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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우연 Nov 13. 2019

한 순간을 위해 20년을 기다리다

대비모주

제주에 관한 이야기를 수집하다가 광산부부인(光山府夫人) 노씨가 제주에 유배됐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선조의 계비(繼妃)인 인목대비의 어머니였다. 여성이 유배된 건 조선을 통틀어 극히 드문 사례다. 광해군에 의해 딸을 제외한 일가가 몰살당했고, 왕비의 어머니에서 하루아침에 여염집 아낙으로 추락하는 수난을 겪었다. 


그녀와 관련하여 두 가지 유명한 일화가 있다. 하나는 생계를 위해 술지게미를 얻어다가 모주로 만들어 팔았다는 것이다. 왕비의 어머니가 빚었다 하여 대비모주. 후에 ‘모주’로 불리다가, ‘막걸리’가 되었다. 다른 일화는 까치와 관련이 있다. 노씨부인을 모셔오라는 인조의 전교를 품은 예조참의가 목포항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로 향할 때, 돛대에 까치 한 마리 앉아있더라는 설. 제주에는 본래 육지 텃새인 까치가 살지 않던 곳인데, 이후 까치가 살게 됐고 까치가 울면 좋은 소식이 온다는 속설이 탄생했다.


내가 주목한 것은 노씨부인과 광해군의 유배 시점이었다. 기록상으로 보면 두 사람이 제주에서 마주쳤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럼에도 나는 두 사람을 만나게 하고 싶었다. 권력에서 쫓겨난 남자와 그에게 원한을 품은 여자. 서로 속고 속이는 암투 속에서 과연 남자는 재기할 수 있을까, 아니면 여인이 복수에 성공할 것인가. 바라보는 지향점은 다르지만 서로가 품은 욕망은 같다. 한때 권력의 정점에서 밑바닥으로 떨어진 처지 또한 같다. 나는 모주와 까치 일화를 섞어 하나의 줄거리를 짰다. 때는 광해군에 의해 계축옥사가 일어난 1613년부터 인조가 반정을 일으킨 1623년, 그리고 그 후 10년의 세월을 거슬러 간다.


점심이 지났는데도 주막 안은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도매업을 하는 장사치부터 장터를 떠도는 장돌뱅이, 새벽부터 밭을 일구느라 허기진 농사꾼과 이제 막 배에서 내린 뱃놈들까지 모주를 마시기 위해 득시글거렸다. 그들에겐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주막 안에 있는 모든 사내의 눈이 한 곳을 향했다. 부엌 아궁이 옆에서 어떤 여인이 국밥을 말고 있었다. 천하절색으로 소문이 난 그녀는 마흔을 넘긴 나이에도 고고한 자태와 단아한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고상하면서 어딘가 애달파 보이는 여인, 주막에 어울리지 않는 품위를 간직한 그녀가 바로 인목대비의 모친인 노씨부인이었다. 


노씨부인은 광해군에 의해 아들과 남편을 잃고 혈혈단신으로 제주로 유배된 처지였다. 제주에 발을 붙이자마자, 그녀의 딸인 인목이 서궁으로 유폐되었고, 그것도 모자라 강화로 쫓겨났다. 그리고 얼마 후, 그녀의 손자인 영창대군이 불 끓는 구들장에서 타 죽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왔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는 갓 여덟 살이었다. 


어린 손자의 울음소리가 밤마다 매서운 칼바람 속에서 들려왔다. 노씨부인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몇 번이고 죽을 작정으로 바다에 나갔지만 서슬 퍼런 바다는 번번이 그녀를 밀쳐냈다. 온 가족을 잃은 슬픔에 가슴이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갔다. 갯바위에 앉아 하루 종일 미친년처럼 울다가 웃다가 실신했다가 깨어나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런 그녀를 보고도 사람들은 그냥 지나쳤다. 그녀의 얼굴에 깃든 무심함과 냉소를 모를 리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독기가 자랐다. 살아야 한다. 잊지 말고 살아야 한다. 세상이 뒤집어지는 것을 살아서 봐야 한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한 번도 해본 일 없는 노동을 시작했다. 어머니에게 어깨너머로 배운 주조법이 있었다. 술지게미를 얻어다가 모주를 만들어 팔았다. 처음 지는 항아리에 허리와 어깨가 쑤시고 고았던 손마디가 갈라졌다.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처음엔 고전하던 장사가 입소문이 나면서 주문이 늘었다. 타고난 미모와 대비의 모친이라는 유명세 덕에 주막은 날로 번창했다.


그렇게 10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날벼락같은 소식이 도읍에서 날아왔다. 다름 아닌 능양군이 반정을 일으켜 왕권을 잡았다는 소식이었다. 노씨부인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한동안 정신을 잃었다. 몸이 떨리고 숨이 막혔다. 이제 한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보다 자식에 대한 원한이 사무쳤다. 마른 줄 알았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며칠을 앓아누운 그녀에게 궁으로 복귀하라는 전갈이 왔다. 딸 인목대비가 궁에 입궐해서 노씨부인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던 일이던가. 딸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러나 운명은 극적인 순간에 찾아오는 법이다. 돌아갈 채비를 서두르는 시점에 폐위된 광해가 제주에 올 것이라는 소문이 객상들 사이에서 떠돌기 시작했다. 딸에게 편지를 써 능양에게 광해를 죽여 달라는 상고를 올려보지만 그녀의 의견은 내정간섭으로 무시되고 만다. 


노씨부인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자신의 일가족을 몰살시킨 원수가 같은 땅에 온다는 것이 다시없을 좋은 기회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녀는 한양으로 복귀하지 않고 도로 짐을 푼다. 기필코 남편과 아들, 그리고 손자의 원한을 풀어야 한다. 더구나 남아있는 딸을 위해서도 자신이 해결해야만 했다. 딸의 손에 피를 묻힐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날부터 노씨부인은 복수의 칼을 갈았다. 하루가 가고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났다. 석 달이 흘러도 광해가 온다는 소문만 무성할 뿐, 정작 그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참고 기다렸다. 기다림은 참을 수 있었다. 운명은 그녀의 바람을 거역했다. 광해가 제주가 아닌 강화로 유배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낙담한 그녀에게 평소 연정을 품고 있던 한 거간꾼이 광해의 강화행은 어디까지나 능양의 정치적인 판단일 뿐, 결국 제주로 오게 될 것이라며 그녀를 붙든다. 10년을 기다렸으니 조금 더 기다려 보자는 뜻이다. 세상에는 없지만, 영화 같은 이야기에는 언제나 헌신적인 조력자가 등장하는 법이다. 가족을 잃은 젊은 미망인라면 더더욱. 그의 말에 노씨부인은 마음을 돌이킨다. 인목대비가 하루속히 돌아오라는 전갈에도 그녀는 꿈쩍하지 않는다. 놀란 딸이 왕에게 계속 광해의 숙청을 청원하지만, 애초에 인목대비의 의견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렇게 일 년이 흐르고, 이 년이 지나는가 싶더니, 어느덧 다시 10년의 무상한 세월이 흘렀다. 이제 그녀의 귀밑은 백 살이 성성했다. 거간꾼은 남편이 되었고, 두 사람의 인생에서 황금기가 지나가고 있었다. 이대로 끝나는가 싶었다. 인고의 세월을 견뎌온 그녀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온다. 병자호란이 발발하면서 내정적으로 위기에 몰린 왕은 광해를 강화에서 제주로 보내기로 결정한다. 노씨부인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킨다. 그녀는 광해를 시해할 구체적인 계획에 돌입한다. 그런데 한 가지 변수가 있었다. 어느 누구도 광해의 얼굴을 모른다는 점이었다. 더구나 아무리 폐위된 왕이라고 할지라도 경비가 느슨하지 않았다. 


그 무렵, 갑마장을 감독하러 온 신참관리관이 노씨부인의 속내를 눈치채고 접근해왔다. 도와줄 테니, 인목에게 청탁하여 자신의 출세길을 열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는 광해의 얼굴을 본 일이 있을 뿐만 아니라, 언제 제주에 입항하는 지 알 수 있다고 했다. 특별한 날이 아니고서는 말 두 필이 화북항으로 갈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윽고 갑마장 관리의 말대로 몹시 바람이 심하게 불던 어느 날, 그토록 기다리던 초로의 남자가 드디어 제주에 도착한다. 포졸들에게 둘러싸인 남자는 수많은 군중들의 시선에도 의연했다. 당당한 걸음, 올곧은 자세, 근엄하고 품격 있는 행동은 누가 보아도 왕이었던 광해가 확실했다.


그날 저녁, 제주 목사가 주관하는 조촐한 만찬회가 관덕정에서 열렸다. 그곳에 노씨부인이 신분을 숨기고 납품업자로 참관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순탄하게 진행됐다. 분위기가 무르익고 술이 동이 나자, 미리 포섭해둔 현감의 권유로 노씨부인이 만든 모주를 가져오게 했다. 

“이게 그 유명하다는 모주 아니오?” 

광해가 먼저 알아보았다.

“아니, 군께서 어찌 아십니까?” 

“아다마다. 왕후의 모친께서 직접 빚은 술이라는 걸 전국 팔도에 모르는 이가 어디 있겠소? 내 제주에 오면 꼭 한 번 마셔보리라 다짐하던 참이었소.” 

“허허, 잘됐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광해는 모주를 마시고 그 자리에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노씨부인은 마지막까지 그의 죽음을 똑똑히 목격했다. 죽어서도 남편과 아들과 손자에게 전하고 싶었다. 광해가 죽자, 술자리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어수선한 틈을 타 밖으로 빠져나온 그녀는 변장을 하고 조천항으로 몸을 숨겼다. 밤새 횃불을 든 군졸들이 경계를 강화하고 그녀를 쫓았다. 그 과정에서 그녀를 조력해온 사람들에게 화가 미쳤다. 남편이 그녀를 극적으로 구하고 대신 죽는 일이 발생했다. 몇 집은 불에 타고, 몇은 칼바람을 피하지 못했다.


다음날 새벽,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노씨부인은 예정대로 추자도로 향하는 작은 배에 몸을 실었다. 바로 육지로 가는 배가 있지만 삼엄한 경비를 피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했다. 배가 항구를 떠나 영주산의 영실기암만 보이게 되자, 모든 게 끝났다는 안도감에 그녀는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딸에 대한 그리움과 연인이었던 거간꾼, 그리고 그녀의 곁을 스쳐간 얼굴들이 수면 위에 어른거렸다.


어디선가 날아온 까치가 시끄럽게 울어댔다. 그 소리에 잠을 깬 노씨부인은 뱃머리에 올라섰다. 눈 앞에 섬이 파도에 일렁였다. 이제 모든 게 끝났구나 하는 실감이 들었다. 시원할 줄 알았는데 어딘지 모르게 허전했다. 추자도에 도착한 그녀는 육지로 가는 배편을 알아보다가 우연히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별장과 두 명의 군졸에게 호위되는 수상한 남자였다. 흰머리가 희끗희끗하고 매우 늙었으며, 등이 구부정하고 행색이 초라했다. 죄인이 분명한데 포승줄이 없었다. 이상한 낌새에 노씨부인은 자신도 모르게 뒤를 쫓았다. 그들은 그녀가 타고 온 배에 몸을 실었다. 다시 제주로 돌아가는 배였다. 노씨부인은 별장에게 물었다. “저 노인이 무슨 죄를 지었소?” 별장이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가장 큰 죄.” “그게 뭐요?” 노씨부인은 심장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저리 비키시오.” 군졸이 노씨부인을 떠밀었다. 노씨부인은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혀 부두에 꼼짝 못 하고 출발하는 배를 지켜봤다. 


그때 바람 한 점이 불어와 배에 탄 남자의 소맷자락을 들추고 달아났다. 남자의 왼쪽 손에 커다란 사마귀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갑자기 오래 전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손자인 영창대군이 태어났을 때, 전남편 김제남과 나누었던 대화였다. 


“여보, 두고 보시오. 이 놈이 왕이 될 거요.”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내가 장담하오.” “쉿, 누가 듣겠어요?” 남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공빈, 인빈, 정빈이 낳은 자식들을 보오. 누구 하나 쓸만한 놈이 있는지.” “왕이 인빈을 총애한다지요?” “그야 왕후마마에게 후생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오. 이제 사정이 달라졌지.” “공빈의 자식들이 가만있겠어요?” “모르는 소리. 임해는 골통이고 광해는 못난 데다 흉측한 사마귀까지 가지고 있잖소.” “사마귀라니요?” 노씨부인이 놀라 물었다. “왼손 팔뚝에 커다란 사마귀가 있다오. 어찌 나라를 다스릴 존엄한 옥체에 그런 불경스러운 것이 있을 수 있단 말이오? 왜란이 일어난 것도 다 그 탓이라지 않소.” 노씨부인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다지. 아마.” 그러면서 전남편은 갓 난 영창의 몸을 이리저리 들춰보고는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배가 점점 멀어졌다. 허름한 차림의 남자는 갓을 부채 삼아 그윽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딘지 도인과 같은 풍모가 느껴졌다. 노씨부인이 손을 뻗어보지만 소용없었다. 불현듯 거간꾼 남편을 죽인 화살촉에 어떤 문양이 기억났다. 그땐 정신이 없어 그냥 지나쳤지만 갑마장에서만 쓰는 표식이 분명했다. 노씨부인은 갈증을 느꼈다. 처음부터 모든 게 이상했다. 광해가 말을 타고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할 리 없었다. 연회도 죽음도 그녀가 미처 눈치채지 못한 함정이었다. 노씨부인은 숨을 쉬지 못하고 캑캑거렸다. 눈에 피눈물이 맺혔다. 속절없는 파도만 끊임없이 밀려와 발등에 부서졌다. 머리 위에서 까치가 시끄럽게 울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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