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국수
‘아버지. 그건 우리 닭도 아닌데 왜 그렇게 정성껏 돌보세요. 나는 사료를 한 줌 집어던지면서 가지를 먹어 시퍼래진 입술로 투정을 부렸다. 농장의 목책을 훌쩍 뛰어넘으며 아버지는 말했다. 네게 모이를 주기 위해서야. 양계장 너머 뜬, 달걀 노른자처럼 노랗게 곪은 달이 아버지의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이리저리 흔들 때마다 나는 아버지의 팔목에 매달려 휘 휘 휘파람을 날렸다. 내일은 펌프 가에 꽃 모종을 하자, 무슨 꽃을 보고 싶으냐. 꽃들은 금방 죽어요 아버지. 너도 올 봄엔 벌써 열 살이다. 어머니가 양푼 가득 칼국수를 퍼담으시며 말했다. 알아요 나도 이젠 병아리가 아니에요. 어머니. 그런데 웬 칼국수에 이렇게 많이 고춧가루를 치셨을까.’
기형도의 시 ‘위험한 家系(가계) 1969’ 두 번째 연이다. 아무리 읽어도 질리지 않는다. 아마 기형도는 1990년대 이후 한국문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시인이 아닐까 싶다. ‘가지를 먹어 시퍼래진 입술’이라든가 ‘달걀 노른자처럼 노랗게 곪은 달’ 같은 표현은 시대의 유행을 넘어 하나의 사조로 자리 잡았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다 따라 하는 통에 이러다 한국시가 기형도라는 무덤에 묻히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이런 현상은 점차 심화되어 문화계 전체로 확산됐다.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의 제목은 기형도의 시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릴 때 마지막 시구 ‘웬 칼국수에 이렇게 많이 고춧가루를 치셨을까.’를 두고 이건 왜 여기 있을까 고민했었다. 아무리 봐도 생뚱맞았다. 문맥의 흐름에서 툭 튀어나와 따로 놀았다. 내가 보기에 칼국수는 가난의 상징으로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닭과 꽃으로 이어지는 희망의 열망 같은 것도 없었다. 게다가 칼국수에 고춧가루를 치다니. 그때까지 내가 아는 칼국수는 바지락이나, 고기육수, 멸치, 다시마, 버섯 등으로 국물을 낸 맑은 색이 대부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겉절이에서 고춧가루가 묻어날 텐데 굳이 따로 칠 이유가 없었다. 짜장면에 고춧가루를 뿌리는 어른들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칼국수가 하나가 아니란 걸 알았다. 내가 먹는 건 극히 일부였다. 기계로 뽑아 건조한 일반면(메밀면, 냉면, 막국수, 국수면, 밀면 등)을 제외하고도 손으로 반죽하여 칼로 써는 전통적인 의미의 칼국수 요리가 전국에 수두룩했다. 태안 밀국낙지국수(박과 낙지로 낸 국물에 칼국수와 낙지를 넣는다), 전주 들깨 칼국수, 강릉 장칼국수, 정선 올챙이국수(면은 옥수수 전분으로 죽을 쑤어 틀로 뽑고, 국은 콩국을 쓴다), 산청 어탕국수, 안동 누름국수(안동국시의 원조, 반죽에 콩가루 섞는 것이 특징이다. 원래 은어로 국물을 냈으나 지금은 소고기를 쓴다), 포항 모리국수, 김해 물국수, 정선 콧등치기국수, 영월 꼴두국수(밀가루에 감자전분을 섞는 게 정석. 면이 꼴뚜기 같이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꼴도 보기 싫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군산 팥칼국수, 김제 도토리 칼국수(도토리가루로 반죽한다), 담양 선지국수(선지가 들어간 돼지 국물에 면을 넣는다), 제천 토리국수(국물에 그냥 말면 ‘토면’이고, 도토리묵, 지단 등을 얹으면 ‘토리면’이다), 금산 어죽국수 등등…. (옥천 생선국수는 이제 칼국수면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중 고춧가루가 들어가는 칼국수는 태안 밀국낙지와 강릉 장칼국수, 산청 어탕국수, 포항 모리국수, 금산 어죽국수가 대표적이다. 조리 후 위에 살짝 뿌리는 게 아니라, 칼칼한 맛을 낼 목적으로 고추장을 풀고 고춧가루를 집어넣는다. 점점 나이가 들면서 맑은 국물에서는 느끼지 못한 붉은 국물의 매력을 알게 됐다. 먹고 나면 입안이 얼얼하고 땀이 흐른다. 그렇게 땀을 쑥 빼고 나면 개운하다. 맑은 국물의 개운함과는 다르다. 매운 걸 먹으면 땀이 흐르고 눈밑이 촉촉해진다. 마침내 땀과 눈물이 섞이고 콧물이 흐른다. 내 친구는 여자와 헤어지면 매운 떡볶이를 먹으러 간다. 고통은 고통으로 잊는 법이다.
‘웬 칼국수에 이렇게 많이 고춧가루를 치셨을까.’가 슬픔에 대한 은유라는 걸 나이가 들어 알았다. 닭장을 넘지 못하는 어린 병아리의 절망감을 보면서 나는 절망한다. 기형도가 젊어서 안 걸 나는 왜 나이가 들어 겨우 알게 되었을까. 광명에 있는 기형도문학관을 찾아갔다. 고즈넉한 장소에 고즈넉하게 있었다. 생전 손으로 쓴 육필원고가 많았다. 시만 잘 쓴 게 아니라, 글씨도 잘 썼다. 그의 글씨체를 취합해 서체로 만들어도 좋을 것 같았다. 전시장에 그를 향한 독자들의 편지가 공개되어 있었다. 사랑하면 닮는다더니 독자들의 글씨도 참 기형도스러웠다. 내가 낄 자리가 없었다. 나오면서 건물 밖에 숨어있는 비석을 발견했다. 문득 을씨년스런 바람이 부는 골목으로 그가 떠난 지 30년이 지났다는 걸 깨달았다.
너는 떠나고 나는 늙었네.
젊은 연인이 벤치에 앉아 대화를 나눈다. 괴테를 좋아했다지? 그래서 법학과에 들어갔다고. 괴테도 동성애자였다던데. 기형도는 아닐 거야. 주변 증언도 그렇고. 그래도 상관없지만, 그랬다면 더 슬플 것 같아. 뿌연 안개 뒤에 숨어버린 것 같아서. 스파게티 먹으러 가자. 젊은 연인이 허리를 감고 떠난 자리에 내가 앉았다. 아직 모르는구나. 그게 알고 싶으면 고춧가루 팍팍 들어간 칼국수를 먹으러 가야지. 눈물 흘리며 먹는 게 인생인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