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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망 Oct 15. 2024

바톤터치하는 파리의 여자들

대체로 우중충하다가 잠깐 갠다면


이상한 조합인 여자 3 + 남자 1 모임이 만들어졌다. 여행 오기 전, 유랑 카페에서 파리 에어비앤비를 쉐어할 일행을 구한 것이다. 모르는 사람끼리 어색한 단톡방이 만들어졌고 여자들끼리 눈치 보는 게 보였다. 남자가 알아서 나가 주기를 바라는 눈치. 그게 읽혔던지, 남자가 여행 직전 갑자기 못 가겠다며 파투를 냈다.


 (3+1)-1=3이 되어 맘 편해진 여자들. A와 B는 여행 일정이 달랐고, 나는 중간에 겹쳤다. 나를 고정값으로 두고 A-B 간 바톤터치를 하기로 했다. 파리에서 나와 A가 이틀 묵고, 또 나와 B가 이틀 묵는 식. 우리 셋은 동갑이었다. 

 



 숙소는 Bonne Nouvelle 역에 있었다. 본(봉)누벨, 이름은 우아하지만 골목은 낡고 관광지와 거리가 있어 우범지대에 가까웠다. 안내서와 지도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겨우 찾은 집. 일반 가정집 아주머니가 방 한 칸을 내주며 키를 줬다. 나와 A는 짐을 풀고 신이 나서 파리 구경을 했다. A는 유쾌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친구였다. 밝은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색, 항상 웃는 얼굴에 적극적이라 나를 끌고 여기저기 잘 다녀주었다. 그녀의 제안으로 단번에 말도 놓았다. 



 파리의 메인 거리, 샹젤리제를 걸으면서는 끊임없이 소감을 나눴다. 부자와 예술가들 저택, 레스토랑, 화랑, 노천카페들 사이에서 ‘오 샹젤리제’ 뻔한 노래를 부르며 킬킬거렸다. 명품엔 둘 다 관심이 (돈이) 없어서, 마카롱 집 ‘라뒤레’와- 작은 보석 같고 색이 다 다른 동그라미들이 가득한 - 장미꽃향 차로 유명한 ‘Kusmi’ 티 전문점을 구경했다. 고등학생 소녀들이 문구점을 구경하듯이. 개선문 전망대에 오르니 드골 광장이 보이고 12개의 길이 별 모양으로 나 있었다. 


“저기서 차 운전을 어떻게 하는 걸까?”

“혼돈의 카오스다. 난 절대 못 해.” 

“도는 거 봐. 별이 트랙을 따라 움직이는 것 같기도 해.”


사람들은 중요한 사실을 잘 모르는 듯하다. 개선문에 올라야 에펠탑을 볼 수 있다. 에펠탑에 올라가면 에펠탑이 안 보이는데 왜 에펠탑에 오르는가? ‘그것’ 없는 풍경은 파리답지 않을 텐데. 우리는 늘어선 줄을 의아히 여기며 과감히 에펠탑 대신 개선문을 택한 거였다. 여러 각도에서 유영하며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더 좋았다. 


시테섬에서 생루이섬에는 오래된 중고 서적들, 거리에서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들이 있었다. 크레페를 파는 카페에 들러 맛보기도 했다. 이곳 식당들에선 보통 코스로 시키는데, 3가지 요리 구성이 기본이다. 크레페, 오리 요리, 애플파이를 둘이 먹느라 배가 터질 것 같았다. A와 몽마르뜨 언덕에 앉아 사진을 찍었다. 근처에 있던 한국 아주머니들이 우리를 찍어주며 “머리 위로 하트~ 해봐요!” 하셨다. 저희 오늘 처음 봤는데요… 그런 것 치곤 하트가 자연스러웠다.



장은 숙소 근처 까르푸 마트에서 봤다. 이 나라의 과일, 유제품 등 뭐가 있는지 궁금해서 간 거였는데 디저트 코너쪽에 눈이 갔다. 종류가 한국보다 훨씬 다양했다. 숙소로 복귀한 나와 A는 산딸기 푸딩을 하나 까먹고는 흰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그러고 같이 낮잠을 잤다. (“이불 푹신하다 그치?” “응. 단 거 먹으니 졸음이 와…”) 오랜 친구처럼 편해서 잠이 잘 왔다. 다음날은 A와 베르사유 궁전까지 정복했다. 하도 많이 걸어서 파이팅넘치는 A가 없었다면 힘들어서 중간에 포기했을 것이다. 

 



이틀이 지나 A와 B가 바톤터치하는 날이었다. 독일로 가는 A를 배웅하며, B와도 A처럼 잘 맞을까? 궁금하고 걱정도 됐다. 당장은 B에게 키를 전달하는 것이 문제였다. 마침 내가 따로 예약된 일정이 있어 열쇠를 직접 전달할 수 없었다. 숙소 근처 식당에서 커피를 구매하고 대신 열쇠 좀 맡길 테니 전달해달라고 부탁했다. 생각해 보면 열쇠 전달에 커피값으론 모자랄 것 같았지만 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갯짓을 믿고 홀가분하게 여행을 떠났다. 가게 사진과 열쇠 사진을 찍어 B에게 전송했다. 

- 여기서 열쇠 픽업하면 돼요~


그러고 기차를 타러 갔는데 꽉 들어찬 금발 머리의 외국인들이 생경하게 다가왔다. 아, 나 유럽 여행 온 지 일주일도 안됐구나. 잠깐 혼자가 되어보니 외국이 더 낯설게 느껴졌다. 외국에서 만나는 한국인의 영향이 그만큼 큰 거였다. 



B에게 열쇠를 무사히 넘겨준 날,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패스츄리 위에 여러 재료를 올려 먹는 핑거푸드를 파는 곳. 나는 A에게서 받은 용기를 B에게 전달했다. 반말을 하자고 먼저 제안하는 용기. B도 선선히 수긍했다. 프랑스인들은 듣던 대로 서비스가 친절하진 않았다. 영국에 비해 무뚝뚝하고 시크한 느낌. 간이 식당에서 바게트를 주문하면 빵 사이에 닭고기와 루꼴라, 토마토 슬라이스를 유산지 종이에 말아 계산대 위에 툭툭 던져주었다. 그 바게트샌드위치를 씹는데 나도 시크해지는 기분이었다. 계속 점원이 우리에게 오지 않자 나는 말했다.


“프랑스에선 점원을 부르면 예의 없는 행동이라며?”

“응 그렇대. 기다려보자.”


우리는 손을 들어 부르지 않고 눈알만 굴리며 기다렸다. 그동안 살짝 어색하게 눈을 마주치며 큭큭 웃었다. 한국과는 정말 다르네. 어쩌면 인종 차별일지도 몰랐지만. 



B와 나는 개인주의 스타일이라 낮에 각자 여행을 즐기고 밤에 숙소에서 대화를 나눴다. 거의 숙소에서만 볼 수 있다는 제약은 그녀에게 신비감을 주었다. 그녀가 밖에서 피고 온 담배갑은 침대 위에 어지러져있었고, 나시티를 입은 팔뚝에 드러나 보이는 타투는 선명했다. 고사리 모양 같기도 했다. B는 약간 프렌치 시크의 표본 같았다. 내향적이지만 어른스럽고 단단한 분위기가 풍겼다.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고 눈동자와 머리색이 아주 검었다. 



동행 일정도 잔잔하게 진행되었다. 다음날 우린 작은 잔에 나오는 커피를 마시고 오르세 미술관에 갔다. 교과서에서 많이 본 그림들이 많았는데, 밀레의 ‘만종’ 앞에서 유독 오래 머물렀다. 1800년대 그려진 농촌의 모습.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일몰을 배경으로, 땅을 밟고 고개를 숙인 남녀의 모습. 삶과 노동에 대한 찬사로 빛나는 그림을 보며 B와 나는 경건해졌다. 두 발로 단단히 서서 손을 모았다. 나는 B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침대 토크 시간에 B는 나이 차이가 꽤 나는 연상남과 사귀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또래와 연애를 반복하던 내게는 그것도 어쩐지 선망의 대상이 됐다. 우와, 어른 같다… (지금은 연하와 사귀는 게 더 ‘선망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걔는 정신연령이 높은 사람과 잘 어울려 보였고, 나는 약간 철없는 포지션을 자처하며 연하들과의 연애 스토리를 들려주었다.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 유럽 여행 계획은 어떤지로 이어지다가 자정이 넘으면 프랑스인의 숙소에서 창문을 열어놓고 잠에 들었다. 



파리 여행을 마친 나는 B를 남겨두고 스위스로 가는 기차를 탔다. 한국 가면 세 명이 다 같이 놀아도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론 내가 A, B를 각각 독점하고도 싶었다. 연결다리를 놔주고서 나보다 그 둘이 더 친해지면 좀… 서운할 것 같았다. 자연스레 만나게 되면 괜찮지만, 내가 굳이 나서 자리를 만들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둘과의 친밀감으로 풍족해져서 이기적인 독점욕이 들었던 걸까.  이런 생각도 했다. A와 B는 매우 성향이 다른데 나는 그 중간 같다고, 그라데이션의 흐려지는 부분 같다고. 내 색깔이 뚜렷하지 않은 것만 같아 더 자신감이 없었던 것 같다. 




기차 안에서 카톡이 울려서 보니 B의 메시지였다. 작별 인사인가 싶어서 보니, 

- 이거 어떻게 할거야!? 

하며 사진이 와있었다. 콘센트에 꽂혀 있는 흰색 선들. 글쎄 숙소에 폰 충전기와 카메라 충전기를 두고 온 것이다! 하 어떡하지, 국제 택배로 받아야 하나 그게 가능한가 머리가 아팠다. 일정 다 꼬여버리는데 폰을 버릴 수도 없고… 

– 와 진짜 미안… 집주인한테 말해두고 내가 되돌아가야겠다ㅠ 



마침 B가 A와 독일에서 하루 일정이 겹쳐서 잠깐 만나 전달해 주기로 했다. A는 B에게 충전기들을 받아 며칠 후 스위스에서 내게 전해 주었다. 나는 인류애의 감동에 젖어 출렁거렸다. 하찮은 실수로 친구들에게 대민폐를 끼치다니, 백번 사죄했다. 

– 정~~말 미안하고 고마워. 내가 맛난거 쏠게! 진짜로 미안…ㅠㅠ 



그녀들은 말 그대로 바톤터치를 하게 되었다. 본의는 아니고 실수와 우연이었지만 우린 연결되었다. 우연히 여행 일정과 장소가 비슷했고, 겹치지 않았어도 어쩌다 작은 교집합이 생겼고. 그녀들에게 진 마음의 빚을 또 다른 여행자에게 돌려주리라고 생각했다. 급한 일이 생기면 도와야겠다고. 그런데 내 분실물을 바톤처럼 넘겨주면서 A와 B는 무슨 얘기를 나눴을지 궁금하긴 하다, 장난스레 내 욕을 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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