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텐베르크에서의 비탄과 경탄

비텐베르크에서

독일에서 ‘루터의 도시’로 불리는 두 곳이 있다. 앞서 소개했던 아이슬레벤(참고 : https://brunch.co.kr/@21missionary/74)과 오늘 이야기할 비텐베르크다. 아이슬레벤이 루터 인생의 서론과 결론을 품고 있다면 절정의 본론은 비텐베르크에 흐른다.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던 ‘95개 조 반박문’의 무대가 바로 비텐베르크다.


우리 부부는 설레는 마음으로 비텐베르크로 향했다.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에 비텐베르크를 방문하다니.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었다. 촉촉하게 거리를 적시는 보슬비가 고풍스러운 비텐베르크의 감성을 자극하고 있었다. 빗방울을 머금은 창문을 통해 저 멀리 보이는 슐로스 교회 첨탑의 위용이 일렁였다.


일렁이는 슐로스 교회 첨탑의 위용 (왼쪽) / 종교개혁의 발상지, 슐로스 교회 (오른쪽)


우리 부부는 먼저 슐로스 교회 근처에 있는 관광 안내소에서 2.5유로를 주고 한국어로 된 안내서를 구매했다. 비텐베르크의 역사를 비롯해 루터가 30년 동안 설교를 했던 시립교회와 루터가 살았던 루터 하우스, 루터가 교편을 잡았던 비텐베르크 대학 등 주요 유적지에 대한 설명이 잘 나와 있었다.


95개 조 반박문을 붙인 문 앞에 선 우리 부부는 안내서의 도움을 받아 현재의 문이 1858년에 청동으로 새롭게 제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면죄부가 왜 성경적이지 않은지 95개 조항의 반박 테제를 이 문에 게시했다. 그것을 기념하여 현재 청동 문에는 반박문의 내용이 라틴어로 새겨져 있다.


슐로스 교회 중앙에 있는 95개 조 반박문을 붙인 문 (왼쪽) / 슐로스 교회 내부에 있는 소박한 루터의 무덤 (오른쪽)


교회 내부를 둘러보던 우리 부부는 루터의 무덤을 발견했다. 소박한 그의 무덤 앞에 한참 서 있자 또 다른 하나의 무덤이 떠올랐다. 세계에서 가장 큰 무덤 진시황릉이었다. 한 면이 400m가 넘고 높이가 76m에 이르는 거대한 무덤은 불로장생을 꿈꿨던 진시황의 열망을 담아 건설되었다. 하지만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영원한 삶을 갈구했던 진시황은 고작 나이 쉰 살에 자신이 만든 무덤으로 들어가야 했다.


진시황릉과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루터의 무덤은 초라했지만, 이곳에 누운 루터는 천국의 영원한 삶을 누리고 있지 않을까? 위대한 진시황릉에 묻힌 진시황의 초라한 죽음과 초라한 무덤에 잠든 루터의 위대한 삶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우리 부부는 잠시 기도를 드렸다.


ⓘ관광 안내소 ①슐로스 교회 ②시립 박물관 ③역사의 집 ④크라나흐 하우스 ⑤시장 광장 ⑥시립교회 ⑦비텐베르크 대학 ⑧멜란히톤 하우스 ⑨루터 하우스 ⑩루터의 떡갈나무


교회를 나와 동쪽으로 10분 정도 걸었을까. 탁 트인 공간이 나왔다. 시청사 건물이 있는 시장(마르크트) 광장이었다. 시청 앞에는 두 개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는데 하나는 당연히 루터의 동상이었고 다른 하나는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루터와 나란히 동상으로 세워질 정도면 분명 대단한 인물일 텐데 과연 그는 누구일까?


낯선 이의 등장이 궁금했지만, 우리 부부는 일단 시청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비도 오는 데다 안내서에 나와 있는 전시회를 빨리 관람하고 싶었다. 시청사에는 ‘20세기 기독교 미술’이라는 상설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샤갈과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등 유명 예술가의 다양한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시청사 건물을 나오자 두 개의 첨탑이 우뚝 솟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시립교회였다. 궁금했던 시청 앞 낯선 동상의 정체는 까맣게 잊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 시립교회는 처음으로 독일어 예배를 드린 곳이자 성만찬 의식(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빵과 포도주를 나눠주는 예식)을 성도에게 처음으로 거행했던 역사적인 장소이다.


루터는 이곳에서 결혼식도 올리며 30년간 목회를 했다. 당대 최고의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는 루터의 절친이자 지지자였다. 시립교회엔 그가 그린 네 폭의 제단화가 있는데 개신교 교인들의 삶과 종교개혁 시기의 교회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다. 루터는 인복도 많은 인물이었던 것 같다.


왼쪽 시청사 건물의 오른쪽에 시립교회가 있다(왼쪽) / 시립교회 크라나흐의 제단(오른쪽)


더는 시간을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아내를 재촉하여 가장 많은 기대를 했던 루터 하우스로 향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종교개혁사 박물관’이자 ‘독일 문화의 등대’라는 수식어가 붙은 루터 하우스의 내부는 어떤 모습일까? 두근두근 뛰는 가슴으로 걷다 보니 아내가 저만치 뒤따라 오고 있었다.


드디어 루터 하우스에 도착. 그런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공사안내 펜스가 세워져 있었다. “에이, 설마. 일부 보수하느라 그런가 봐.” 나는 당황하지 않은 척 펜스를 피해 안으로 들어갔다. 더욱 불길한 광경이 펼쳐졌다. 루터 하우스의 마당 곳곳이 패여 있었고 중장비와 공사 잔해가 널려있었다.


‘오 마이 갓! 이건 꿈일 거야!’ 보통 인간은 눈으로 본 것만 믿을 수 있는 존재라고 하는데 이날 나는 본 것도 믿을 수 없는 존재 또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 눈을 애써 부정하며 출입문으로 다가섰다. 아무리 손잡이를 돌린 들 문이 열릴 턱이 있나. 공룡이 씹던 초대형 껌이라도 밟은 듯 나는 한동안 낙심한 채 그 자리에 붙어있었다.


지나가던 외국인이 내게 지금은 공사 중이라 관람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다시 공사안내 펜스로 돌아가 안내 문구를 자세히 읽었다. 외국인의 말이 맞았다. 3월 4일에 재개장한다고 쓰여있었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우리 부부는 3월 3일에 귀국 예정이었다. 휴직 기간의 여유가 없었기에 귀국을 미룰 수도 없었다.


OMG! 루터 하우스가 공사 중이라니! 3월 4일에 재개장한다고 안내되어 있었다.

나는 말을 잃은 채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런 모습을 처음 본 아내는 어찌할 바를 몰라 나를 위로하고자 부단히 애썼다. “오빠, 우리 다시 오면 되잖아요. 분명 다시 오면 더 좋을 거예요.”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아내는 어떻게 해서든 나를 위로하고자 계속 말을 붙였다. 내 귀엔 ‘아무 말 대잔치’로 들릴 뿐이었다.


“위로가 전혀 안 되니까 위로하려고 하지마!” 나는 아내에게 정색했다. 아뿔싸! 이미 엎질러진 물에 분위기는 수습 불가였다. 뭣이 중헌디. 루터 하우스가 뭐라고 나를 위로하는 아내에게 정색했을까. 후회한들 이미 마음속은 루터 하우스의 공사판처럼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못난 남편 때문에 우리 부부는 말없이 걸었다.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근처 기념품 가게에도 들렸지만, 서로 말없이 물건만 만지작거리다가 나왔다. 그래도 루터 하우스에서 멀지 않은 ‘루터의 떡갈나무’는 봐야 했기에 나는 아내에게 말을 걸었다. 어색한 분위기가 흐른 채 길을 건너려고 하자 거품 목욕을 하듯 거리를 청소하는 신기한 차와 환자를 실은 듯 사이렌을 울리며 달리는 응급차가 지나갔다.

자연스럽게 우리 부부는 화제 전환을 할 수 있었다. 기막힌 타이밍에 나타나 준 청소차와 응급차에게 고마웠다. 건너편에 루터의 떡갈나무가 모습을 드러냈다. 교황에게 파문 협박을 당한 루터는 이곳에서 교황의 교서와 가톨릭 서적들의 화형식을 거행했다. 시골 마을에서 볼 수 있는 오래된 느티나무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아내에게 순간적으로 너무 속상했다며 사과를 했다. 사과 한마디에 루터의 떡갈나무 아래에서 우리 부부의 '상한 감정 화형식'이 거행되었다.


루터의 떡갈나무(왼쪽) / 시청 앞 멜란히톤 동상(오른쪽)

동쪽 끝까지 왔던 우리 부부는 주차장이 있는 서쪽 끝을 향해 온 길로 다시 걸어갔다. 루터 하우스를 둘러볼 시간이 남는 바람에 중앙에 있던 시장 광장을 다시 찾았다. 까먹고 있었던 낯선 동상의 정체가 다시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검색을 해보니 그는 루터의 종교개혁 동지이자 소울메이트였던 멜란히톤이었다.


필립 멜란히톤에 대해 루터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소중한 도구’이자 ‘나의 가장 소중한 필립’이라고 칭했다. 멜란히톤은 루터를 진정으로 존경하고 사랑했다. 21세에 비텐베르크 교수가 된 천재 멜란히톤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논리적으로 이론화하고 치밀하게 교리화했다. 그는 또한 대학에서부터 초등학교까지 교육체제를 개혁하며 ‘독일의 스승’이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다. 그는 1560년 사망해 루터의 곁에 묻혔다.

종교개혁의 1인자 루터의 자취를 느끼고자 찾았던 루터 하우스의 문이 굳게 닫힌 덕분에 2인자 멜란히톤의 정체와 그 존재를 알게 되었다. 비텐베르크에서 1인자 때문에 잠시 비탄에 빠졌지만, 2인자 덕분에 비탄이 경탄으로 바뀌는 체험을 했다.


그러고 보면 개그 유행어처럼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의 그늘에 가려진 수많은 2등이 있다. 달 표면에 인류 최초로 발자국을 남긴 닐 암스트롱만이 기억되는 세상 속에서 버즈 올드린의 두 번째 발자국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사실 버즈 올드린은 인류 최초로 달을 '떠난' 인물인데 말이다. 영화 <토이 스토리>의 주인공 버즈 라이트이어의 버즈라는 이름도 버즈 올드린에게서 따왔다는 것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사실 나도 처음 알았다.)


우리나라에선 대표적인 ‘2등 전문가’로 마라토너 이봉주가 있다. 이봉주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3초 차이, 2000년 도쿄 마라톤에서 8초 차이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사람들은 이봉주를 향해 “또 2등이야?”라고 비아냥거렸다. 어린 시절 내 기억 속에도 황영조는 영원한 1등, 이봉주는 만년 2등의 이미지가 강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다.


황영조보다 훨씬 더 많은 우승을 했고, 한국 신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이봉주다.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자의 완주 횟수는 평균 10회도 되지 않는데 이봉주의 완주 횟수는 무려 40회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서 2등 전문가로 낙인찍힌 이봉주는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레이스를 멋지게 펼쳤다.


2등도 기억하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우리 부부는 비텐베르크의 감성 젖은 거리를 걸었다.




참고자료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5437840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3223437&code=61221111&cp=nv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 – 세계사 체험> 안내서

https://namu.wiki/w/버즈%20올드린

EBS 지식채널 ‘2등 전문가 이봉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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