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화되지 않는 것들
이름이 같은 동명이인을 보면 묘해진다. 감정 이입을 넘어선 감정 전이랄까? 외모가 닮거나 직업, 생일이 같은 사람보다도 이름이 같으면 본질적이고 묘한 동질감을 준다. ‘우린 영혼이 연결되어 있어.’ 오래된 미신 같은 것에 단박에 마음을 줘버리는 편이다.
그동안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많이 봐왔다. 민정이란 이름은 내 세대에서 흔한 이름이었으니까. 중학교 때 같은 반이던 동명이인 친구. 누가 이름을 부르면 “어?”하고 동시에 쳐다보는 통에, 구별을 위해 ‘큰 민정’, ‘작은 민정’으로 나뉘어 불렸던. “우린 성격도 닮았어.”, “민정이들은 다 이쁘지 않냐?” 팔짱 끼고 붙어 다녔다. 이름이라는 속성으로 쉽게 같은 그룹이 되었다. 같은 이름을 가진 연예인들에도 비교적 쉽게 호감이 갔다.
현대 기업들의 메일링 마케팅이 이런 심리를 이용하는 걸 보면 나만 ‘이름 이입’을 하는 게 아닌가 보다. ‘고민이 많은 민정님을 위한 뉴스!’ 같은 제목을 보면 클릭하게 되는, 아마도 발신자가 노렸을 본능적 끌림. 수신자 이름을 넣어 맞춤 발송하는 이 알고리즘의 산물이 내게 유독 와닿았던 건 몇 년 전이었다.
‘민정이’는 네이버를 통해 무작위로 쏟아지던 아이들의 이름 속에서 내게 와닿았다. 내 이름을 보고는 반사적으로 기사를 눌렀다. 인터넷 속에서 반짝이는 하나의 은빛 실로 연결된 것 같았다. 불우한 아이들의 사연을 많이 봐왔지만 민정이의 사연은 더욱 와닿았다. 같은 이름을 갖고 태어난 아이. 성도 안 쓰여있는 그냥 ‘민정이’. 어떤 평행 우주에선 내가 네가 됐을 수도, 네가 내가 됐을 수도 있겠지. 민정이는 초등학교에도 들어가기 전, 뇌병변 장애를 판정받았다. 재활 치료를 평생 해야 하는 큰 장애다. 그 애의 부모님은 의료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모금을 받게 되었다.
어느새 사연에 빨려 들어가 눈물을 흘렸다. 나도 생활비가 빠듯하지만, 이름이 같은 애 하나도 후원을 못 할까? 하는 마음에 기부 버튼을 눌렀다. 평소 어린 시절이 불행했다고 불평해 왔는데, 민정이의 형편 앞에선 할 말을 잃었다. 왜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운명이 이렇게나 다를까. 그애를 가여워하는 입장 자체로도 죄책감이 들었다. 모든 민정이들이 행복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선, 나는 어린 민정이를 금방 잊었다.
이름에 과몰입하는 성향은 결혼하면서 남편 이름에까지 확장됐다. 남편 ‘지호’와 이름이 같은 어린이 ‘지호’의 사연은 최근 뉴스 기사에서 보았다. 지호는 지금 10살이고, 과거의 학대로 실명한 상태다. 5살 때 지호는 엄마가 데려온 아저씨와 함께 살았다. 아저씨는 사소한 이유로 지호를 마구 때렸다. 작은 몸으로 잔혹한 폭력을 견뎌낸 지호는 한쪽 눈을 잃어야 했다. 폭력을 방치한 엄마인데도, “엄마 생각하면서 참았어요.”라 말했다고. 지금 지호는 여러 아이들을 그룹으로 보살피는 ‘그룹홈’이라는 시설에서 지내고 있다. 정부의 지원을 받긴 하지만 운영비는 턱없이 적다.
기사를 읽는데 앉은 테이블 위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하필 난 식당에서 혼자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공공장소니까 그쳐야지 생각했지만 눈물 줄기는 더 촘촘하게 흘렀다. 휴지 세 장으로 틀어 막아지지 않을 정도로. 뭘 먹으면서 우는 모습이 얼마나 이상해 보일지 걱정이 좀 됐지만 이내 포기했다. 휴지를 더 빼와서 펼쳐놓고 본격적으로 숨죽이고 울었다. 목 멕혀서 물도 좀 마셨다.
점심 시간에 핸드폰을 보는 많은 사람들을 제치고 내게로 닿은 그의 사연. 100번은 불러본 이름이지만 오늘따라 너무나 연약하게 들렸다. 그 애가 다른 이름이었어도 아마 울었겠지만, 이름으로 인해 슬픔이 두 배로 증폭된 것 같았다. 이런 학대가 방치되는 세상이라니 가슴이 미어졌다.
샌드위치집 안 타인들은 평온하고 즐겁게 웃고들 있었다. 문득 이상한 상상을 했다. 옆 테이블에 다가가 스마트폰 화면 속 기사를 보여주는 거다. “여기 좀 보세요. 지호라고, 이런 아이도 있어요. 도움이 필요한 애예요.” 그렇게 이웃들에게 한 명 한 명 알려주는 거다. 하지만 그럼 안된다.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을 보는 걸 불편해하고 꺼린다.
그 와중에 눈물 젖은 샌드위치를 꾸역꾸역 다 먹은 나는 무심코 스크롤을 돌리려다가 그룹홈에 대해 더 검색해 봤다. 믿을 만한 곳이라는 판단이 들어 정기 후원을 결제했다. 할 수 있는 게 당장 이것밖에 없다니, 이런 아이들이 많을 텐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며 식당을 나섰다. 바깥 햇살은 따스하고 맑았다. 지호의 이야기는 잊고있던 어린 민정이에 대한 기억도 불러왔다. 이번에는 그 애들을 쉽게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더많은 사람들이 관심 갖는다고 해서 쉽게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사회와 양육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바뀌어야 하고 취약층에 대한 복지, 제도적 지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가정 학대를 끊기 위해선 부모의 자격에 대해 엄정한 판단이 필요하고 적극적으로 격리해야 한다. 가족 내 일이라고 나몰라라 가정의 기능에만 맡겨두다가 아픈 아이들이 계속 나오는 것 아닌가. 여기에 아이도 없는 내가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더 공부하고 생각해볼 문제다.
그렇다면 당장 쉬운 것부터 천천히 시작해볼까. 바꾸기 어렵다고 외면하기보다. 저녁에는 남편에게 이 기사를 공유하고 같이 슬퍼해야지. 지호도 지호와 민정이에게 이입하고, 그렇게 각자 이름들에 이입하면서 슬픔이 퍼져나가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나와 짝지어진 사람이 이 사회에 살고 있다고 한번쯤 생각해볼 수 있다면. 소외된 모든 아이들의 이름이 더 확장되고 많이 불리길. 앞으로 태어날 이름들에도 이 마음들이 옮겨붙길. 우리는 이름이 같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