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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우연 Nov 13. 2019

사라진 바다

명태껍질죽

명태는 그 상태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많다. 얼었으면 동태. 얼었던 적이 없으면 생태, 바짝 말랐으면 북어, 반건조면 코다리,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면서 고산지대에서 건조된 황태, 황태가 되지 못하고 색이 변한 먹태와 백태, 덜 자란 건 노가리, 노가리보다 작은 애기태. 그 밖에도 깡태, 골태, 무두태, 짝태, 성태, 진태, 가태, 꺽태, 선태, 파태 등 별별 이름이 많다. 명태 이름 짓기가 유행이나 된다는 듯이 동네마다 저들의 편의와 기호에 맞게 온갖 이름을 갖다 붙여서 생긴 현상이다. 가을에 잡힌 걸 추태라고 부르는 곳도 있다. 일단 뒤에 ‘태’가 들어가면 명태라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 편하다.


내가 어릴 때 주문진과 거진항은 그야말로 명태 천지였다. 배에서 명태가 폭포처럼 쏟아지고, 한쪽에선 공판장이 서고, 궤짝이 수북이 쌓인 창고엔 얼음과 명태가 흘러넘쳤다. 배에서 내린 어부들은 모닥불에 북어를 구우면서 왁자지껄 막걸리를 마셨고, 수건을 머리에 두른 아주머니들은 둘러앉아 명태 배를 가르며 수다를 떨었다. 어린애들은 돌 대신 명태를 던지며 놀았다. 바다로 흘러가는 하수구 밑에 갈매기와 쥐가 명태 내장을 먹기 위해 몰려들었다. 집집마다 빨래처럼 명태가 널려있었고, 어딜 가나 파리가 끼는 비린내가 진동했다. 


발에 치이는 게 명태라 선착장 한 바퀴만 돌아도 거저 얻는 명태가 한 보따리였다. 그래서 밥 빼고 국, 찌개, 반찬 할 것 없이 식탁 위엔 죄다 명태의 독무대였다. 우스개로 그쪽 지역에선 '젖 때면 명태'라는 말이 있었다. 머리부터 아가미, 창자, 알까지 어느 것 하나 버리지 않고 알차게 먹었다. 한 번은 배탈이 심하게 나서 먹는 대로 토했다. 약도 듣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장염인데, 그땐 무슨 죽을병인 줄 알았다. 며칠 아무것도 먹지 못하자, 할머니는 어성초와 쑥을 달여 먹였다. 토사에 좋다고 했다. 효능이 있었던 건지, 아니면 나으려고 그랬는지 속이 편안해졌다. 


할머니는 빨랫줄에 걸려있는 명태에서 껍질을 벗겨냈다. 물에 불리고 끓이고, 다시 식은 밥을 넣어 풀이 되도록 죽을 쒔다. 맛도 모르고 간장 조금 타서 억지로 삼켰다. 다음날 자고 일어났더니 몸이 사우나에 다녀온 것처럼 개운했다. 갑자기 배가 고팠다. 할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어제 먹은 죽을 찾아 냄비를 열었다. 죽이 굳어 젤리처럼 말랑말랑했다. 숟가락으로 떠서 먹기 좋았다. 씹는 질감이 좋고 전날에는 알지 못한 구수한 맛이 났다. 배가 고파서였을까? 냄비 바닥이 금세 드러났다. 


그때 내가 먹은 게 죽인지, 묵인지 모르겠다. 그 뒤로 먹을 일이 없었다. 파는 곳도 없고, 만드는 사람도 없다.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어쩌다 한 번 기억을 되살려 명태껍질로 죽을 만들었다. 예전의 그 맛이 아니었다. 할머니가 다른 걸 섞지 않았다면 내 입맛이 바뀐 탓일 게다. 아이들도 먹지 않아서 식을 때까지 기다려 혼자 퍼먹었다. 식으니까 그 맛이 살아났다. 자는 손자의 배를 쓰다듬는 쭈글쭈글한 손맛. 


죽을 맛있게 먹는 방법이 있다. 그쪽 동네에선 김장김치 담글 때 배추보다 명태 아기미를 더 많이 넣는다. 배추보다 명태가 싸기도 하거니와, 몇 개월 땅에서 푹 삭은 아가미는 강원도의 추운 겨울을 이기고 봄을 보내면서 절대적 미각의 경지에 도달한다. 맛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명란, 창란보다 아가미젓을 더 높게 치는 이유다. 뜨거운 죽이 아니어도 좋다. 찬밥을 물에 말아도 된다. 아가미를 얹고 김치와 함께 씹으면 밥이 바다가 된다.


그리 오래 전도 아닌데, 다 옛날 얘기가 됐다. 명태는 남획으로 씨가 말랐다. 지금 시중에 도는 것은 러시아산이다. 노가리할 것 없이 멸치 만한 애기태까지 쓸어 담았으니 참 어지간했다. 명태 양식에 성공하고 치어를 동해안에 방류한다는 소식이 간간이 들려오지만 예전과 같은 활황기는 오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 변하는 속도가 나이 먹는 속도보다 빠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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