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초 Oct 23. 2021

익숙한 것들이 살짝 어긋나는 시점

151119

[셋 째날]


아침으로 해시 브라운과 구운 콩을 먹고 오늘도 어김없이 바다로 나간다. 세일링을 하러! 3명이 팀을 이루어서 한 요트에 타게 되는데 틸다, 클레어와 한 팀이 되었다. 내 인생에서 생각 조차 해보지 않았던 요트 운전이다. 이번에는 연습 없이 바로 실전이다. 처음에 모래사장에서 배의 닻을 올릴 때 우리 요트에만 문제가 생기면서 어제의 카약 사건과 마찬가지로 역시나 모래사장에서 바다로의 출발이 느렸다. 하지만, 곧 요트와 연결되어있던 트레일러를 분리시키고 요트를 바다로 밀어 드디어 배에 올라탔다. 배 위의 세 명의 멤버는 각자의 역할이 있다. 나는 맨 앞의 닻을 조종하는 로프를 담당했다. 카약의 악몽이 떠올라 방향을 조정하는 역할을 맡게 된 게 살짝 찜찜했다. 게다가, 세일링 코치분들이 제대로 뭐가 뭔지 설명을 안 해주시고 바로 바다에 들어가니까 당황스럽기도 했다. 처음에는 잘 가다 싶더니 바람이 점점 세질 때는 내가 닻을 통제하기는커녕 내가 오히려 펄럭이는 닻에 휘둘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틸다가 있던 요트 뒤 오른쪽으로 배가 휘청하고 기울면서 틸다가 배에서 떨어져 나가 버렸다! 어김없이 또 내게 시련이 닥쳐오는가... 틸다가 요트 배에서 떨어질 때의 그 순간은 마치 재난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배 위의 나와 클레어는 ‘안돼, 틸다!!’를 외치며 틸다를 향해 손을 뻗었고 틸다도 있는 힘껏 우리에게 손을 뻗었지만 그대로 물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순간, 너무 당황한 나머지 배 위에 살아남은 클레어와 나는 배의 균형을 맞추려다가 결국 모두 물에 빠지고 배도 뒤집혔다. 배가 뒤집히고 물에 빠져 발에 아무것도 안 닿는 그 짧은 순간에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입술이 퍼레진 우리는 서로를 찾고 침착하게 다시 요트 바깥쪽 클립보드를 잡고 들어 올리며 배를 원상태로 뒤집을 수 있었다. 발 끝에 아무것도 닿지 않는 물속에서 코끼리만 한 배를 뒤집는 것은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우리 셋은 기진맥진된 상태로 겨우 겨우 배에 다시 올라타고는 대자로 뻗었다. 차가운 바닷물에 빨려 들어가 몸이 급격하게 추워지면서 덜덜 떨고 있는 파란 입술의 우리가 너무 웃겨 서로를 쳐다보며 깔깔 웃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지만 항해를 하다가 한 번쯤은 바닷물에 몸을 맡겨 홀딱 젖어버리는 경험도 나쁘지 않다는 사실을 즐기기 시작했다. 한번 바람에게 호되게 당하고 나서부터는 세일링을 하는데에 여유가 생겼다. 모래사장으로부터 더 멀리 한 15분 정도 배를 운전하다가 해안가로 돌아가던 중 우리 요트는 한 번 더 뒤집혔다. 이번에는 처음보다 얕은 수심에서 뒤집혀서 수심이 깊지 않았지만 발에 느껴지는 건 미끄덩함이었다. 물에 빠진 후 정신을 차려보니 발 밑은 검정 미역들로 쫙 깔린 바위 바닥이었다. 서있기 조차 어려웠다. 우린 구호를 맞춰 배를 밀어 해초더미로부터 멀리 떨어진 적절한 곳으로 옮겼다. 이번에 물에 빠진 우리는 그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세일링에 집중하지 않고 박장대소하며 해마처럼 떠있기만 하고 있는 우리 셋을 본 세일링 코치 선생님께 머지않아 걸려서 한바탕 혼이 났지만, 우리는 배를 척척 뒤집어 곧 잘 올라탔다. 요트에서 바라보는 일몰이라던가, 멋지게 닻을 올려 바람을 가르며 항해하는 내가 상상했던 모습의 요트 세일링은 아니었지만, 두 번씩이나 배에서 떨어져 나간 경험이 바다를 즐길 여유를 가져다주었다. 누가 운전을 잘못하고 중심을 잘 잡지 못했다고 탓하기보다 배로 다시 올라오기 위해 서로를 돕는 모습도 마음에 오래 남아있다.


다시 캐빈으로 돌아와 라자냐같이 생겼지만 빵은 페스츄리이고 빵 사이에는 당면과 고기, 야채가 끼어 있었던 꽤 맛있었던 이름 모를 음식을 점심으로 먹었다. 바다에서 매일 새로운 도전을 하고 먹는 음식들은 항상 맛있다. 마지막 캠프 활동인 스노클링을 하러 버스를 1시간 남짓 타고 또 다른 바다로 떠났다. 

바다에 떨어지기 전


어제 아침 미리 연습한 대로 우린 바디 슈트와 고글, 그리고 오리발을 꼈다. 이제는 모두가 능숙하다. 20명 정도 되는 우리 그룹은 제트 보트를 타고 빠르게 바다 한가운데로 향했다. 첫 번째 스노클링 장소는 노란 머리 갈매기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이제는 진짜 실전이었다. 내가 곧 빠질 곳은 그동안 연습했던 수심이 얕은 수영장도, 해안 바닷가도 아니었다. 색깔마저 시퍼렇던 대자연 바다 한가운데이다. 정말 우리 밖에 없었다. 나의 밑도 끝도 없는 나댐은 자꾸 어디서 뿜어 나오는 건지, 이번에도 내가 또 제일 먼저 다이빙을 하겠다고 했다. 생각보다 물은 차가웠다. 내가 지금 태평양 바다 한가운데 떠있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리는데 시간이 걸린다. 예상했지만 나의 오리발에 걸리는 게 아무것도 없다. 말도 안 돼. 생각보다 무척 차가운 얼음장 같던 바닷물이었고 입에서는 극도로 짠맛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바다 한가운데는 오히려 잔잔할 거라고 생각했던 파도도 집어삼킬 듯이 커서 무서웠다. 그때, "제키!!"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 스노클링 버디 셀리나가 곧 내 옆으로 다이빙해 수영해왔다.

 점점 바닷물의 온도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둘씩 미리 짝을 지었던 버디들은 서로를 챙기면서 스노클링 코치 선생님을 따라갔다. 우리는 곧 거대한 돌무리를 만났다. 제멋대로 널브러져 있는 거친 돌덩어리들을 넘어가야 했는데 파도는 우리가 가야 하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우리를 덮쳐왔다. 우리는 마치 온갖 힘을 다해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 같았다. 짜디짠 바닷물도 끊임없이 입으로 들어오는 와중에 세게 덮치는 파도에 무릎이 돌무리에 쓸려 피가 나기도 했다. 수면 위로 올라와있던 돌 위로 올라가려다 중심을 잃고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기도 했다. 거친 파도로 가득했던 어지러운 바다에서 그러기를 반복하다 마침내 넘어오니 언제 그랬냐는 듯 평화롭고 조용한 바다 풍경이 펼쳐졌다. 잔잔한 바다에서 본격적인 스노클링이

 시작되었다. 나머지 연습까지 한 만큼 열심히 Duck Diving을 하면서 마주한 바닷속 모습들은 황홀했다. 바다 고기들을 정말 많이 만났다. 영화 <니모를 찾아서>의 ‘도리’와 킹크랩도 보고 팔뚝만 한 물고기들도 떼로 보았다. 해저 다큐멘터리에서만 보던 장면들이 내 눈앞에 펼쳐지니 정말 신기하면서도 해초들이나 돌 위의 이끼들을 볼 때는 너무 징그러웠다. 보트를 타고 옮겨간 또 다른 스노클링 장소는 바다사자들이 반기는 곳이었다.

 멀리서 보는 바다사자들은 작고 귀여운 통통한 바다사자들이었는데 실제로 물속에서 나란히 수영하게 되니까 충격적이었다. 물속에서 바라보는 바다사자는 고래만큼 커 보였고 재빠르다 못해 거대 미꾸라지 같았다. 이번에는 팀으로 나누지 않고 그룹 1 전체가 다 같이 스노클링을 했다. 대자연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버리는 게 무섭지만 해저의 고요함은 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렇게 무사히 마지막 캠프 활동 스노클링까지 정복했다. 캐빈으로 돌아오는 길, 잠시 버스를 세워 Mr.Pannam은 길가에서 팔고 있는 피시 앤 칩스를 사주셨다. 망망대해에서 스노클링을 하고 한 입 바사삭 베어 먹은 피시 앤 칩스는 진실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꿀맛이었다. 


캐빈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보내는 마지막 캠프의 밤은 Trivia (상식 퀴즈 대결)로 채웠다. 기본 상식, 지리, 과학, 줄임말, 애니메이션 <심슨>까지 다양한 카테고리의 퀴즈 대결이 물리 선생님의 지휘 하에서 진행되었다. 물리 선생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재밌는 선생님이셨다. 지리 키워드 중 수도 맞히기 문제에서 내가 큰 역할을 했다. 마지막까지 아무도 답을 적지 못했던 덴마크와 케냐의 수도를 맞춰 팀이 역전할 수 있었다. 한 문제는 대한 항공 비행기 사진을 보여주고 어느 나라 항공이냐고 묻는 퀴즈였다. 단 번에 알아챈 나는 제일 먼

저 "코뤼안 에얼!!!"라고 아주 정확한 답을 외치면서 누구보다도 빠르게 우리 팀으로 포인트를 가져왔다. 애니메이션 <심슨> 카테고리에서는 심슨 광팬인 같은 팀 멤버 Anna가 모든 문제의 답을 막힘없이 적어내면서 우리 팀은 승승장구했다. 호주 유명인들의 사진을 보고 이름을 맞추는 파트에선 나는 가만히 있고 호주 태생 친구들이 아주 빠르게 답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리 팀이 1등이었다. 우리는 다 같이 손을 위로 들어 올리고 소리를 질렀다. 이게 뭐라고 진짜 기뻤다. 경품으로 영화 티켓이 받았다. 퀴즈 게임이 끝난 여운이 남아서인지 캐빈 메이트들과 나는 침대에 누워서도 중국의 한 아이 정책에서 두 아이 정책으로 풀렸다는 사실과 파리 테러에 대한 국제 이슈 상식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잠들었다. 



151120

[마지막 날]


아침 6시 반. 후드득 떨어지는 묵직한 빗소리가 날 깨웠다. 이층 침대에서 내려와 문을 열고 숙소 앞마당에 널어놓은 수건과 옷들을 한꺼번에 걷어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재빠르고 깔끔했던 방금 내가 한 행동에 대해 뿌듯함을 느끼고 젖은 빨랫감들을 방문 앞에 툭 던져 놓고는 다시 이층 침대로 올라와 잠이 들었다. 두 시간 뒤 일어난 나는 시리얼로 캠프 마지막 아침을 채웠다. 마지막 날이 돼서야 하늘도 아쉬운지 우중충한 얼굴을 하고 있다. 지난 3일 동안 다양한 해양 스포츠를 경험해봤겠다, 우리 모두는 물과 친해져 있었다. 멜버른으로 향하기 전 캠프 활동의 피날레는 '해변 올림픽 (Beach Olympics)'이었다. 어젯밤 트리비아를 했던 그룹이 해변 올림픽 팀으로 다시 모였다. 인명구조 게임, 수중 배구 게임, 1인 카약 릴레이, 보트 위 땅따먹기 등 해변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미니 게임으로 승패를 가린다. 우리 팀은 모두 적극적이고 팀워크가 좋아서 코치님들이 올림픽 우승 후보라고 계속 말씀해주셨다. 들뜬 마음으로 올림픽을 시작함과 동시에 보트 위에서 버티기 게임에서는 팀 모두가 한 번에 중심을 잡고 올라가는 것에 성공하면서 교가와 할렐루야까지 목청 높여 불렀던 하이 텐션의 팀이었다.


올림픽 도중 아침에 내리다 그친 비가 다시 오기 시작했다. 비를 막을 아무것도 없었고 쌀쌀해지기 시작했지만 우리 모두는 아무렇지 않게 그 순간을 재밌게 즐겼다. 올림픽을 급하게 마무리하고 학교로 돌아가는 버스에 타야 했다. 셔틀버스로 향하는 순간까지도 아쉬웠다. 나와 Bec, Taylor, Simone은 가는 길을 멈추고 '잠깐이라도 바다 수영해볼까?' 하는 눈빛을 잠깐 주고받고는 다시 바다를 향해 전력 질주했다. 비를 뚫고 있는 힘껏 다해 달려 파도 속으로 풍덩 들어갔다. 비 내리는 바다에는 우리 넷 밖에 없었다. 비를 맞으며 바다에서 수영하는 기분은 아늑했다. 곧 떠나야 되는 걸 모두가 알고 있지만 이 순간만큼은 온전히 지켜내고 싶은 우리였다. 180cm의 큰 키를 가진 Bec의 어깨에 올라타 첨벙거리면서 놀기도 했다. 그만 버스로 돌아오라는 담임 선생님의 목소리에 못 이겨 제일 마지막으로 셔틀버스에 올라탔다. 버스 메이트였던 Bec과 옆에 나란히 앉아 영어 끝말잇기를 하다가도 얼마나 마지막 그 순간이 좋았는지 얘기를 했다. 나와 마찬가지로 Bec도 그 순간이 너무 짧았던 것에 많은 아쉬움을 표현했다.


캠프 내내 선생님들과 캠프 지도자 선생님들, 10학년 전체 친구들 모두는 서로의 어떤 것이든 진심으로 칭찬해주고 응원했다. 전체 캠프 일정을 기획하시고 캠프가 잘 끝날 수 있게 많은 노력을 기울이신 Ms.Woods는 눈물을 살짝 보이시면서 그녀의 마지막 캠프가 멋지게 끝나서 좋았다고 말씀하셨다. 더할 나위 없이 좋았고 그래서 더 아쉬움이 남는 이 캠프에 나도 함께 할 수 있어서 참 감사했다. 격년에 한 번 열리는 이 캠프가 내가 교환학생으로 온 해에 갈 수 있게 되어 운이 좋았다.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면 평범한 한국 고등학생 17세가 할 수 있는 경험들은 절대 아니었기에 더 소중했다. 그 소중한 순간들은 수중활동이 많았던 캠프 특성상 사진으로 못 담아낸 게 많이 아쉬웠다. 새로운 도전으로 가득 찼던 이번 캠프는 수많은 것들을 바꿨다. 안정감을 느끼는 나의 컴포트 존(comfort zone) 밖으로 과감히 나가야 할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수만 가지의 결정들을 하면서 나만의 세계를 구축해나갔다. 불편한 영역으로 걸어 나갈수록 나의 안전지대는 넓어졌고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황량한 바다 한가운데에서, 나무 꼭대기에서 석양을 볼 때, 뒤집힌 요트를 들어 올리며 나는 비장한 다짐들을 했다. 익숙한 것이 살짝 어긋나는 시점에 생기는 두려움은 곧 흥미로운 의심이 되었다. 해보지 않고 확신하기보다 직접 확인해보기를 반복했고 그 속에서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이전 13화 인생을 배운 호주 수련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