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관계
누군가와 이야기할때면 항상 눈을 피했다. 정확히는 다른 곳을 바라봤다. 그래야 하고 싶은 말이 구조적으로 잘 정리 됐다. 글이나 행동이 아닌 입으로 뱉어내는 말을 해야 할 때면 준비기간이 필요했다. 준비된 생각을 전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그다지 말주변이 없는 성격이 합쳐진 결과다. 두뇌회전이 느린 탓일수도 있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시간이 미묘하게 대화의 흐름을 방해할만큼 길었다. 바로 말을 잇기에는 길고 마냥 답변을 하기에는 짧은 미묘한 공백. 무엇보다 상대방을 의식하는 신경쓰임이 가장 컸다. 내가 말을 하는동안 논리에 맞지 않다고 뭐라 생각하면 어떡하지,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하다가 눈동자가 흔들리고 중언부언하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들이 앞섰다. 차라리 눈을 보지 않고 말하기를 택했다. 자기계발 스피칭 학원 강사들의 자신감 가득찬 눈빛으로 상대방의 눈을 마주치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화 하라는 조언과 반대로 연습했다.
아이러니. 생각다운 생각을 한답시고 이성을 위해 나름대로 훈련 했으면서 오히려 그 생각들이 표현의 족쇄가 되어 본심을 가리는 가면이 되었다. 포장된 말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버렸달까. 정제된 표현을 위한 과정이라고 긍정적인 해석을 해볼 수 있지만 말하는 화자는 알지 않는가.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말이 흠결 하나 없도록 비치길 바라는 본심을 숨긴 점잖은 발버둥이라는 것을. 아이러니의 계속. 감성을 부차적인 요소로 여기면서 상대방의 감정에 신경 쏟으며 파악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 지적인 완성을 추구한답시고 내면을 파고드는 와중에 외부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훈련을 미처 하지 못한 결과다. A와 B를 거쳐 C로 진행되어야 하는 과정이 어그러지면 누군가의 감정과 상관없이 짜증을 내면서도 그들의 눈치를 보며 어떤 감정을 가질지 겁부터 먹는 모순덩어리. 아이러니의 향연. 친한 사이일수록 눈을 마주치기 더 힘들었다. 민망했다. 내 생각과 성격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친한 사이라면 내 속을 들킬까봐 더욱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상대방의 말을 들을 때는 또 다르다. 뚫어져라 상대방의 눈을 쳐다봤다. 상대방의 말을 들을 때면 내가 할 말을 준비하지 않고 머리속으로 생각만 하면 되니까.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거나 추임새를 넣을 뿐이다. 당최 일관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대중 앞에서는 또 다르다. 대학생 시절 여러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할 때나 회사에서 외부 컨퍼런스 발표를 할 때면 긴장 없이 말할 수 있다. 오히려 편할 정도다. 여러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아 즐거움을 느끼는 소위 '관종끼'가 존재하고 무대 위에 서면 정신을 반쯤 놓은 채 '미친 놈'이 되어 주인공이 된 것 마냥 행동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준비되었다는 안정감이 가장 컸다. 발표를 위해 자료를 만들고 혼자 연습하며 준비할수록 내 안에 안정감이 누적되어 어느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며 대화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들었다. 흠결을 덮으려는 점잖은 발버둥.
어느 순간부터 눈을 마주치며 대화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이 역시 상대방의 감정을 고려하고 의중을 파악하려는 소심한 배려심과 대화라는 두려운 행위 안에서 자신감있는 모습으로 비치기 위한 이성적 노력이 섞이며 발현된 탓이다. 그러나 말처럼 쉬울리 없다. 의지만 가지고 극복할 수 있는 문제였다면 진작에 눈을 마주쳤겠지. 최근에 와서야 눈을 마주치며 말 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직업을 갖게 되며 업무적으로도 필요한 스킬이 되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내가 말하는 분량보다 듣는 분량이 많아 눈을 마주치며 대화하는 인상을 충분히 줄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아직도 짧은 질문을 할 때조차 바디랭귀지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아무 문제 없이 눈을 마주치며 대화하는 보통의 사람들은 왜 그리도 어려움을 느끼는지, 이 문제가 그리도 중요한 문제인지 의문을 가질테다. 다만 나에게는 눈을 마주치며 말로 생각을 전달하는 과정의 의미가 가볍지 않다. 티끌 같이 작은 내 아집과 생각의 요새를 개방하겠다는 선언이며 외부 세계에 내 흠결을 적극적으로 내비치겠다는 행위다. 조금씩, 아주 하나씩 눈을 마주치고 있다. 나를 알던 사람들은 이 녀석이 왜 이러나 싶을테고 처음 만나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은 어색한 눈맞춤을 대하며 조심스레 거리를 둘테다. 아직은 사람을 대하는 매일이 서툴고 새로운 삼십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