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뭐든지 할 수 있었다.
151117
[첫날]
차로 데려다주시는 호스트 맘 케이티의 굿바이 뽀뽀를 받고 학교에 아침 일찍 도착했다. 모여있는 다른 10학년 친구들을 보니까 나의 빨간 캠프 가방이 제일 큰 것 같았다.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호주 친구들과의 수련회에 설레어 이것저것 챙긴 게 많았다. 가방을 싣고 버스에 타서는 틸다랑 앉아 이것저것 이야기하다 보니 2시간 남짓한 Merricks라는 캠프 사이트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다. 우리는 제일 먼저 식당 홀에 모여 간단히 설명을 듣고 캐빈을 배정받았다. 룸메이트는 Bec, Claire, Catherine이었다.
캠프의 첫 활동은 내가 제일 배우고 싶었던 서핑이었다. 10분 정도 버스를 타고 모닝턴 남쪽 바다로 더 들어갔다. 몸에 쫙 달라붙는 서핑 슈트를 갈아입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친구 두 세명이 달라붙어 서로 입혀줘야 했다. 서핑을 배우는 과정에서 제일 먼저 한건 모두 다 같이 바다로 바로 뛰어든 것이었다. 물맛 한 번 보고 바다랑 좀 친해졌다는 기분이 들면 다시 모래사장 위로 올라와 본격적으로 보드 위에서 일어나는 방법과 팔로 노 젓는 방법을 배웠다. 그리고, 이제는 실전. 보드와 함께 바다로 뛰어든다. 처음에는 물 위에서 내가 어떻게 어디로 넘어질지 몰라 바싹 긴장했지만 막상 파도가 올 때 그 물살을 몇 번씩 느껴보니 해볼 만했다. 적당한 파도를 보고 보드 위에서 타이밍을 보고 일어서려다 물에 빠졌을 땐 더 큰 파도가 기다려졌다. 서핑 보드 위 두 발을 딛고 중심을 잡아 일어나 모래사장까지 무사 착지했을 때의 기분은 무척 짜릿했다. 투명하고 푸른 바다에서 끝내주는 경치를 만끽하면서 서핑을 해서 <릴로와 스티치>의 릴로가 된 것 같았다. 서핑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아침을 바다에서 보내고 다시 캐빈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샤워를 한 후 '나무 타기'를 하러 갔다. 말 그대로 나무 꼭대기까지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액티비티였다. 도대체 나무 타기를 어떻게 한다는 건지도 모르겠고 17m의 올라탈 나무의 높이가 얼마나 높은 지도 감도 오지 않았다. 별생각 없이 첫 번째로 올라타겠다고 손을 들었다. 하지만, 그 나무 아래 도착한 나는 고개를 위로 90도를 꺾어야 나무 꼭대기가 보일락 말락 하는 나무 높이를 체감하고 겁을 먹기 시작했다. 인간이 제일 두려움을 느낀다는 11m 보다 더 높은 나무였다. 인간이 제일 두려움을 느낀다는 11m라는 사실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머릿속에서 계속 되뇌어졌다.
무슨 생각으로 또 첫 번째로 하겠다고 나댄 건지... 먼저 올라타겠다고 한 걸 사다리에 올라타고 나서야 후회하고 있다. 안전장치로 훨씬 더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나뭇가지가 뻗기 시작하는 2m 지점 정도까지 올라간다. 사다리에서 진짜 나무로 발을 옮기면서 만져지는 꺼칠한 나뭇가지에서는 완벽한 보호색을 띠고 있는 벌레들이 갑자기 튀어나올 것 같았다. 사다리는 나무에서 완전히 떼어졌다. 위로 올라갈 일밖에 없다. 밑을 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고 다음 발을 디딜곳을 찾으며 차분하게 올라갔다. 무의식적으로 크게 떨리는 내 숨소리가 더 무서워지게 했다. 올라타고 있는 나무 기둥 뒤로 키가 비슷한 무성한 이웃 나무들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키 큰 나무들을 비슷한 높이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처음이었다. 얼마만큼 지났을까. 꼭대기 플랫폼까지 도착해 처음으로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높은 나무에 둥지를 튼 새들이 된 기분이랄까. 언제 내가 나무 꼭대기에서 석양 지는 숲을 바라볼 수 있겠나 싶었다. 영화 <플립>의 여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이렇게 나무의 제일 높은 곳에 올라와 있으니 한라산을 오른 것 마냥 뿌듯함이 차올랐다. 나도 나만의 나무를 찾으면 노을이 지고 있는 '나무 정상 뷰'를 보러 매일 올라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풍경을 마음속에 알차게 담았다. 다시 내려올 때는 나무를 두 발로 팡팡 밀면서 장치를 이용해 땅으로 금방 내려왔다.
내가 속해있는 그룹 1은 오늘 급식 당번을 맡아 저녁을 배식하는 역할을 해야 했다. 식전 수프부터 디저트까지 캠프 치고는 만족도 120%의 코스 요리였지만, 식전 수프는 간이 조금 된 소금물에 야채를 턱 넣은 것 같은 야채 국물이었고 바삭한 대신 젤리같이 물컹물컹한 게 고기 같지 않았던 피시 앤 칩스는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디저트였던 살구 파이와 아이스크림이 제일 맛있었다. 그래도, 하루 종일 몸을 쓴지라 허겁지겁 그릇을 싹 비웠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까지 끝내면 식당 홀에 프로젝터를 켜고 캠프 사이트 주변 해양공원과 그곳에 살고 있는 해저 동물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고래 턱과 이빨도 직접 만져보고 꽤 흥미로운 사실도 많이 알게 되었다. 해양 워크숍 세션 중 노을 진 핑크 하늘은 기억에 계속 남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세션이 끝난 자유 시간에는 산책도 하고 친구들이랑 수다도 떨었다. 친구들이 다 모였 놀았던 ‘파티 캐빈’ 24호에서는 벌레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10명이 넘는 여자애들이 모여있었던 그 방은 엄청 큰 벌레가 날아 들어오면서 꺅꺅거리는 비명으로 가득 찼다. 그나마 용감했던 유신이가 신고 있던 신발로 벌레를 퍽! 하는 소리는 시끄러웠던 캐빈을 단번에 잠재웠다. 이 상황이 웃겼던 나는 그 신발을 얘들이 있는 곳으로 던져버렸더니 다시 꺅꺅거리는 비명은 하늘을 찔렀다. 결국 유신이가 벌레를 성공적으로 그리고 담담하게 처리했다. 유신이는 곧 다른 방의 거미도 처리하러 호출되어 불려 가기도 했다. 조금 뒤, 조이가 나뭇가지를 지렁이로 착각하고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다시 '지렁이 소동'이 일어나면서 떠들썩 해졌다. 우리보다 30배는 작은 곤충들이 무서워서 소리 지르고 별짓을 다한 우리가 너무 웃겨서 깔깔깔 웃었다.
151118
[이튿날]
아침 6시 45분. 눈곱을 떼기도 전에 맨 처음으로 한 건 수영복을 입은 것이다. 오늘은 아침부터 스노클링 레슨이 있기 때문이다. 아침으로 팬케이크와 시리얼을 먹고 스노클링 연습을 하러 먼저 수영장으로 향했다. 서핑 슈트와 마찬가지로 몸에 쫙 달라붙는 잠수복을 입어야 했다. 어제 한 번 해봤다고 서로 입혀주는 것이 훨씬 능숙해진 우리다. 스노쿨 고글과 오리발을 착용했다. 스노클링의 첫 번째 단계는 물속에서 숨을 쉬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이었다. 입에 문 스노클링 호스가 반 정도만 물에 잠기도록 유지하며 꽤 깊은 수심의 수영장에서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물 밑에서도 숨이 쉬어지는 게 신기했는데 자칫 호스 전체가 물 밑으로 잠기면서 산소 공급이 끊어질 때는 입 안 전체가 공기 대신 락스 물로 가득 찼다. 그럴 때면 당황하기부터 해서 물 위로 올라올 생각부터 했다. 평소 잠수할 때는 숨을 안 쉬니까 습관이 있어서 스노클링 호스를 물고 있어도 숨 쉴 생각을 하지 못했다. 물속에서 숨을 쉬는 게 익숙해지지도 않은 채로 이제는 다이빙 연습을 하러 간다. 뒤로 누워서 등과 엉덩이 쪽으로 물에 떨어지는 것을 연습했다. 수영장에서의 연습 시간이 끝나고 코치 선생님은 스노클링 강습이 더 필요한 사람이 있냐고 하셨다. 아무도 없었다. 나는 더 큰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다 더 위급한 상황이 오는 것보다 수영장에서 제대로 실패해보고 가야겠단 생각에 다이빙 선생님께 나머지 연습을 요청했다. 부끄러워서 손을 못 들었다던 다른 친구들도 다시 돌아와 같이 연습했다. 호스 전체가 물에 잠겨 입으로 물이 들어올 때면 들어오는 물방울들을 당황하지 않고 잠깐 머금고 있다가 ‘tooth!’하고 내뱉으면 되는 것이었다. 나 혼자 손 들었을 때는 조금 부끄러웠는데 요청하길 잘했다. 스노클링을 위해 들어갈 내일의 바다가 기다려졌다.
점심으로 비트가 들어간 호주식 버거를 먹었다. 내가 좋아하는 Hedgehog 비스킷과 오렌지를 챙겨 배를 두둑이 채웠다. 어김없이 쨍쨍한 여름 날씨, 선크림을 온몸에 왕창 바른 후 이번에는 카약을 타러 가까운 바다로 나갔다. 아쿠아 슈즈와 카약 스커트를 입고 파트너인 조이와 카약을 타러 갈 본격적인 준비를 했다. 조이의 스커트가 두꺼워 어른 2명이 도와야 카약 시트 구멍에 끼워졌기에 출발이 늦어졌다. 둘 다 카약이 처음이었다. 서로 멀찍이 떨어져 있는 바다 위에서는 코치 선생님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어떻게 운전하는지 설명하시는 내내 내 앞 30명 정도의 카약 노를 들고 있는 친구들 사이로 쏟아져 나오는 영어는 내 머리에 온전히 박히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카약 타는 방법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채 노를 저었다. 설명을 잘 듣지 않은 건지 그냥 못 하는 건지 우리는 계속 뒤처지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주변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카약은 계속해서 엉뚱한 방향으로 멋대로 흘러가고 우리 둘은 당황해서 아무것도 못하고 울상을 짓고만 있었다. 카약은 갈수록 산으로 가고 결국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왔다. 팀에서 뒤처졌다는 절망감과 낮아진 자존감이 우릴 우울하게 만들었다. 쨍쨍한 햇빛 아래 바다에 떠있는 우리 카약 위에만 먹구름이 가득했다. 시작을 함께한 같은 반 친구들은 시야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고, 주위엔 퍼렇게 일렁이는 파도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야말로 망망대해다. 내 뒤엔 조이가 앉아있다. 여기는 그만두고 싶어도 포기할 수 없는 바다 한가운데이다. 결국, 멈춰있는 우리 카약을 발견하고 담임 선생님과 코치님이 우리 카약 근처에 오셨지만 그 누구도 절대 어떻게 하라고 선뜻 알려주지 않았다. 이 문제의 카약을 온전히 컨트롤할 수 있는 건 선생님도, 같은 카약에 타고 있는 조이도, 그 누구도 아닌 나였다. 마음을 차분히 하고 뭐든 해보는 수밖에 없다. "One Two, One Two" 하며 구호를 맞춰보기 시작했다. 차근차근 알아가려고 하는 모습에 코치님은 활짝 웃는 미소로 응원을 해주신다. 팀워크가 대단해서 페달만 잘 조절하면 더 쉽게 방향을 조정할 수 있을 거라고 무한 칭찬을 해주신다. 나는 그제야 "아차" 싶었다. 카약 앞 쪽에 있는 페달을 발로 밟아 오른쪽과 왼쪽 방향을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언뜻 들은 것 같다. 옆에서 계속 우리 카약을 케어하시는 코치님들은 땀을 뻘뻘 흘리고 계셨다. 정신을 차리고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카약이 원하는 대로 움직였다. 선생님과 코치님은 더 기뻐해 주시며 "바로 그거야!"라고 하신다. 으으 조제키 바보 똥 멍충이!! 긴 고군분투 끝에 중간 지점에 도착했다. 일찍이 도착한 다른 친구들은 역사지와 국제 정원을 둘러보고 있다. 카약에서 막 내린 조이와 나는 제멋대로 다리가 풀렸고 녹초가 되어 벤치에 걸터앉아 있다. 마음 약한 조이는 우리가 마치 불굴의 의지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공한 성장 영화의 한 장면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 같다고 말하더니 결국 눈물을 보였다.
이름은 Joy 지만 얼굴은 꼭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슬픔이 같았다. 내가 카약에 페달이 있는 줄도 모르고 방향 조절에 완전히 실패한 내 잘못이 컸다고 미안하다며 부둥켜안고 울었다. 다시 돌아갈 때는 더 잘할 수 있을 거라고 하면서 서로를 격려했다.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카약에서는 항상 3번째 순서를 유지하며 잘 따라갔다. 나름의 역경을 이겨내고 바다 위를 즐기고 있는 우리가 너무 자랑스러워서 노래 ‘You raise me up’을 부르면서 노를 젓기도 했다. 카약에 탄 채로 멈춰 잠깐 휴식을 가지고 있는데 카약 바로 뒤에서 돌고래가 보였다. 스마트폰 이모지로 많이 쓰기를 좋아했던 돌고래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운 좋게 돌고래도 만나고 시작점으로 무사히 돌아온 우리는 마치 해병대처럼 어깨에 카약 보트를 메고 반납 장소가 있는 곳까지 옮겨야 했다. 어깨가 빠질 뻔했다. 여차저차 고생을 많이 한 이번 여행을 마치고 버스 안에서 먹었던 레몬 케이크는 꿀맛이었다. 빠르게 샤워를 하고 나서 저녁으로는 라자냐를 먹었다. 저녁을 먹은 후에는 보물 찾기와 팀 미션 게임도 하고 나의 로망이었던 친구들과의 무비 나잇이 있었다. 잠옷 차림의 친구들과 옹기종기 모여 침낭을 깔고 빔 프로젝터에 영화를 키는 순간 그 공간의 공기는 참 아늑해진다. 우리가 선택한 영화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였다. 하이틴 영화에 나오는 슬립오버를 하며 영화를 보던 그 틴에이저들 중 하나 같았다. 오늘은 청소년 성장 극복 스토리와 하이틴 영화를 넘나드는 드라마틱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