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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초 Oct 23. 2021

멜버른에서 찾은 '어지니스 (Aussiness)'

호주에 있었을 때가 가장 행복했던 이유

난 호주에 있었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한다. 미래에 대한 걱정이 없었다. 내가 있는 지금만 생각하면 되었고 그 덕분에 그때를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내일 뭘 할지, 한 달 뒤에는 뭘 할지, 한국에 돌아가면 뭘 해야 할지... 멀리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저 내가 어찌해볼 수 있는 오늘을 총력을 다해 즐겼다. 그렇게 온 힘을 다했던 멜버른에서 보낸 12달간의 일상은 6년이 지난 지금도 너무나 선명하게 남아있다. 어쩌면 나는 6년 전부터 '소확행'이라는 개념을 멜버른에서 몸소 경험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멜버른은 내 인생에서 참 중요한 도시로 남아있다. 혼자 떠난 첫 여행지여서 그런가 무엇을 하든 더 씩씩하고 용감해졌다. 나를 더 들여다보고 나 자신을 믿기 시작했다. 멜버른에서 느낀 감정과 쌓은 경험은 지금의 내가 미소 지으며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또 다른 힘이 되고 있다. 


멜버른에는 골목길 사이 숨어있는 맛집과 카페가 많았다. 지금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커피의 도시 중 한 곳으로 도시에는 5000여 개의 카페가 있는데 그 많은 카페의 가장 큰 매력은 대부분이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카페라는 점이다. 길거리에는 프랜차이즈 가게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각자의 개성 있는 간판을 내건 로컬 카페들이 많았다. 지구 상에서 가장 많은 문화가 공존하는 국가로 손꼽히는 멜버른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은 건 정말 복 받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휴대폰 지도를 이용할 수도 있었지만 미로 같은 골목길에서 숨은 보물을 찾는 듯 마음에 드는 카페를 발견하는 게 멋이라고 생각했다. 커피를 입에도 안 댔던 나는 카페에 들어가 마차라떼를 시키고 사람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다. 멜버른 사람들은 낙천적이고 활기찼다. 멜버른은 내게 주는 것이 많은 도시였다. 좋은 학교에서 친절한 친구들과 선생님으로부터, 학교 밖 동네 사람들, 도시의 건축물, 20분 남짓 트램을 타고 가면 만나는 야자수 해변과 자연적인 라이프 스타일에서 오는 여유로움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멜버니안들의 일상은 피크닉 같았다. 각자의 취향이 담긴 음식과 문화를 가져와 적당한 곳을 찾아 피크닉 매트를 깔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처럼 도시 전체가 골라 보는 재미로 가득 찼다. 다양한 문화가 존재했던 멜버른에서는 신선한 충격을 많이 받았다. 스펀지 같은 사람인 나는 도시에서 영감을 받으면 어떤 방식으로든 기록을 했다모두 다른 동네가 조화롭게 보이면서도 미묘하게 분위기가 달랐다. 이곳저곳을 유영하듯 걸어 다니며 여러 동네의 부드러운 경계를 구경하는데 재미를 붙였다. 나는 분명 여행자였지만 여행 온 사람들은 찾기 어려운 곳을 찾아내고 싶었다.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가능한 한 깊숙이 Aussie에 스며들고 싶었다. 관광 가이드는 절대 쳐다보지도 않았고 틈만 나면 당신의 최애 맛집과 카페는 무엇인지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 개인적인 추천을 받았다. 다만, 그때 17살의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몰라 여행의 종착지보다 여행 자체를 탐색하는데 시간이 많이 투자되었다. 취향이 훨씬 뚜렷해진 지금 생각해보면 멜버른의 디자인 뮤지엄과 건축물들을 더 많이 보러 갈 걸 하는 아쉬움이 남아있다. 그래도, 시간 낭비를 죽을 것처럼 싫어했던 나는 그렇게 길을 잃어야 내가 무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파악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길을 잃고 무작정 걷다가 마주친 독립 서점과 멜버른 아티스트들의 수제 비누, 액세서리, 도자기, 오브제들이 담긴 편집샵 구경을 한다든가 하는.

Aussie 소확행:

프라한 마켓에 고스란히 담긴 멜버니안의 라이프스타일 구경하기

피츠로이의 라이브 재즈 음악

햇살이 고른 스터들리 가든에서 카누 타기

친구와 주립 도서관에서 공부하기 (웅장한 마음으로 공부를 할 수 있다!)

트램을 타고 고운 모래와 야자수가 있는 세인트 킬다 해변가기, 그리고 해변을 따라 자전거 타기

야라 강 테라스 레스토랑에서 피시 앤 칩스 먹기

작은 베이커리에서 파블로바 사 먹기

우유를 넣은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티와 학교 캔틴 라즈베리 머핀

친구와 비 오는 날 보는 영화 < 10 things I hate about you >

페더레이션 광장에서 사람들 구경하기

naughty boy cafe에서 솜사탕 팬케이크 먹기

12월 한여름의 마이어 백화점 크리스마스 장식 

레몬 라임 + 와일드 베리 요구르트 젤라토를 친구와 나눠 먹으며 야라 강 산책

하굣길에 딱 맞춰 구워진 감자 케이크를 사들고 호스트 동생과 나눠먹기


행복한 삶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단순함 안에 있는 것이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낯선 곳과 낯선 풍경을 성큼성큼 찾아다니면서 멜버른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오롯이 경험하고 왔을까. 주변을 두리번거렸던 나의 호기심과 도전, 그리고 기가 막힌 타이밍, 무엇보다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게 그때의 감정을 소소하게나마 기록해준 열정의 나에게 참 감사하다. 그 후로, 나는 더 다니는 일에 열정을 더 쏟았다. 어디론가 달리고 있는 '나'를 열심히 끄적였다. 그렇지 않으면 간직하고 싶은 이 순간이 너무 쉽게 휘발되어버리니까. 


호주에서의 모든 것이 마냥 행복했던 것은 아니다. 타지 생활이 어디 호락호락하겠는가. 기본적으로 영어를 잘 못해서 내가 하고 싶은 걸 못했다. 처음에는 호주식 영어 발음이 아니라 미국식 영어 발음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한 지적으로 스트레스도 받았다. 학교에서 브로드웨이 뮤지컬 급으로 준비하는 퍼포먼스 무대 행사가 있다. 춤추고 무대에 서는 걸 좋아하는 나는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 여러 댄스 장르에 참여할 수 있는지 모르고 'Fame'이라는 곡에 맞춰 팔만 사용하는 작은 안무를 하는 무대만 올랐다. 그때 이후로 관객들 앞에서 춤을 시원하게 춰본 적은 매우 드물다. 영어를 못 알아듣곤 참가 못했던 무대 이후로 악착같이 교내 행사에 더 적극적인 태세를 갖췄다. 5일 뒤에 있는 수영 대회에 무턱대고 참가했다가 실제 선수 경기장 크기의 수영장에 놀라 바짝 긴장하고 스트레칭도 안 하고 물에 뛰어들었다가 중간 지점에서 쥐가 와서 수영장 한가운데 혼자 동동 떠있다가 꼴찌로 들어오기도 했다. 그렇지만 단순하고 사소한 것들로 가득 찬 나의 멜버른은 내가 슬퍼할 겨를도 없게 혼자였던 나를 위로해주었다. 낯선 길을 향해 혼자 달리는 나의 의지가 근사하다고 생각한다. 평소에 멋지고 아름다운 것을 호기심의 눈으로 찾아내고 자주 접하고 따라 해 보며 또 그걸 나만의 방식으로 소화해보기도 한다.

Aussie suits you!

호주가 너한테 어울려!

We'll miss you

네가 많이 그리울 거야.

Can't you just stay?

그냥 더 있으면 안 돼?

하는 말들을 스무 번은 더 들었는데 2015년 12월 13일을 마지막으로 함께했던 모든 가족, 친구들과 인사를 하고 나는 호주를 떠났다. 아직 한국에 있는 엄마 아빠가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호주가 좋았다. 그리고 그만큼 용감하고 씩씩해져 있었다. 무얼 하든 '나'니까 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다. 막 Aussie호주 사람이 다 된 줄 알았는데 공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보이는 건 궁서체로 쓰여있는 '풍천 장어' 가 적힌 식당 간판들 뿐이다. 영어가 아닌 한국어 간판, 그것도 한국 토종 음식들이 적힌 간판들은 내가 더 이상 호주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강렬하게 증명해 보였다. 짜증이 나서 눈물이 났다. 비행기가 한국에 가까워질수록, 한국에 머무는 시간이 흐를수록 멜버른에 대한 기억은 점점 희미해질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아직 모른다. 아니, 절대 모를 거다. 아무도 모를 거다. 그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인생이니까. 한국에 도착한 다음날 목욕탕에서 1년 동안 묵었던 때를 씻으며 생각했다. 앞으로 내게 어떤 일이 펼쳐질지 모르지만 딱 하나는 확실했다. 우리는 새로운 어딘가로 떠날 수 있을 때 설레어한다. 두려움은 잠시 접어두고 자신 있게 나아가야 한다. "세상이 그렇게 넓다는데 제가 한 번 또 가보죠!" 하면서. 떡볶이가 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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