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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귤 Oct 13. 2022

때늦은 공포영화

영남알프스의 가을

한국에는 유럽 알프스처럼 아름답다고 하여 한국의 알프스로 불리는 등산코스가 있다. 바로 영남지방을 걸쳐 이루어진 가지산, 운문산, 천황산, 영축산, 신불산, 간월산, 고헌산 7개의 산맥이다. 전염 바이러스가 몸뿐만 아니라 마음의 발목까지 묶어버린 2021년. 현실의 답답함을 도피성 출국으로 해소하던 나는 가로막힌 하늘길을 갈망하다, 어쩌다, 우연히, 등산을 시작해버렸다. 그 시작으로 먼 하늘을 바라보지 않아도, 우리나라에도, 땅에도 내 주변에도 좋은 곳이 참 많구나를 느꼈고 그 즈음 태어나 처음으로 한국의 알프스를 보기 위해 영남지방으로 떠나게 된다.


등산을 시작하고 신박한 문화 중 하나는 바로 '안내산악회' 다. 안내산악회는 전국 각지 등산 교통편을 같이 이용하는 일종의 공유문화다. 산행을 끝나고 나면 보통 몸이 굉장히 피로하고 지치기 때문에 운전을 하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쉽지 않다. 안내산악회를 이용하면 들머리와 날머리에 아늑한 우등 버스가 나를 데려다주고, 다시 데리고 오기 때문에 아주 편하게 산행을 다녀올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튼실한 김밥과 물까지 제공해주시니 금액도 굉장히 합리적이다.


주말 사당역 7번 출구. 전국 각지로 떠나는 산악 버스가 동을 밝힌다. 이름 모를 동지들과 반가운 눈인사를 나누고 우등버스에 올라 긴 고속도로를 달린다. 전날 잠을 설쳐 곤히 자니 어느덧 도착한 휴게소. 잠이 덜 깬 눈으로 차가운 은박지를 벗기니 아침 이슬 때문인지 한국인의 따뜻한 정 때문인지 김이 촉촉이 젖은 김밥 등장한다. 맛있게 먹는다. 비행기에서 기내식 먹는 설레는 기분.


오전 11시 즈음, 목이 꺾이고 침을 흘리며 달리고 달려 간월산장 입구에 도착한다. 안내산악회는 산악 대장님도 계시다. 대장님은 오늘의 코스를 요약해서 알려주시며 부디 ‘안전’한 산행이 되시라고 신신당부하신다. 이른 아침 잘 먹고 잘 쉬며 도착한 안내 산악회.


오늘도 감사한 마음으로 잘 다녀오겠습니다!




정오가 가까워지니 손끝이 서늘한 아침 기운은 사라지고, 청쾌한 가을 공기가 얼굴 위에 닿는 느낌이 가득하다. 2박 3일 동안 영남알프스 종주를 도전하신다는 우리 어머니 나이대 등산객들의 명량한 목소리가 새소리와 뒤섞인다. 재잘거리는 그 싱그런 소리들에 맞춰 나의 심장이 두근거린다.


들머리 초반 오르막길의 수고로움을 감수하면 억새로 유명한 간월재에 도착한다. 여름의 뜨거운 태양빛을 가득 머금고 자란 튼튼한 갈대가 가득하다. 회갈색 가을 군집이 바람에 맞춰 흐드러진다. 그 물결이 산자락을 가른다. 산이 춤추는 것 같다.


하늘은 맑고 선명한데 땅에는 가을색이 가득하여 대비가 선명하다. 이상과 현실의 구분을 채도가 구분하는 공간에서 하늘이 마치 바다 같다. 이곳은 어릴 적 보아가 불렀던 '아틀란티스', 바다 아래로 떨어진 미지의 세상 같다. 나는 아틀란티스의 소녀 지구인과 다른 곳에서 내려온 거라 믿고 싶어질 즈음. 차가운 바람이 내 뺨다구를 때려 지금 현실에 있다는 것을 깨우친다.




억새 군락지를 벗어나면 영남을 이루는 7개의 산이 만나고 겹쳐, 신비로운 레이어가 펼쳐진 영남알프스가 나온다. 7개의 산들은 누구도 제 모습을 더 보여주겠다고 나서지 않고, 서로서로 양보하며 각자의 자리를 잡고 있다. 그 다정한 층들의 틈으로 가을 햇살과 공기가 스며든다. 빛을 먹물 삼아 자연이 만드는 발묵화를 만든다. 먹이 아닌 태양빛을 머금은 눈부신 산자락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영남 알프스라는 이름이 잘못되었음을 느낀다. 영남알프스가 아니라 '알프스 영남'이 맞는 말이다.


금강산도 식전에는 곤란함이라, 어떤 식당에서도 볼 수 없는 경관을 보며 사랑하는 이와 식사를 나눈다. 나를 그리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림과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계절에, 더없이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는 식사시간이다. 나를 위해 서울에 새벽같이 준비되어 살뜰히 보냉팩에 담겨 도착한 두부면으로 만든 도시락. 계절 맞은 과일과 함께 오물거리니 달콤함과 고소함이 섞인 입 안은 아득하고 평화롭다. 그 내음이 나오는 목가적인 숨소리에서 나는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해진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출발. 근데 어랏. 주위 공기가 이상하다. 갑자기 해가 떨어지는 색이 느껴진다. 어랏, 내가 내려가야 할 길은 아직 한참인데 벌써 일몰 분위기가 형성됐다. 들머리에 도착해 산행을 시작한 시간이 정오가 가까웠는데, 쏟아지는 햇살과 눈부신 풍경을 감상하느라 해가 지는 시간인 줄도 몰랐던 것이다. 게다가 여름보다 해가 일찍 떨어진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가을의 밤은 도시에서 감미로운 계절의 장르를 만들지만 산에서는 일순간 스릴러라는 장르로 돌변한다. 내면 깊은 곳에서 외 치우는 다급한 자아의 목소리 ‘큰일 났다!’


산에는 어둠이 순식간에 내려앉는다. 해가 뉘엿하더니 금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스마트폰 플래시로는 빛이 약해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미처 챙기지 못한 헤드랜턴이 그립다. 물 마른 풀벌레 소리가 기이하게 느껴지고 나부끼는 산악회 리본이 으스스하게 느껴진다. 화장실을 못 간 지 7시간이 넘어가고 등에는 식은땀이 내린다. 그 식은땀이 더워서 생긴 건지 무서워서 생긴 건지 분별이 안 가기 시작하자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여기에서 사서 고생을 하고 있는지 눈물이 찔끔 난다. 발걸음을 재촉하지만 처음 등산할 때 길을 잃은 것처럼 낯설고 두렵고 무섭다.


이전의 목가적인 분위기와 감미로운 분위기는 떨어진 해를 기점으로 일순간에 사라진다. 둘이 손을 꼭 잡고 걸어보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산길은 처참하고 무섭다. 이미 '안전 산행'하라는 대장님과의 약속은 허물어졌고, 나의 안내 버스는 떠난 지 오래이다. 발걸음을 재촉해 보이지만 기이한 산길은 걸으면 걸을수록 더욱 길어진 느낌이다. 적막만 감돌던 산길. 둘이 손 꼭 붙잡고 간절한 마음으로 걸음만 집중하던 가을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적막 속에서 문명의 소음이 찾아온다. 와, 도착이다. 안도감에 막힌 숨이 터지니 드디어 후련하다. 지산 만남의 광장. 마을 구판장에서 올지 모를 택시를 기약 없이 기다리는데, 밤하늘 별은 내 마음을 전혀 모르고 청초롬히 빛이 난다. 내가 지나온 가을 산은 이제는 검어지고, 그 산이 둘러싼 오래된 마을 건물들은 기이하게 느껴지는데 이 공간이 비현실적이어서 여기가 정말 현실이 맞는지, 나 살아서 돌아온 것 맞는지, 내가 잠시 어디에 홀렸던 것은 아닌지 의문이다. 여름은 한참전에 지나갔는데 때 늦은 공포영화에 소름이 오도도 돋는다.






버스는 이미 놓치고, 급하게 울산역에서 서울행 KTX를 기다리고 있는 침묵이 감도는 밤 9시의 승강장. 산에서는 사방이 조용했는데 이제는 두 사람이 조용하다. 점심에 먹은 두부면은 이미 다 소화가 되었지만 참담한 패배감에 입맛이 씁쓸하여 군침이 돌지 않는다. 집에 갈길은 아직 400km나 남았다. 습기와 피로로 찌든 겁이 많았던 서로의 얼굴을 보니 웃음이 튀어나온다.


그때 나는 말했다.

"오늘 힘들었으니까! 오늘 추억을 더욱더 잊지 못할 거야! 지금 이 순간이 언젠간 미화되어 기억되겠지? "


지금 나는 말한다.

"글을 쓰는 지금까지는 아닌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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