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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망 Oct 19. 2024

수프림팀

소화되지 않는 것들 



수프림팀은 민지가 백수 된 것을 기념한 동맹이었다. 힙합 가수도 아니고, 스포츠 브랜드도 아닌 ‘수프림팀’. ‘수’퍼 ‘프’리랜서들의 강’림’ (또는 어울'림') 이라는 뜻이다. 카피라이터로서 내가 지은 팀명. 프리랜서는 남들에게 백수 취급을 받는데, 그걸 ‘수퍼’ 하다고 명명하면 좀 당당해질까 싶어서 붙여봤다. 그럼 수프… 수프팀… 수프림팀? 우리는 평일을 자유롭게 쓸 수 있었으니 다른 안정적인 직장인 친구들보다 ‘수퍼’ 했다. 


그녀는 내 친한 대학 동기이고, 새로운 직무로 구직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1년째 돈을 잘 못 번다는 점에서 백수와 비슷한 프리랜서 카피라이터 생활을 하고 있었고 말이다. 이왕 취업 준비와 작업을 하는 김에 가끔 만나서 같이 하기로 했다. 말하자면 ‘갓생 프로젝트’였다.


수프림팀의 활동지는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이었다. 두 도서관은 공립 기관다운 엄숙함이 있었다. 조용하고 관리가 잘되어 있었다. 우리 루틴은 1시간 반 공부하고 15분 쉬는 식이었다. 점심은 5천 원짜리 구내식당을 이용했다. 뷔페식이라 적당량을 떠서 담아 먹는 구조였다. 민지와 식판을 마주 놓고 먹으니 학식 먹던 국문과생 시절이 생각났다.


-       우리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과거를 봐서 문신으로 잘 살았을 것 같지 않아? 

-       아니 왜 거기까지 간 거야. 하긴… 이순신이나 장영실은 아니었겠지. 

-       음, 허준이 제일 나았을 것 같아. 워라밸 면에서. 

-       …


우리는 국문과스러운 대화를 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먹고 나서는 다시 열람실에 자리를 잡았다. 민지는 문과에서 방향을 틀어 개발 쪽을 새로 공부하고 있었다. 직무 캠프를 마치고 자소서를 내며 재취업을 준비하는 상태였다. 이 시대의 ‘정약용’처럼 실용적인 학문을 배운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나는 아직도 문과의 최전방에 있었다. 영화 업계에 6년 넘게 있다가 프리랜서로 전향해 카피라이팅과 글공부를 하게 되었다. 프리랜서 중개 플랫폼 A에 카피/글 서비스를 등록해 뒀다. 의뢰는 한 달 평균 8건, 수익은 수수료를 빼면 100만 원 정도. 더 자기 PR을 하거나 재취업이 돼야 할 텐데 잘 안되어 조급한 상황이었다. 우리 둘에겐 미래가 막막하고 불투명해 보였다. 지난 경력은 버리고 앞으로 더 배우고 싶은 일을 선택한 결과였고, 그걸 책임져내야 했다. 





열람실에서 한동안 고개 숙이고 골몰하다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상대 옆구리나 팔꿈치를 툭 치는 순간이 왔다. ‘잠깐 쉴래?’ 입 모양으로 얘기했다. 그러면 아무리 집중한 상태여도 만사를 제치고 밖에 나가야 하는 게 팀의 규칙이었다. 국립 도서관들은 정원이 넓게 잘 되어있어 푸른 잎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풀밭 사이로 한가롭게 걸으며 미래에 대한 대화를 했다. 


-       난 왜 아직도 자리를 못 잡을까? 프리랜서 된 지 1년 넘어서 조급해져. 

-       에이 더 해봐야 알지. 나야말로 취직이 다시 되려나 모르겠어... 

-       수요 많은 직군이라 괜찮을 거야. 나는… 포기할 때와 노력할 때를 아는 게 어려운 거 같아. 남편만 돈 벌어선 이 생활을 지속할 수 없어서, 자리 잡는 데 데드라인을 정하긴 해야지. 

-       그렇겠다. 나는 퇴직금으로 좀 버텨보려고. 


데드라인 없이 하고 싶은 일을 한다면 좋겠지만 대부분 그럴 형편이 안 된다. 최근 경제 활동 안 하고 쉬는 15~29세 청년이 39만 명이라는 기사가 자주 보인다. 학원도 안 다니고 조금도 벌지 않는 인구수를 집계한 건데, 내 상태와 아주 다르진 않은 것 같다. 사회적 문제가 크다고 느낀다. 주식과 부동산 등 더 이상 노동으로 성공하는 모델이 아닌 것, 나이와 직업 귀천을 따지는 각박한 분위기, 아직 프리랜서로서 정착하기 어려운 직업 환경과 미제도화된 부분. 그것들을 더 논하고 싶고 세상에 따지고 싶다. 하지만 나는 자꾸 나 개인의 부족함과 무능력을 탓하게 된다. 


-       야, 이것 봐. 이거 뭐야? 


 갑자기 민지는 풀밭에서 허리를 굽혀 조개껍질을 골라냈다. 나는 얼떨결에 그걸 한 손에 쥐어보았다. 정확히 내가 알고 있는 ‘조개껍질’이었다. 놀라서 빽 소리를 질렀다. 


-       헉 이거 내꺼야!

-       뭐야… 그렇게 갖고 싶었어…?  

-       아니 내가 흘린 거야! 저번에 바다 가서 주머니에 넣어왔는데… 왜 여기 떨어졌지? 아휴. 


호들갑을 떨며 그걸 소중하게 매만졌다. 왠지 주머니가 허전하더니만. 잃어버린 줄 알았다 찾으니 되찾은 기쁨이 커서 그것이 값비싼 보석이라도 된 것 같았다. 


-       웃기다. 바다에서부터 널 따라온 거야? 주머니에 넣은 너도 이상해 하하. 

-       왠지 우리 같지 않냐? 없어질 듯 없어지지 않는… 정신이 나갔다가도 다시 돌아오는. 

-       그러게. 먼 곳을 돌아왔네. 잃어버린 게 사실 그 자리에 와있고… 


갑자기 둘의 표정이 아련해졌다. 우린 30대 중반에 진로를 바꾸고 불안해하면서도 버티고 있었다. 이 조개껍질이 마치 팀의 로고처럼 보였다. 바다에서 도서관까지 경로를 이탈하면서도 제자리(내 옆)를 찾아온 것처럼. 우리도 세상 속에서 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까? 환경이 무지하게 바뀌더라도? 





안타깝게도, 수프림팀 동맹은 별로 수퍼하지 않게 1달 만에 종료됐다. 좋은(?) 시절이 오래 가지 않았다. 민지가 예상보다 빨리 취업에 성공해 버린 것이다. 그녀는 얼떨떨해했고, 나는 친구의 취업을 축하하는 마음이 컸지만 동맹을 잃은 기분도 들고 꽤 서글펐다. 그렇다고 내 곁에 머물러주길 바랄 순 없는 노릇. 다행히 (아니 아쉽게도) 민지는 다시는 수프림팀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나 혼자 가는 도서관은 전에 없이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혼자 작업하고 공부하는 우리에겐 서로가 필요했었다. 중간중간 서로에게 휴식을 허락하는 친구, 매점 가서 사탕 사먹으면서 서로 놀리다 터지던 웃음, 지치지 않는 서로의 기질을 발견해 주고 응원하는 존재가. 솔직히 거리상 각자 동네 도서관에 가는 게 편하지만 같이하기 위해 불편함을 감수했다. 편도 1시간 안쪽으로 둘의 중간쯤, 공평하게 먼 거리에서 흔쾌히 만난 것이다. 이제 친구의 역할을 내가 나에게 해줘야 한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 우린 또 빈 시간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시간이 겹치고 마음이 맞다면 한 시절을 함께 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중엔 또 어떤 사건이나 신분이 ‘강림’할지, 두려우면서도 궁금해진다. 수프림팀은 현재는 원팀 체제로 가고 있다. 나는 집에서 일하고 민지는 회사에서 일한다. 먼 미래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민지와 연락할 때면 가끔 조개껍질을 떠올리며 미소 짓는다. 각자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어도 제자리를 찾아갈 거라고, 그런 점에서 언제나 같은 팀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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