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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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하다. 음악 없이 살아가야 한다니. 무미건조함의 극치다. 음악을 듣는 것은 고사하고 흥얼거림조차 불가능하다면 인간의 평균수명이 반 정도는 줄어들지 않을까. 반대로 무인도에 혼자 갇혀 살아야 하더라도 길어야 세 달 남짓 버틸 수 있는 외로움을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다면 반년 정도로 늘릴 수 있지 않을까. 빈지노 노래 속 가사를 빗대어 표현하면 음악은 '시멘트에 색감을 이식'하듯 재미없는 일상에 리듬을 더한다. 음악이 없다면 삶이 끔찍하다.
태어나서 가장 먼저 들었던 음악이 뭐였을까. 카세트테이프로 들었던 동요였겠지. 산토끼를 찾고 코가 손인 코끼리를 보며 신기해하고 복슬강아지가 짖는 멍멍 소리를 흉내 내고 구름모자를 쓴 산할아버지를 상상했던 기억. 다정한 모습으로 한 손에 크레파스를 사 오신 아빠를 보고 동구 밖 과수원길에 핀 아카시아 꽃을 그리며 바람이 머물다간 들판에 지는 저녁놀을 바라보았다. 동요를 듣는 아이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부모님이 으레 가장 먼저 들려주는 노래이기에 나에게는 선곡 선택권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흥얼거릴 정도로 뇌리에 박힌 곡이 티 없는 멜로디와 가사로 구성된 동요라서. 세상에서 때 묻은 어른이 되었더라도 아무 이해관계나 가치판단 없이, 생각 없이 떠올릴 수 있는 노래가 동요라는 점이 축복 중 하나다.
그렇다고 동요만 들으며 자랄 수는 없다. 엄마가 주방에서 요리하며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는 부모님 또래가 좋아할 법한 그 시절 아이돌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킬리만자로의 표범, 창밖의 여자, 모나리자, 존재의 이유, 그리움만 쌓이네, 집시 여인, 흥보가 기가 막혀, 무한궤도, 아침이슬. 어린아이의 귀에는 가사보다는 멜로디가 들렸을 테고 어떤 의미를 품고 있는 곡인지 상관없이 따라 흥얼거렸다. 술자리 안주처럼 가사일을 하는 엄마의 일상 속 80년대 가요는 자식에게 동요와 같은 시기에 기억되는 음악 장르 중 하나가 됐다.
학창 시절의 음악은 소리바다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 중고등학생 시절 인터넷이 빠른 속도로 대중화되며 음악, 사진 등 여러 형태의 콘텐츠 역시 빠르게 전파됐다. 저작권 개념이 제대로 정립되기 전이었기에 전문 콘텐츠의 복사 배포가 무분별하게 이뤄졌고 소리바다가 그중 상징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음악을 찾아 다운로드할 수 있는 포털 서비스랄까. 당시 유행하던 곡들은 어렵지 않게 모두 다운로드할 수 있었다. 지금이야 범죄라는 사실을 국민 대다수가 알고 있어 큰 문제가 되지만 2000년대 초만 하더라도 누구나 당연히 소리바다를 통해 음원을 내려받고 자랑스럽게 MP3에 넣어 듣고 다녔다. 이때 많이 들은 곡을 부른 가수들이 조성모, 브라운아이즈, 백지영, 보아, 이수영, 박정현, 휘성, 성시경, 윤도현, 김범수, 버즈, 빅마마였다. 당시 한창 감수성 충만한 청소년에게는 보물같이 기억되는 가수들이다.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는 가수들은 그런 의미에서 같은 또래들에게 중요한 문화의 한 축이고.
좋아하는 가수와 곡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겠지만 음악을 듣는 이유에 대해 말하자면 나름 명쾌하다. 음악은 영화 속 주인공을 만들어준다. 잔잔한 스트링이 깔리면 가사 없는 음악은 잠에 들기 전 침대 맡 스탠드 조명에 의지해 책을 읽는 주인공이 된다. Maroon 5의 펑크 락을 들을라치면 무대 위에 선 락 밴드의 메인 보컬이 되고, Chet Baker와 Bill Evans의 사운드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미국의 한 재즈바에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했고, 김동률과 Sam Smith의 발라드는 사랑하는 이와 휴일 저녁 거실에서 함께 춤추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친구들과 차 타고 여행 갈 때면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 여행 관련 곡들, 90년대 1세대 아이돌 노래를 가득히 충전해서 출발하는 것이 의례다. 음악은 분위기를 만들고 상황을 주도한다. 진지한 장면이라도 발랄하고 리드미컬한 음악이 깔리면 해학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짧지만 나름 지내온 인생에서 음악은 슬플 때 위로해주고 행복할 때 기뻐해 줬으며 함께할 때 안주가 되어줬다. 그래서 음악을 듣는다.
문화를 논하기에 음악은 일부 분야지만 나에게 그만큼 큰 영향을 미쳤기에 가볍게 다룰 수 없었다. 조예가 깊지 않지만 그저 들을 때 즐길 수 있는 것만으로 그 의미는 충분했다. 같은 시대에 같은 노래를 들었던 이들과 함께 들은 곡과 가수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심지어 가사를 몰라도 전 세계 언어를 뛰어넘어 소통할 수 있는 매개체 중 하나이지 않는가. 태어날 때를 축하하기 위해 노래를 부르고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노래를 부른다면 인생의 시작과 끝 사이에 있는 그 어느 시점에 노래가 개입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차츰 세상이 아름답지 않게 보이는 뿌연 색안경이 익숙해져 가는 삼십대에도 음악이 주는 희열을 놓지 않고 살아 다행이다. 음악이 없지 않아 끔찍한 인생을 살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