀로 유럽 여행을 즐긴다고 했다. 가성비 높은 조식 때문에 독일에 올 때면 꼭 여기에 머무른다고 하며 빵에 꿀을 발라 먹는 것을 추천했다. 새로운 맛의 세계가 열렸다. 아내는 지금도 독일 빵이 최고라고 노래를 부른다.


초등학교 방학 시간표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하얀 캔버스에 동그란 접시를 대고 원부터 그렸던 기억이 난다. 그다음은 생일 케이크 자르듯이 원을 여러 조각으로 쪼갠다. 조각마다 알차디 알찬 계획을 적어 넣는다. 시간표대로만 산다면 위대한 인물이 되는 건 시간문제다. 3일도 못 가 빡빡한 시간표에 좌절하는 것도 시간문제라는 것이 함정이지만.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나는 베를린 일정을 마치 초등학생 때 방학 시간표처럼 짰다. 독일 수도를 하루 만에 보겠다고 호기를 부린 남편 덕분에(?) 아내는 군대에서나 할 법한 행군을 간접 체험해야 했다. ‘이불 킥’하게 되는 기억 때문에 다시 베를린에 간다면 반드시 최소 3일 이상 일정으로 계획하리라.


초등학생 방학 시간표처럼 빡빡한 베를린 하루 일정. 무모한 도전에 웃음이 나온다. (지도 : 김주희, 《셀프트래블 독일》, 상상출판)


베를린 장벽, 진실의 종아 울려라!

베를린 행군(?)의 첫 번째 고지인 베를린 장벽 기념관을 찾았다. 또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나는 베를린 장벽이 한반도 군사 분계선처럼 독일 땅 전체를 반으로 나누는 경계상에 있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내 생각대로라면 베를린이 동독과 서독을 나누는 경계인 중앙에 있어야 했다. 그런데 베를린은 분명 독일 동쪽에 있고 과거 동독 지역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스스로 만들어낸 망상에 빠져 혼란스러웠다.


베를린 장벽은 1961년 동독 정부가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경계에 쌓은 콘크리트 담장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하자 소련(지금의 러시아)·미국·영국·프랑스 4개국이 독일을 분할 점령했다. 동독 지역에 있는 수도 베를린도 4개국이 분할 점거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과 소련이 정치적 견해 차이로 충돌하며 동·서독의 분단이 고착되었다.


동독 정부는 동독 사람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40km에 달하는 콘크리트 장벽을 쌓고 브란덴부르크 문을 통해 허가받은 자만 왕래하도록 했다. 그런데 소련 공산주의 체제 붕괴와 함께 1989년 동독 혁명이 일어났고 장벽은 허물어졌다. 현재 장벽은 브란덴부르크 문을 중심으로 일부분만 기념물로 남아있다.

출처 : 거울막이의 잡학다식한 블로그, <티스토리>, https://dykim1988.tistory.com/22


동독 혁명, 진실의 종아 울려라!

통일 전 독일 상황을 현재 한반도 상황으로 치환하면 베를린은 평양쯤 되는데 그 안에 장벽을 쌓아 남평양, 북평양을 나누어 통치하는 묘한 형태이다. 독일 통일에 관해서도 잘못 알았던 사실이 있는데 바로 서독이 동독을 ‘흡수’한 통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독일 통일은 1989년 10월 9일 동독 라이프치히에서 일어난 ‘동독 혁명’의 결과였다.


1985년 고르바초프가 새로운 개혁·개방 정책을 펼친 결과,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개방했고 동독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동독 사람들이 헝가리,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으로 넘어갔다. 동독 정부는 헝가리 정부에 국경 봉쇄를 요구했고 자유를 구속당해왔던 동독 사람들은 민주화와 여행 자유화를 요구하는 거대한 저항 운동을 전개했다.


1989년 10월 7일 동독 건국 40주년 기념일을 기점으로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다. 동독 공산당 서기장 호네커의 무력 진압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10월 9일 라이프치히에 모인 8만 명의 시위대는 마침내 호네커를 몰아냈다. 베를린 장벽은 동독 혁명이 성공한 지 한 달 후인 11월 9일에 무너졌다.


베를린 공산당 서기장 샤보브스키가 깜짝 발표한 “베를린 국경을 트고 여행을 허가하겠다”라는 소식에 국경에 몰려든 수많은 동독 사람이 우발적으로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렸다. 이 또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외치는 한반도에 살고 있지만, 정작 통일을 이룬 나라에서는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게으름을 반성했다.



무너진 베를린 장벽과 한반도 군사분계선

베를린 장벽 기념관에는 아침부터 독일 학생들로 붐볐는데 역사를 중시하는 독일 교육의 열기가 느껴졌다. 독일로 떠나기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촛불 혁명의 현장, 광화문 광장에 있었던 우리 부부가 독일 혁명과 통일의 역사적인 현장에 서니 감회가 새로웠다. 생각에 잠겨 장벽을 따라 천천히 걷고 있는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열 명쯤 되는 학생들이 장벽 앞에서 기차놀이를 하며 즐겁게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리도 언젠가 통일이 되면 군사분계선 기념물 앞에서 남북 학생들이 함께 웃으며 사진 찍는 날이 오지 않을까?


통일 전 베를린장벽에 대한 설명 (왼쪽) / 통일 후 기념물로 남아있는 베를린장벽 (오른쪽)

며칠 전 독일 통일 당시의 모습을 그린 영화 <굿바이 레닌>을 보았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아들의 하얀 거짓말이 코믹하면서도 감동적이었다. 그러나 희극은 슬픈 미소를 짓고 있는 피에로 같아서 표면의 웃음을 걷어내면 이데올로기의 깊은 비극이 보인다. 중앙대 김누리 교수는 “동독의 몰락은 사회주의의 몰락이자, 낙관적 인간관의 몰락을 의미한다”라고 말했다. 이상향을 꿈꾸며 통일을 주도했지만, ‘2등 국민’이 된 현실에 괴리를 느끼는 동독 사람들의 실상이 영화에 잘 담겨있다.

통일된 지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동서독의 갈등을 보며 충분한 준비와 교감을 통해 사회 문화적 갈등을 최소화한 상태에서 통일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동시에 개인적 차원에서도 통일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북한 주민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28개월 된 아들과 2개월 된 딸이 자랐을 때 어떻게 올바른 통일관을 교육할 것인지에 대한 책임이 부모에게 있다고 생각하니 어깨가 무겁다.


꿩 대신 칠면조

지구 상의 마지막 분단국가에서 독일을 방문한 우리 부부는 무너진 베를린 장벽을 마음에 담고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페르가몬 박물관과 가까운 주차장을 찾다 보니 붉은 시청사가 보였다. 붉은 시청사는 동독의 시청사였는데 통일 후에도 베를린의 시청사로 사용하고 있다. 시계탑 위에는 베를린시의 깃발이 펄럭였다. 그 뒤로 독일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인 TV 타워가 바벨탑처럼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다.


10분 정도 걸었을까 페르가몬 박물관에 도착했다. 그러나 베를린을 대표하는 박물관답게 입장을 기다리는 긴 행렬을 보고 좌절했다. 계획 밖의 일이었다. 아직 점령할 고지가 많아 눈물을 머금고 박물관은 패스. 여행의 묘미는 바로 뜻밖의 경험이 아니겠는가. 발걸음을 돌려 베를린 대성당으로 향했다.

우리 부부는 페르가몬 박물관의 아쉬움을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로 베를린 대성당에 감격했다. 대성당이라 불리지만, 베를린에서 가장 큰 개신교회로써 왕가의 교회답게 화려함을 자랑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파괴된 것을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는데 예전에는 더 화려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경험은 270개의 계단을 올라 전망대에서 베를린 전경을 감상한 것이었다. 아내는 뜻밖의 산악행군(?)에 힘들어했지만, 오후 일정까지 고려하면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붉은 시청사와 TV 타워 (왼쪽) / 베를린 대성당의 외관 (오른쪽)
베를린 대성당의 내부 (왼쪽) / 베를린 대성당 전망대에서 감상한 베를린의 전경 (오른쪽)


호스텔에서 든든하게 아침을 먹고 나왔지만, 강행군에 금세 배가 고팠다. 역시 한국 사람에게 빵은 간식에 불과한가 보다. 오후 일정도 소화하기 위해서는 밥심이 필요했다. 카셀 한인 교회에서 만난 한 교인이 추천해준 식당을 찾아갔다. ‘사쿠라’라는 초밥 뷔페식당이었는데 오래간만에 제대로 된 쌀밥으로 식사다운 식사를 했다. 초밥에는 역시 맥주다. 독일에서 맥주는 물이나 다름없다. 낮술인 듯 낮술 아닌 낮술 같은 맥주와 초밥에 아내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덩달아 나도 행복해졌다. 무엇보다 다음 일정이 바로 세계 최고의 축구 리그인 독일 분데스리가 관전이었기에 심장의 두근거림은 점점 더 커져갔다.


초밥 뷔페 ‘사쿠라’에서 즐거운 식사 (주소 : Kurfürstenstraße 126 10785 Berlin)




[참고자료]

- 장윤형, “연말 송년회 술자리, ‘사우나’ 피하고 ‘물’ 많이 마셔야”, <쿠키뉴스>, 2015.12.18.

- 이지현,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 독일 메르켈 총리 연설 화제”, <어린이동아>, 2019.11.10.

- 김누리,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해냄출판사, 2020

- 김주희, 《셀프트래블 독일》, 상상출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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