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로 우중충하다가 잠깐 갠다면
하이랜드 투어 코스엔 그 유명한 네스호도 있었다. 네스호의 괴물이 출몰한다고 알려진 세계의미스터리 중 하나. 어릴 때부터 네스호 전설은 많은 책과 TV 프로에서 접해왔다. 잔뜩 기대하고 간 네스호 입구부터 관광 유람선 업체가 보였다. 곧 광활한 호숫물이 펼쳐졌지만 특별히 아름답거나 신비로운 풍경은 아니었다.
이곳의 어디가 그렇게 괴물이 나올 법한 걸까? 상상처럼 안개가 자욱한 곳도 아니었다. 살짝 분위기만 내며 껴있을 뿐. 어떤 것들은 실제보다 거기에 덧입혀진 스토리들이 오묘한 기운들로 감싸고 있다. 나는 네스호에 갔다 온 후기를 전해야겠다. 거기에 괴물은 없었다고. 안개 속 유령의 형체도 없었다고. 사실 인버네스의 숙소에서 만난 나이 든 요정들이 더 신비로웠다고.
투어의 베이스캠프이자 중심 도시 인버네스 Inverness에서 2박할 숙소를 미리 구하고 왔다. 평점 좋은 게스트 하우스 겸 호텔로 예약했는데, 저녁쯤 체크인을 했다. 조용한 길목에 위치한, 전통적인 삼각 지붕의 아늑한 집에 노부부가 살았다. 빨간 머리 앤 속 초록 지붕 집 같은 아기자기함이 있는 깔끔한 집이었다. 아무도 없길래 “계세요?” 하고 물으니 한참 있다 사람이 등장해 맞아주었다. 나는 2층 계단을 올라가면 나오는 초록색 잔꽃 무늬 벽의 방을 배정받았다. “내 집이다 생각하고 푹 쉬어요.” 하고 열쇠를 다정히 건네주던 백인 노부부.
아내는 앨리슨, 남편은 제임스였다. 이름도 동화 같은데, 깨끗한 눈 같은 백발이 꼭 그림책 속 인물 삽화 같았다. 동화 속 선한 인물이 지을 법한 미소와 친절함으로 반겨주었다. 말투도 교양이 넘치는 영국식 영어를 썼다. (스코틀랜드식 영어가 교양 없다는 말이 아니다.) 내일은 언제 투어를 떠나냐고, 아침 먹고 가라면서 특별히 일찍 아침을 준비해 주겠다고 했다. 다정함을 인간화한 것처럼 친절한 분들이었다.
다음 날 아침 7시에 식당으로 가니, 약속대로 정갈하게 내 조식을 차려놓으셨다. 솜씨 좋은 우렁각시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고 온기만 남겨두었다. 테이블보 위에 놓인 토스트와 잼. 하얀 주전자에 담긴 블랙티는 아직 따뜻했다. 티백을 담았던 차 봉지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우유에 8가지나 되는 과일-블루베리, 바나나, 산딸기, 살구 등-과 시리얼을 말아 떠먹으니 든든하고 맛났다. 보이지 않는 존재의 보살핌을 받는 기분.
그 다음날도 조식은 일찍 준비되었다. 이번엔 노부부가 모습을 보여주며 입맛에 맞냐고 물었다. 온기 가득한 스크램블과 과일을 올린 요거트가 그들 미소와 어우러졌다. 사랑스러운 부부에게 줄 것이 뭐 있을까 고민하다 작은 메모지에 쪽지를 써서 드렸다. ‘당신들의 환대에 감사해요. 너무 멋진 이틀이었어요. 아름다운 집과 마음에 치유받았어요.’ 이런 내용에 마지막엔 ‘by Korean girl with love’를 덧붙여서. 제임스와 앨리슨은 환하게 기뻐하며 고맙다고 안아주었다.
그날은 투어 떠나기 전 1시간쯤이라 시간 여유가 있던 참이었다. 집주인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 후, 가능한 이 공간을 양껏 누리고 싶었다. 두 분의 손길이 묻은 테이블보에 턱을 괴고 창밖을 보던 나는 옆 테이블을 돌아봤다. 누가, 언제 와있었지? 인기척이 없어서 몰랐다. 혼자 온 할머니가 조식을 드시고 계셨다. 둘 다 혼자 온 여성이네, 이 숙소의 평균 연령은 좀 높군, 살짝 미소 짓는 찰나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이름이 에바 Eva인 할머니와 통성명하며 자연스레 얘기를 텄다. 76세라는 말을 듣고 히익 놀랄 정도로, 그녀는 동안이었다. 머리를 위로 올려 묶고 블러셔를 칠한 볼은 붉고, 살짝 마스카라를 칠한 인형 속눈썹에 도트 무늬 원피스를 입었다. 파란 눈은 똥그래서 호기심으로 가득 차 보였다. 주름살조차 별로 없는 편이라 소녀 감성의 60대 정도로 보였다. 성격도 쾌활하고 주인들과도 잘 아는 사이 같았다. 아니면 오늘 처음 본 건데 이렇게 프렌들리한건가?
순식간에 에바와 40분 넘게 수다를 떨었다. 그녀는 상대를 계속 말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호호’하고 눈을 찡긋하는 리액션이 생명력 넘쳤다. 요즘 여성들이 되고 싶어 하는 ‘귀여운 할머니’의 표본쯤 되려나.
“에바, 참 젊어 보여요. Amazing!”
“난 사실 드루이드, 마녀예요. 날씨 요정이고요. 항상 깨어있으려 노력하다 보니 젊어 보이나?”
“히히 그래 보여요. 저는 한국에서 왔어요.”
“한국, 좋아요! 난 세 민족 - 웨일스, 아일랜드, 스코틀랜드-의 피가 흘러요. 그래선지 여러 나라에 익숙하고 여행도 많이 다니죠 호호. 당신 관심사는 뭐예요? 여행 좋아해요?”
“저도 여행을 좋아해요. 스코틀랜드 오니까 너무 좋네요.”
우리는 한참 스코틀랜드의 돌이 많고 시크한 분위기와 볼거리에 대해 신나서 얘기했다. 에바는 내게 여기 온 이유를 물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하나만 말했다.
“사실 반지의 제왕 팬인데, 톨킨이 영국 사람이잖아요. 그 흔적을 여기서도 찾고 싶었어요.”
“오, 나도 빅 팬이예요. 우리 반지 원정대네요 호호.”
우리는 팔을 크로스하는 동작을 하며 웃었다.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로는, 톨킨이 사실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지역에서도 북유럽 신화적 모티브를 떠올리고 반지 세계관에 참조했다고. 팬인 나도 처음 듣는 사실이었다. 갑자기 모든 게 운명처럼 느껴졌다. 지금 이 순간 에바를 만난 것도. 에바는 자유롭게 여러 화두를 넘나들었다.
“요즘은 기후 변화에도 관심이 많아요. 경각심을 가지고 젊은 세대를 생각하려 해요.”
“오, 저도 관심 많아서 책도 몇 권 읽었어요.”
“멋져요. 아마 나까지는 괜찮겠지만 당신 세대는 갈수록 힘들어지겠죠.”
“당신은 요정이니까요.”
“정말로요. 당신도 될 수 있는걸요! Indeed. You can be an elf, as well.”
아침의 대화가 즐거워서 사진도 같이 찍고 메모장을 내밀었다. 그렇게 그녀의 이메일 주소를 땄다. 좋은 일이 생길 때 안부 메일을 보내기 위해 아껴놓고 있다. 너무 늦지 않게, 사진들과 함께 연락을 해야지. 아쉽게 투어 일정을 위해 숙소를 체크아웃하며 세 분과 작별 인사를 했다. 나이든 요정들의 시공간에서 묵고 나온 기분으로, 숙소를 돌아다봤다.
스코틀랜드의 노부부와 에바, 세 분은 우아하게 나이 들어가는 노년의 모델을 보여주었다. 젊은 나보다 훨씬 마음이 여유롭고 즐거워들 보였다. 그들의 인상 좋은 주름이 그걸 뒷받침해 준다. 내가 나이가 들면 더 여유로워질까 아니면 시간이 더 적게 남았다는 생각에 조급해질까? 아직 알 수 없지만 그렇게 오픈 마인드로 인생을 즐기며 살고 싶어진다. 주변 사람에게 선한 영향을 주는 그들의 주름살을 닮아가면 좋겠다. 그러다가 네스호에 깃들었다 풀려난 요정이 될 수도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