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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망 Oct 23. 2024

조개껍질로 추는 춤

소화되지 않는 것들




35명 넘는 여성들과 1명의 남성이 다 같이 훌라를 췄다. 전용 의상인 ‘파우’ 스커트를 화려하게 차려입고, 머리엔 꽃과 조개 모양 핀을 달고서. 여긴 하와이가 아니다. 서해안 선녀바위 해수욕장이다. 오늘은 바다에서 수업을 하는 원데이 클래스 날이었다. 휴양지에 어울리는 노래를 배웠다. 훌라 스승 하이는 바다를 등지고 서고, 우리는 바다를 보며 안무를 췄다. 곡엔 빠르게 한 바퀴 도는 동작이 있는데 하다 보니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다. 다들 난감하게 하하 웃고 비틀거리니 술 취한 사람들 같았다. 우린 하와이 춤에 취한 훌라 시스터즈였다. 



서해안은 바닷물이 빨리 사라졌다. 우리는 총 3시간 정도 바닷가에서 놀았는데, 시시각각 바닷물은 저 멀리 도망가고 까만 바위가 드러났다. 처음 와서 사진 찍을 때까지만 해도 해변가에 찰랑거리는 물에 발을 담그고 놀았다. 차가운 감각이 느껴졌는데, 그 차가운 물이 해변 모래의 열기까지 함께 데리고 달아나고 있었다. 저 멀리 어디까지 달음질치려나 눈을 가늘게 뜨고 수평선을 봤다. 





최근에 우리가 배운 곡은 ‘Pearly Shells’이다. 진주조개, 진주만에 어서 오라는 가사. 이 노래 가사 중 1, 2절은 영어이고 3, 4절은 하와이 원주민 언어이다. 나는 하와이어 파트를 훨씬 좋아한다. 가사엔 신화 속 ‘상어 여신’도 등장하는데, 양손으로 요리조리 파도를 가르는 동작이라 귀엽고 재밌다. 한편 조개를 뜻하는 Pupu 라는 귀여운 발음을 따라 하면 파도에서 푸푸, 어푸어푸하며 조개를 주우러 다니고 싶어진다. 오늘은 바다로 수업을 온 김에 머리에 조개 모양 핀을 꽂고 왔다. 둘러보니 다들 조개 모양 핀이나 화려한 꽃핀을 꽂았다. (대중교통에서부터 핀 꽂고 온 건 아니고, 이곳에 도착해서 훌라시스터즈로 변신했다. 근데 왜 변명을 하고 있지?)


 

보통 야외에서 훌라를 추면 땅과 교감하기 위해 다들 맨발로 춘다. 여기는 조개껍질이 모여있는 곳이 많아 발바닥을 찔러서 꽤 따가웠다. 조개껍질은 흰색이고 물결무늬가 있었는데, 시퍼렇게 멍이 들어 보이기도 했다. 큰 것은 굴 정도, 작은 것은 바지락 정도. 누군가는 사진 찍으러 빨리 걸어가면서 조개껍질에 따가워 악 소리를 냈다. 어떤 쌤 (시스터즈들끼리 서로를 ‘쌤’이라고 부른다.)이 그걸 보고 큰 소리로 말했다. “인생에서 이건 암것도 아냐 쌤!” 우리는 다 같이 웃었다. 



훌라 시스터즈는 돗자리를 펴고 앉아 바다를 같이 바라봤다. 동그랗게 둘러앉지 않고 모두 바다 쪽을 향해 앉은 채, 가져온 김밥, 도시락, 과자들을 나누고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다정한 눈빛과 웃음을 지었다. 다들 자신에게 어울리는 의상들을 입고 왔고 서로 ‘그거 어디서 샀어요?’ 정보 공유도 했다. 낯가리는 내게도 참 편안한 시공간이었다. ‘환대’라는 가치를 이 시각 가장 잘 실천하고 있는 공동체 중 하나가 아닐까. 



나는 요즘 부쩍 우울한 일들이 생기던 터라 중간중간 울적해지는 기분을 어쩌지 못했다. 그냥 바다에 잠겨있으면 어떨까? 생각에 입꼬리도 내려갔지만, 바다와 훌라의 기운을 받다 보니 양지에 나온 것 같았다. 음지에서 양지의 햇살을 느끼자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시스터즈 중엔 깜찍한 여자 어린이를 데리고 온 분도 있어 계속 눈길이 갔다. 그 아이가 안경 쓰고 수줍게 웃는데 부끄럼 많던 내 어릴 때가 생각났다. 뽀얗고 작은 손으로 모래성을 쌓고 조개껍질을 붙이고 있었다. 어른들은 이제 모래를 보고 모래성을 잘 떠올리지 못하는데 말이다. 아이는 조개껍질의 간격을 적당히 띄워서 장식하며 모래가 숨 쉴 수 있는 여유도 주었다. 모래 표면에 눈송이가 내려앉은 것 같았다. 5월 볕 좋은 날에 내린 눈은 바닷가에 송이송이 앉았다. 어른들은 종일 바다 가까이로 가서 춤을 추는데, 아이는 보채지도 않고 얌전히 바라봐주었다. 




1시간 정도 추던 중, 주변 사람들이 의외로 우리를 안 보길래 '왜 안보지? 더 보고 가세요' 생각도 들었는데 또 막상 보기 시작하니까 민망했다. 구경하다 사진을 찍거나 “이거 무슨 동호회예요? 학교에서 하는 거 아니구?” 물어보기도 했다. 우리는 “네 학원, 동호회 같은 거예요!” 했다. 


해변에서 30명이 넘는 여성들이 화려한 복장을 하고 단체로 추는 광경이라니. 얼마나 진기했을까. 사실 집단 내부에 속하면 그게 진기한 줄도 잘 모르지만. 사람 많은 야외에서 추니 실감이 났다. 지금 추는 춤이 한국에선 이질적으로 여겨지는 하와이의 전통춤이라는 것. 도심에서 벗어나 자연과 함께하는 몸짓이라는 것. 지구와 세상을 사랑하다가 저절로 훌라가 발명됐을 것 같다. 언어에서 시가 태어나듯이, 노래가 태어나듯이. 



우리의 스승 또한 훌라를 닮아 단단하고 밝은 에너지가 숨 쉬는 사람이다. 호흡이 자연과 함께하는 듯한 사람. 어딘가 인생 10회 차인 느낌이랄까…? 나도 훌라를 추다 보면 그렇게 될까? 그런 스승도 마무리 소감을 말하면서 울컥하기도 했다. 30명의 응축된 에너지를 느끼는 듯했다. 


“실제로 좋은 일이 일어나느냐가 중요하기보다는, 나에게 온 일을 축제처럼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행복하고, 축제처럼 살게 되는 것 같아요. 생각해 보면 저는 훌라를 접하고 항상 행복했어요. 내 운명을 축제로 열어버리는 거예요. 나중에 이 순간을 기억하면 반짝거리고 그리울 것 같아요.” 


그녀의 말이 모두의 아름다운 순간을 이어주고 바다의 품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시스터즈의 박수치는 양손날들이 맞부딪히며 노래하는 조개껍질들 같았다. 스승의 인생 또한 좋은 일만 있지는 않을 텐데,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가 있을까. 당찬 그녀는 성큼성큼 조개껍질을 맨발로 밟고 새로운 세계로 앞서가고 있었다. 나도 따라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모래에 잠긴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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