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독후감
막연하게 시가 좋았다. 그리고 그 이유를 고등학교 시절 이미 찾았다는 것을 사실 이번 시집을 읽으며 깨달았다. 때는 빅뱅이 아주 잘나가던 시절 태양이 솔로 곡을 냈고, 아주 자극적이며 솔직한 ‘나만 바라봐’라는 곡. “내가 바람 펴도 넌 절대 피지마, 나는 너를 잊어도 너는 절대 잊지마“와 같은 가사다. 이 노래를 접하자마자 내 머릿속은 충격으로 큰 폭풍이 일었다. 굉장히 은밀한 인간의 본성을 입밖으로 낼 수 있구나. 이것이 표현이고, 이것이 시 노래 음악 예술 그 무엇이로구나. 벅찬 발견에 공감을 얻고자 당시 친구들에게 이 노래가 솔직해서 너무 좋다고 말했고, 대부분의 친구들은 마치 바람을 피는 노래속 남주인공을 옹호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아, 그게 아닌데. 공감의 간극을 좁히기에 나는 너무 부족했고, 뾰로퉁해진 마음에다 스스로 시어를 덧칠할 뿐이었다. 그 말이 그 말이 아니잖아. 말을 길게 늘어놓지 않아도 눈치껏 상황껏 예술성에 대해 공감할 순 없나. 그리고 나는 국어국문학과로 진학했고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 시 같은 순간을 기억한다. (물론 이 인과관계는 시적 허용이다.)
그래서 내게 시는 귀하다. 날이 갈수록 닿을 일이 없고 해가 갈수록 읽을 기회는 날아간다. 그래서 이 시집은 더할 나위없이 포근하게 읽혔다. 아주 얇고 날카로운 종잇장이 여러번 베인 듯한 기분이 들어도. 누적된 상처가 아물지 않은 채 건조한 겨울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야기들임에도. 시어로 자주 나오는 소재가 혀, 입술, 피와 같이 붉고 여린 것들이라 더 따갑게 느껴짐에도. 그럼에도 살아야지, 그럼에도 버텨야지, 그럼에도 잘 살아왔고 잘 버텨왔구나 하는 투명한 위로를 느꼈다. 특히 <서시>에서 그 감성이 제일 피어올랐다. 운명이 말을 걸어온다면 제일 지치고 힘든 순간 나에게로 다가온다면 나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 이 시를 만난 이후로 감성과 상상을 곱해본다. 쉬이 대답할 자신이 없다. 대신 무언가를 내밀 것 같다. 아니 따뜻한 손을 건네고 눈을 바라볼 것 같다. 이것만으로도 나는 다시 충만해진다.
시 만나기를 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