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추세경 Aug 02. 2023

아빠를 생각하면 울컥할 때가 있다

내가 어렸을 때 아빠는 잘생기고, 호탕하고, 유쾌한 분이었다. 남에게 싫은 소리도 하지 않아 주변에 사람이 많았다. 누나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아빠는 40대였지만 그때 사진을 보면 여전히 청년의 느낌을 풍겼다. 누나는 아빠가 최수종을 닮았다며 칭찬하곤 했다.


아빠는 요리를 잘한다. 충청도 출신인 아빠는 서울에서 자취 경험이 있어서 김치찌개나 김치볶음밥, 닭볶음탕이나 칼국수 등의 음식을 잘했다. IMF 때 아빠가 1년 정도 일을 쉰 적이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는데 아빠가 김치볶음밥을 해서 내 그릇에 담을 때는

‘고기 많이~~~’

라고 외치며 고기를 많이 담아 줬다. 야채를 싫어하고 편식이 심했던 나에게 아빠는 취향에 맞게 음식을 퍼줬다. 아빠가 해주던 김치볶음밥은 투박하게 썰린 돼지고기에 두툼한 비계가 달려 있었다. 다행히 나는 살코기 보다 비계를 더 좋아하는 아이였다. 아빠가 ‘고기 많이~~~’라고 외치던 게 좋았는지 아직도 그게 기억에 남는다. 사랑받는 느낌이었다. 살면서 아빠에게 감사한 것은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뭐는 꼭 해라, 뭐는 절대로 하지 마라, 등의 이야기를 하신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냥 지켜봐 줬고, 알아서 잘 하겠 거니 믿어 주셨다. 그게 감사하다.


아빠의 삶은, 어쩌면 그게 우리 가족의 삶일 수도 있는데, 순탄하지는 않았다. 입시 학원 강사를 하다가 자영업을 하셨는데 그게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았다. 그게 왜 잘 안 됐는지에 대해서는 아빠로도 할 말이 많을 테고 그런 상황을 지켜본 어린 나도 여러 감정을 느꼈지만 이미 다 지난 일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어려서는 그런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지금 보니 누구의 삶이든 원하는 대로만 풀리는 삶은 별로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빠는 그저 아빠의 삶을 살아낸 것이고 그의 운명을 걸어온 것이다. 그의 운명에 대해 잘못을 따질 수는 없다.


혹시 자신의 운명이 통제대로 잘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 실력과 그 노력에 박수를 쳐주고 싶다. 하지만 자기 뜻대로 사는 건 소수의 몇몇이며, 운이 아주 좋은 사람들이다. 무슨 소리야 이 악물고 살아서 그런 거야, 얼마나 노력하면서 살았는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노력하는 능력도 재능 중에 하나이고 그런 재능을 가진 것 자체가 행운이라는 말이다.


그걸 시기하거나 평가 절하하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멋지게 개척하고 꿈을 이뤄 나가는 사람들, 최선을 다해 사는 보통의 사람들, 모두 멋있고 대단하다. 나 또한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노력으로 성과를 이루는 게 멋진 일이라고 해서 그 반대의 사람들을 비난할 근거가 되면 안 된다. 노력해서 성공한 건 박수 칠 일이지만 노력했음에도 잘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비난하기 어렵다. 마음 아픈 일이다. 사람들은 그저 자신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주어진 운명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어렸을 때는 아빠가 무섭기도 했다. 평소에는 친구처럼 재미있는 아빠였지만 가끔 화를 내면 무서웠다. 요리조리 잘 도망쳤지만 한두 번은 효자손으로 종아리를 맞기도 했다. 그런 아빠였는데 이제는 환갑이 넘어 머리가 쇤 걸 보니 마음이 짠하다. 무릎도 아프고 노안도 오고 점점 더 노인이 되어가고 있다. 그걸 보면 마음이 안 좋다.


한 가지 신기한 건 나이가 들 수록 아빠에게 더 마음이 간다는 것이다. 힘이 빠지는 모습이 안쓰러워 그런 건지, 아니면 독립해서 떨어져 사니 애틋함이 생기는 건지,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이런 감정이 드는 건 결국 아빠가 인간적으로 나에게 좋은 아빠였기 때문이다. 내가 재수를 하고 싶다면 재수를 시켜줬고 이빨이 못생겨 괴로워하니 치아교정을 시켜줬다. 공부를 안 해도 뭐라고 안 했고 밤새 술 마시고 집에 들어와도 잔소리하지 않았다. 반면에 편도선이 부어 목감기에 걸리면 걱정해 줬고, 축구하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묵묵히 내 삶을 지켜 봐줬고 그런 덕분인지 나는 독립적인 성인, 나만의 가치와 철학을 가진 주체적인 어른이 될 수 있었다.


아빠 차를 탔던 추억이 많다. 중고등학교 때 입시 학원도 아빠 차를 타고 많이 다녔다. 수능이 끝났을 때도 아빠가 데리러 왔고 육군사관학교 실기 시험을 볼 때도 아빠 차를 타고 시험장에 갔다. 군에 입대할 때도 아빠가 데려다줬고 전역하고 이삿짐을 옮길 때도 아빠 차를 탔다. 처음으로 혼자 자취할 때도 아빠차를 타고 부동산에 갔다. 그 길이 막힐 때도 있었고 사고로 잠시 멈출 때도 있었지만 아빠 차 안에서 나는 세상을 배웠고 묵묵히 운전해 준 아빠의 사랑으로 이제는 나만의 운전대를 잡고 있다.


아빠를 생각하면 울컥할 때가 있다. 아빠가 조금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 아빠를 사랑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언어들이 사는 세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