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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우연 Nov 13. 2019

하나의 음식은  한 사람의 역사다

프롤로그

10년이 넘도록 텔레비전을 보지 않다가, 최근에 보는 일이 많았다. 손가락이 아플 만큼 눌러도 다 볼 수 없는 많은 채널이 있었다. 더 놀라운 건 그 많은 채널이 모두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어느 채널이나 죄다 음식이 등장했다. 혼자 먹고, 요리해 먹고, 둘이 먹고, 모여 먹고, 가서 먹고, 시켜 먹고, 잡아먹고, 싸가서 먹고, 싸와서 먹고…. 먹는 주체만 달라질 뿐 다른 것이 없었다.


가수가 나와 신곡을 소개하는가 싶더니 먹기 시작한다. 정치인은 현 세태를 비판하다 말고 허겁지겁 먹는다. 배우는 영화나 드라마 속의 한 장면처럼 우아하게 먹고, 코미디언은 먹는 것조차 우스꽝스럽게 먹는다. 운동선수는 한창 칼로리를 소비하고 먹는다. 어제는 친구를 데려와 먹더니, 오늘은 가족과 함께 먹고, 내일은 사돈을 부른다. 모두 먹기 위해서 텔레비전에 나온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먹고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 아니냐며 입맛을 다신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허기진 시대에 대한 은유이자, 메타포가 아닐까 애써 포장해 보아도 종일 계속되는 포식자들의 도 넘은 과식 앞에서 소화불량에 걸린 것처럼 속이 메슥거리는 것을 어쩔 수 없다. 방금 전에 본 출연자가 다른 채널에 나와서 방금 전에 한 대화를 비슷한 부류의 패널들과 나누면서 비슷한 음식을 먹을 때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음식의 차별성이 없으니 얼마나 빨리, 많이, 혹은 짜거나 맵게 먹는가로 승부를 건다. 시각적 미각은 자극적일 수밖에 없다. 하나의 새로운 음식이 발견되면 벌떼처럼 달려들어 채널마다 우려먹는다. 재탕 삼탕도 모자라, 한 번 카메라가 훑으면 메뚜기떼가 지나간 자리처럼 초토화된다. 수많은 먹방이 생산되는 시대에 아이러니하게도 음식은 갈수록 단조로워진다. 종류가 많은 듯해도 막상 나오는 음식은 다 거기서 거기다.


방송에 나와서 만능 소스랍시고 위험한 발언을 일삼는 요리사를 보면 한국음식은 마늘과 간장과 설탕, 고춧가루로 끝이구나 단정하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경험과 상상이 결여된 음식은 자칫 공허한 허기만 남기고 사라질 공산이 크다. 사람은 일정한 나이가 되면 음식을 먹는 게 아니라, 추억을 먹는다.


예전에 부산으로 여행을 갔을 때였다. 한밤중에 겨울바람을 뚫고 어디선가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창문을 열자, 어떤 사람이 어두운 길목에서 소리 지르는 게 보였다. 어깨에 무언가를 지고 다니며 파는 중이었다. 찹쌀떡이나 도토리묵이겠거니 했는데 엉뚱하게도 재첩국이었다. 맑고 담백한 국물 맛이 시원했다. 부산에선 재첩국을 양동이로 지고 다니며 그 자리에서 바로 데워주는 문화가 있었다. 나중에 부산이 고향인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처음 듣는다는 표정이었다. 한 후배는 1.4 후퇴 때 얘기냐며 코웃음을 쳤다. 부산에 머무는 일주일 동안, 재첩국을 파는 장사치를 사흘이나 만났고, 그리 오래 전도 아니다. 술을 즐기는 편이 아닌데도, 겨울날 칼바람 속에서 문득 그때 먹은 뜨끈한 국물이 그리워지곤 한다. 느끼한 오뎅국물과는 차원이 다르다.


제삿날 큰집에 가면 내가 유난히 좋아하던 음식이 있었다. 싱싱한 오징어 몸통에 햄, 단무지, 어묵, 파, 당근, 오이 등을 김밥 재료처럼 길게 썰어 넣은 뒤, 아랫단을 이쑤시개로 막고 찜통에 쪘다. 쭈글쭈글한 오징어는 익으면서 팽팽하게 부풀었다. 제사가 끝난 뒤 김밥처럼 가로로 썰어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었다. 그게 내가 아는 오징어의 순대였다. 지금은 명물이 된 오징어순대는 내가 아는 것과 사뭇 달랐다. 몸통에 다리를 넣고 찹쌀과 각종 채소를 다져서 채웠다. 당면을 넣는 곳도 있다. 어떤 게 전통방식인지는 두말할 것 없다. 큰 어머니는 다리를 삶으면 질겨지기 때문에 갈아서 김치에 넣거나 전에 부치거나 젓갈을 해 먹었다. 질기고 고급취 나는 요즘의 오징어순대보다 김밥 같은 싸구려 오징어순대가 그립다.


한겨울 포항에는 부두와 방파제마다 과메기가 널려있었다. 띄엄띄엄 놓인 연탄 옆에 자리를 깔고 앉아 언 손으로 반 건조된 청어를 뚝뚝 끊었다. 불에 구워 배춧잎에 올리고 고추와 마늘을 된장에 찍어 먹었다. 꽁치가 아닌 청어로 고기가 다르기도 했지만, 추운 날 손을 연탄불에 녹여가며 먹는 것이 과메기의 맛이었다. 추울수록 그 맛은 더 배가됐다. 친구 따라 전주에 갔을 때, 튀김을 삼겹살처럼 상추에 싸 먹을 때도 그랬다. 이상하고 어색한 그것이 그 자리에선 아무렇지 않게 통용됐다.


가을날, 할머니와 나는 밤송이를 주워다가 하룻밤 소금물에 담가 벌레를 뺐다. 꾸물꾸물한 벌레가 밤보다 더 많이 나왔다. 솥에 밤을 넣어 찌고, 식으면 밤을 반으로 갈라 알맹이를 따로 모았다. 할머니보다 더 많이 모으려고 숟가락으로 껍질이 뭉개지도록 계속 팠다. 그렇게 알맹이가 모이면 으깨서 꿀을 섞어 반죽했다. 가루가 떡처럼 쫀득해지면 손바닥으로 굴려서 작은 공처럼 빚었다. 거기에 깨를 묻힌 건지, 다른 가루를 묻힌 건지, 살짝 굳어 말랑말랑한 그것을 찾으려고 할머니 없을 때 얼마나 부엌을 뒤졌는지, 그것만 기억에 남았다.


아무 감흥 없이 스쳐간 사람과 우연히 먹은 음식, 한 때 각별한 사이였는데 지금은 소원해진 친구처럼 멀어진 음식, 한 번의 인연이 계속 가슴에 남는 사람과 음식, 처음엔 그저 그랬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진가를 발견하게 되는 사이처럼, 음식도 사람의 관계를 닮았다. 음식을 떠올리는 건 지나간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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