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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운 Mar 25. 2024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임은주


내용요약 : 효섭을 중심으로 한 인물들 간의 관계로부터 일상 탈출을 시도한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돼지가 우물에 빠져? 우습군! 헤엄칠 줄 아는 돼지? 물론 헤엄칠 줄 아는 돼지였다면 빠진 게 아니었겠지. 아마 헤엄칠 줄 모르는 돼지일 거야. 그렇지 않다면 『돼지가 우물에서 헤엄친 날 이거나 수영한 날』정도의 제목이었겠지.”


돼지?, 우물? 아무런 관련 없어 보이는 제목입니다. 돼지의 무게? 로나 우물의 깊이로 판단해 본다면, 가벼운 제목을 아닐 것 같습니다. 어떤 단서가 제목에 숨어 있을 것 같은 느낌입니다.


돼지의 본성을 원래 먹고, 자고, 싸고, 그저 본능적 행동, 말하자면 살기 위한 최소한의 행동 외에는 도무지 하려고 들지 않는 그런 생명체 정도로 생각한다면..., (사진을 공부한 이후로 대상을 바라보는 결이 조금 달라진 건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돼지의 상징성이 그리 편하게 마음에 와닿진 않습니다.) 그저 그런 본능만을 수행하는 동물로 치부하고 싶진 않지만, 일단은 그 정도로 생각해 보기로 했습니다.


우물 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우물 안 개구리」를 생각했습니다. 이 작품 분석에 이 속담이 실마리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인간은 원래 돼지가 아닐까? 매일매일의 삶이 어제와 다를 바 없는 돼지! 우리들의 현실도 너무나 똑같은 일상의 반복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돼지로써의 존재가 두려워 벗어나려 애쓰고 있는 건 아닌지. 우리의 모습을 너무나도 빼닮은 돼지로 인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들켜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돼지를 나쁜 쪽으로 깎아내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음글부터는 문체를 조금 바꾸어 적어보겠습니다.



극장직원 민재 효섭 보경 동우


극장 직원이 민재와 효섭을 살해한 사건은 모든 것을 차단시켜 버리기에 충분하다. 순수의 탈출구였던 민재의 그곳에 유치의 산물인 효섭이 들어가는 것을 참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탈출구마저도 봉쇄해 버린 일종의 자폭행위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것을 통해 진정한 일상의 탈출구는 존재하지 않음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민재와 효섭의 주검을 사이에 두고 마치 탈출구의 문과도 같은 효섭의 현관 철문과 창문사이에서 극장직원과 보경은 그들의 탈출구를 잃어버린 채 망연자실해 있다. 탈출할 수 없는 일상 밖의 그 무언가로의 탈출을 시도하며 고통받고 있는 민재를 위해, 또한 결코 순수하지 않은 효섭을 순수의 대상으로 탈출을 시도하는 보경을 위해 오히려 극장직원이 희생된 것은 아닐까? 진정으로 순수한 사랑의 마음으로 민재를 그만의 탈출구로 생각하지 않았다면 과연 그런 어마어마한 짓을 할 수 있었을까? 또한 그는 일상탈출의 허상을 가장 먼저 깨달은 죄로 희생량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소설 속의 삶과 같이 이상적인 삶을 추구하려는 효섭은 보경을 통해 그 삶을 실현하려 한다. 효섭은 자신의 현실탈출 방향을 드러내는 발언을 한다. 민재에게 : “너는 순수랑 유치랑 구별도 못해?”라고 말한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보경과 자신은 순수의 이상을 실현해 나아가고 있음을, 그러니 '유치'는 너는 나를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 아닐까? 또한 그의 현실은 돼지처럼 지저분하고 유치하기 그지없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는 민재를 유치하다고 몰아세우지만, 결국 그녀와 SEX를 하게 된다. 이 또한 진정한 순수의 탈출구로서의 SEX를 망각한 행동이 아닌가! 그 결과는 곧 죽음으로 다가오게 된다. 이러한 죽음의 장면과 맞물려 마지막 장면은 일상과 탈출시도라는 양대 축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한 장, 한 장 되도록 이면 아귀를 맞추어 가며 바닥에 펼처놓은 신문, 그리고 베란다로 나가 그곳의 창문을 활짝 여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보경이 그들의 살인사건 기사를 읽은 것 같지는 않다. 일상의 틀 속에 어김없이 제일 먼저 등장하는 신문, 보경은 앞에서부터 보기도 싫고 뒤쪽에서도 대충 한번 들추어 뭔가를 보는 것 같더니......) 신문!, 창문! 과연 무엇을 감독은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신문은 매일매일 같은 시각에 도착한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을 상징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일상의 똑같음을 보경은 한 장, 한 장 나란히 정열 함으로써 그 획일적이고 권태로운 일상의 단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보경은 조심스레 정성 들여 아귀를 맞춘 신문의 낱장을 무심히 밟고 베란다로 나가버린다. 창문을 통해 보경은 일상에서의 탈출에 대한 욕망을 드러낸다. 보경은 효섭의 죽음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의 탈출구였던 그는 죽었다. 더 이상의 탈출구가 없어진 샘이다. 그렇다면 보경은 창문을 통해 영원한 탈출을 시도했을까?


김영하 씨의 작품 “비상구”가 생각난다. 왠지 비슷한 냄새가 난다. 탈출구, 이 영화 속에는 정사장면(탈출시도)이 종종 등장한다. 남편은 일상 속에서 탈출구를 찾은 것일까? 효섭에게 탈출구, 우물, 여자의 질, 비상구 뭔가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작품 속의 남자 돼지들은 그곳에 다 빠져 허우적거린다. 「우물 안 개구리」라는 속담이 어쩌면 맞아 들어갈지도 모르겠다. 일상의 탈출을 꽤 하려는 그들은 결국 또 다른 일상의 울타리 속에 같이는 꼴이 된 것은 아닐까?  



탈출구로 상징되는 창문을 통해, 일상 밖의 공기가 바람에 실려 일상의 신문을 날려 버렸으면 어땠을까? 아마도 창밖의 바람에 의해 신문이 움직였다면, 그것은 일상에서의 탈출에서 성공한다는 상징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속의 신문은 꿈적도 하지 않는다. 이것은 보경의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은 실패했다는 뜻일까? 아니면 일상은 잘 정리해 둔 채로 잠시 일탈의 기쁨을 맛보길 원했던 것일까? 알 수 없다.


동우가 궁금하다. 그는 탈출 실패를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이제는 일상 속에서 출구를 찾고 있는 듯하다. 그는 아내 보경의 품속에서 허우적 거린다. 담배를 사러 간다.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그는 순수한 정신적 탈출이 아닌 단순한 순결의 탈출만을 꽤 한 인물은 아닐까? 동우의 마지막 장면은 알 듯 모를 듯 찜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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